최근 수정 시각 : 2023-04-08 03:38:32

염현

閻顯
(? ~ 125)

후한의 전횡을 저지른 외척으로 사례 하남윤(河南尹) 형양현(滎陽縣) 사람이다.[1]

안사황후 염씨의 오빠로 121년에 등씨 일족이 축출되면서 염씨 일족이 총애를 받자 금군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125년 3월 10일에 안제가 붕어하면서 전소제를 황제로 세웠고, 염현은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의동삼사(儀同三司) 장사후(長社侯)가 되었다.

염현은 대장군 경보의 지위가 높고, 권세가 막중하면서 이전에 조정에서 위엄을 행사한 것을 시기해, 유사의 관리를 시켜 경보와 그의 무리가 권위로 위복을 만들어내 도를 벗어났다고 상주해 그들을 귀양보내거나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염현의 형제들은 관직을 제수받아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전소제의 병이 위독해지자 중상시 손정 등이 권신 염현, 환관 강경 등을 죽이기로 모의했다. 연광 4년 겨울 10월 27일(125년 12월 10일)에 전소제가 죽자 염현은 염태후에게 황제의 붕어를 비밀로 해서 상사를 발표하지 말도록 하면서 여러 황자들을 소집한 후 궁문을 잠그고 병사를 주둔시켜 스스로 지켰다. 11월 4일, 경사(낙양)와 16개의 군, 봉국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탄 손정의 무리가 순제를 세우기로 하고, 궁성으로 들어가 강경 등을 포함한 염현의 무리를 살육했다.

염현은 북궁에 있다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소황문 번등의 권유로 염태후의 조서를 가지고 월기교위 풍시, 호분중랑장 염승 등을 시켜 평삭문에서 난을 일으킨 손정을 막게 하려고 했는데, 염현이 번등과 함께 좌액문 밖에서 관리와 병사를 맞이하러 가려다가 이 틈을 타서 교위 풍시가 번등을 죽였다. 염현은 결국 순제가 파견한 시어사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주살되었고, 염씨 일족은 살해되거나 유배를 갔다. 염현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염포가 익주 파서군 안한현 사람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염현의 사존 가운데 일부가 살아서 이사를 갔거나 유배를 간 뒤 정착한 걸로 추정된다. 후손에 염포가 있고 또 박릉문정남(博陵文貞男) 염입본이 있다.


[1] 중문 위키백과에서 염씨본관으로 태원군(太原郡)을 제시했지만 염현이 태원염씨인데 하남윤으로 옮긴 건지 태원염씨와 다른 하남염씨인지 안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