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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1876)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오석준
吳錫浚[1]으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오석준(3.1운동).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응홍(應洪) / 물와(勿窩)
본관 함양 오씨[2]
출생 1876년 12월 24일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청기동
(現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798)[3][4]
사망 1951년 8월 7일
경상북도 영양군
묘소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선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석준(吳錫浚)은 1876년 12월 24일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청기동(現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오세영(吳世寧, 1838. 11. 25 ~ 1906. 8. 25)과 어머니 의성 김씨(1834. 7. 12 ~ 1893. 2. 4)[5]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리 편항마을에서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은 이어 영양군에 잠입, 입암면 대천동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월 25일 영양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오석준도 이 때 영양군 측 시위 주도 인사로서 이 회합에 참여하여 청기면입암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장이 서기 전날인 24일 이강욱의 주도 하에 청기면에서 먼저 시위가 전개되어 이에 참여한 주민들은 밤늦도록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음 날 영양면 읍내 장터에서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입암면 주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하여 당일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간선도로를 차단, 군경을 배치하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 소재지 밖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이들의 경계망을 피해 영양읍내 시장으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석준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이미 들어온 시위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그 날 오후 5시경 시위군중이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그 중 167명을 영양금융조합 창고에 가둬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석준만 홀로 주동자로 검거되었다.

오석준은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뒤 상고하였으나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대구감옥 안동분감에 수감되었다.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 안동분감에 수감되었다. 그 뒤 대구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감옥 등지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6일 특사로 출옥한 뒤에는 교육 사업에 종사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교 전교로서 독립사상보급에도 진력하였다. 이후 광복을 맞이하였고 1951년 8월 7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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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吳[2] 21세 석(錫) 항렬.[3] 함양 오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에 오석준선생기념관이 세워져 있다.[4]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 및 본적이 청기리 378번지로 기재되어 있다.[5] 김성수(金晟壽)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