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2:40:24

오스카르 미게스

오스카르 미게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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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실버슈.png
1950 FIFA 월드컵 실버슈
[1]

195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오스카르 미게스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파일:Oscar Míguez.jpg
이름 오스카르 미게스
Óscar Míguez
본명 오스카르 오마르 미게스 안톤
Óscar Omar Miguez Antón
출생 1927년 12월 5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2006년 8월 19일 (향년 78세)
우루과이 아르티가스
국적
[[우루과이|]][[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6cm | 78kg
소속팀 수드 아메리카 (1947)
CA 페냐롤 (1948~1959)
스포르팅 크리스탈 (1960)
람플라 후니오르스 (1961)
콜론 (1961)
국가대표 39경기 27골 (우루과이 / 1950~1958)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국가대표4.1.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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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

2.1.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의 미게스는 아침에는 아버지와 우유를 팔고 오후에 학교에 갔다. 그 당시 미게스는 녹색 베레모를 자주 착용하고 다녀서 코코넛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초창기 미게스는 수드 아메리카에서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특출난 기량을 선보였고 이런 미게스를 놓고 CA 페냐롤나시오날이 영입 경쟁을 벌였다. 미게스를 영입하기 위해 나시오날에서는 레전드 앙헬 로마노아니발 치오카가 나섰다. 1947년 연말부터 미게스는 나시오날에서 훈련을 했지만 그는 원래 페냐롤의 팬이었던지라 페냐롤 입단을 선택했다.

미게스는 수드 아메리카의 센터 포워드였던 알시데스 기지아와 함께 1948년, 페냐롤에 입단했고 이곳에서 둘은 서로 포지션을 바꿨다. 미게스는 기지아와 달리 입단하자마자 바로 주전으로 도약했고 입단 시즌에 17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즌은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포함한 우루과이 축구계가 파업에 돌입했다.

1949년, 다시 열린 우루과이 리그에서 페냐롤은 강력했고 미게스 역시 페냐롤의 주전 포워드 역할을 했다. 이 시즌 우루과이언 클라시코에서 페냐롤 선수 3명이 퇴장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미게스의 페널티 킥 실축 후 리바운드 상황이 발단이었다. 이 사건으로 에우세비오 테헤라, 에르네스토 비달, 왈테르 고메스 3명이 퇴장당했고 고메스는 징계로 1950년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1950년 월드컵에 페냐롤은 9명의 선수를 내보냈고 그들은 월드컵에서 우승,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당해 리그에서 페냐롤은 스키아피노의 부상으로 나시오날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

1952년, 기지아가 심판 폭행으로 인한 징계로 AS 로마에 팔려갔지만 페냐롤은 리그 강자의 지위를 유지했고 나시오날과의 경쟁도 계속되었다. 미게스는 1958년까지 페냐롤에 머물렀고 이 기간에 수많은 클럽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미게스는 페냐롤에 대한 애정으로 이 제안을 모두 거절했었다.

2.2.2. 국가대표

미게스는 1950년 월드컵 개막이 2달도 안 남았던 1950년 4월 30일, 파라과이를 상대로 우루과이 대표팀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2대3으로 패했다.

195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의 단판 승부로 결선 리그에 진출할 팀을 가려야 했고 우루과이는 미게스의 해트 트릭을 앞세워 8대0 압승을 거뒀다.

결선 리그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미게스는 침묵했지만 우루과이는 2대2 무승부를 거뒀다. 뒤이은 결선 리그 두번째 경기 스웨덴전에서 미게스는 8분 만에 동점골과 역전 결승골을 넣어 우루과이의 역전승을 이끌었는데 미게스의 2골 역시 마라카낭 대첩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미게스의 2골이 없어서 우루과이가 1무 1패로 브라질과의 최종전에 임했다면 우루과이의 역전 우승 시나리오는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게스는 이 월드컵에서 5골을 넣어 득점 2위로 대회를 마무리했고 우루과이의 기적적인 역전극 이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저는 마라카낭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기는 제가 살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 어머니께서 제게 전보를 보내주셨고 나는 반바지 주머니에 종이를 넣고 게임 내내 플레이했습니다. 내 여동생 중 한 명이 아직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르 미게스

1953년, 미게스는 우루과이가 잉글랜드와 역사상 첫 시합을 벌일 때 출전했고 1골을 넣어 우루과이의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미게스는 1954년 월드컵에도 참가했고 체코슬로바키아에 1골, 스코틀랜드에 2골을 넣어 우루과이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8강 잉글랜드전에서 우루과이는 승리했지만 미게스와 바렐라를 포함한 주축 선수들이 부상을 입었고 결국 4강에서 매직 마자르에 밀려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우루과이는 195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4위에 그쳤지만 다음 해의 대회에서 14년 만에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했고 미게스는 3골을 넣어 득점 2위에 올랐다.

미게스는 1950년대 우루과이 대표팀의 주포 역할을 했고 대표팀에서 27골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루이스 수아레스, 에딘손 카바니, 디에고 포를란 등이 그의 대표팀 골기록은 추월했지만 아직까지도 우루과이 대표팀 내 FIFA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8골)은 그의 몫이다.

2.3. 이후

미게스는 선수 은퇴 이후 여러 군소 클럽에서 코치로 일했고 200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미게스는 정신력과 특이한 볼 컨트롤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헤더, 발리슛, 바이시클 킥 등 공중전이 장점이었다. 그는 단지 골을 넣는 것, 저글링하는 센터 포워드로 만족하지 않았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1.3. 개인



[1]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수상.[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