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코파이 요흔 작, 오리스카니 전투의 허키머.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8월 6일 뉴욕 주 오리스카니에서 영국군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러 진군하던 대륙군을 기습한 전투. 전투 자체는 영국군이 승리를 거뒀지만, 그 동안 스탠윅스 요새에서 출격한 대륙군이 영국군의 숙영지를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인디언의 사기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는 이득이 없었다.2. 배경
1777년 초, 캐나다 방면 영국군 사령관 존 버고인 소장은 미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뉴잉글랜드가 반란의 본거지라고 확신한 그는 자신의 군대가 챔플레인 호수를 건너 허드슨 강을 따라 내려가 올버니에니로 진군하는 동안 배리 세인트 리저 중령이 이끄는 별동대가 온타리오 호수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모하크 계곡을 통과하여 올버니로 나아가기로 했다. 한편 버고인 소장은 뉴욕의 윌리엄 하우 소장에게도 허드슨 강을 따라 북상해 자신과 합세할 것을 제안했고, 미국 식민지문제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 역시 하우에게 버고인과 협조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하우는 사크빌의 지시에서 자신이 어떻게 버고인과 협조해야 하는 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빌미로 삼아 허드슨 강을 따라 북상하기보다는 반란군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로 곧장 진격하는 것을 선택했다.리저는 몬트리올 근처에서 제8, 34 영국 보병 연대와 영국 충성파 민병대, 헤센 부대, 모호크 인디언 부대를 규합했다. 버고인은 리저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켜 사기를 올려줬다. 리저 준장의 진군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오네이다 호와 모호크 강 사이의 진입로에 위치한 스탠윅스 요새였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에 건설된 이 요새는 사용한 지 오래되어 황폐해졌으며 약 60명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리저는 이 요새를 처리하기 위해 대포 4문과 박격포 4문을 가지고 갔다. 한편 북부 대륙군 사령관 필립 슈일러 장군은 페터 간세보르트 대령의 제3 뉴욕 연대를 스탠윅스 요새로 급파했다. 5월에 도착한 간세보르트 대령은 요새를 수리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리저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내려가 온타리오 호로 진격하면서 스탠윅스 요새가 수리되었으며 약 600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7월 14일 오스위고에 도착한 그는 병력을 더 많이 모으기로 하고 조셉 브랜트, 다니엘 크로스가 이끄는 8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병력을 증강시킨 그는 8월 2일부터 스탠윅스 요새 공방전을 개시했다. 한편 뉴욕 서부의 지도자들은 영국군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 민병대를 소집했고, 툴롱 카운티의 방위 위원회의 리더인 니콜라스 허키머 준장은 민병대를 이끌고 적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7월 30일, 그는 리저 장군의 영국군이 스탠윅스 요새를 향해 행준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즉시 카운티의 민병대를 소집해 약 800명의 군인을 집결시키고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출발했다.
1777년 8월 5일, 허키머는 오리스카의 오네다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세 명의 전령을 스탠윅스 요새로 급파했다. 이들은 요새 수비대 지휘관 페터 간세보르트 대령에게 자신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세 발의 예포를 발사해 메시지를 받았음을 알리게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요새에서는 아무런 신호가 들리지 않자, 허키머는 오리스카에 넘으려 했다. 이에 장교들은 진군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허키머가 말을 듣지 않자 거세게 반발했다. 심지어 장교들은 허키머의 동생이 리저 장군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사실을 들먹이면서 허키머를 왕당파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중상모략에 분노한 허키머는 부대에게 요새를 향한 행진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그가 보낸 세 명의 전령은 8월 6일 밤늦게야 요새에 도착했지만, 그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 부대의 파멸을 초래할 행군을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 지휘관: 니콜라스 허키머 준장
- 병력: 800명
3.2. 영국군
- 지휘관: 존 존슨 경
- 병력: 약 500명
4. 전투 경과
8월 5일 허키머의 민병대가 자신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리저 장군은 존 존슨 경에게 세네카 족 및 모호크 족 인디언, 뉴욕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 500명을 이끌고 그들을 격퇴하라고 지시했다. 존슨은 스탠웍스 요새에서 약 6마일 떨어진 오리스카니 협곡에서 매복하기로 했다. 협곡의 서쪽 출구를 따라 뉴욕 충성파 민병대를 배치한 그는 레인저 부대와 인디언들을 각각 협곡의 한쪽에 배치했다. 그는 대륙군이 협곡의 진입하면 자신의 직할 부대가 적을 공격하고, 조셉 브란트가 이끄는 모호크 족 군대가 주위를 돌면서 적의 배후를 급습하게 했다.오전 10시경, 허키머의 대륙군이 오리스카니 협곡에 들어섰다. 존슨은 대륙군 전체가 협곡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인디언 부대가 적이 다 들어가기도 전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에베네저 콕스 대령을 사살했고, 허키머는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일제사격으로 인해 말이 총탄에 맞아서 낙마하다가 그만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부하들이 급히 그에게 달려가 후방으로 이송하려 하자, 허키머는 욕설을 내뱉으며 "신경쓰지 말고 적을 공격하라!"고 외쳤다. 그는 나무 밑으로 기어가서 거기서 부하들을 계속 지휘했다.
민병대 본대가 협곡에 있는 동안, 후방에 있던 부대는 아직 진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브란트의 인디언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많은 이들이 당황해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는 전우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전진했다. 이후 대륙군은 큰 손실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싸웠고, 병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허키머는 군대를 협곡의 가장자리로 이동시켰다. 존슨은 적이 포위망을 빠져나오려 하자 급히 리저 장군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이렇듯 급박하게 돌아가던 전투는 비가 쏟아지면서 1시간 동안 중단되었다. 허키머는 소강 상태를 틈타 부하들에게 탄환을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인디언들이 토마호크나 창을 가지고 돌진할 때 항상 장전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윽고 날씨가 개자, 존슨은 공격을 재개했고 레이저 지도자 존 버틀러의 제안에 따라 대륙군으로 하여금 요새에서 구원군이 도착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부하들더러 재킷을 뒤집게 했다. 그러나 허키머의 병사들은 그들이 영국 충성파 민병대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국군은 허키머의 부하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할 수 있었지만, 요새에서 출격한 대륙군이 숙영지를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디언들이 급히 전장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중단해야 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허키머는 살아남은 민병대를 수습해 데이톤 요새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오리스카니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대륙군은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전체 800명 중 500명이 전사, 부상, 또는 포획되었다. 또한 니콜라스 허키머 준장은 다리를 절단한 후 8월 16일에 사망했다. 반면 영국인 사망자는 7명, 부상자는 21명이었고, 영국군과 함께 대륙군을 공격한 인디언의 사상자는 약 60~70명이었다. 리저 장군은 허키머의 구원대를 격파한 뒤 스탠웍스 요새를 계속 포위했지만, 뒤이어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던 베네딕트 아놀드의 기만책에 속아넘어가 적의 숫자를 3,000명으로 착각하는 바람에[1] 요새 포위를 중단하고 캐나다로 퇴각했다.[1] 실제로는 100~3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