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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카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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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오카쿠라 가쿠조
岡倉覚三 | Okakura Kakuzo
파일:Okakura_Kakuzo.png
1905년경의 사진.
덴신(天心)
출생 1863년 2월 14일
무사시국 타치바나군 요코하마(현 요코하마시)
사망 1913년 9월 2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1. 개요2. 생애3. 『차의 책(The Book of Tea)』4. 내셔널리즘과 정한론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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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쿠라 가쿠조([ruby(岡倉覚三, ruby=おかくらかくぞう)]), 아호 덴신([ruby(天心, ruby=てんしん)], 텐신)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사상가, 미학자이자 작가로 주로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으로 불린다.

2. 생애

파일:젊은오카쿠라텐신.jpg
젊은 시절의 덴신.
후쿠이번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고문 및 중국-일본관 큐레이터 등을 역임하였다. 19세기 말 서양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근대 일본의 탈아입구주의에 대항하여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 보전하고자 했으며, 전통 예술 학교를 건립하거나 전통 유물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등 아시아 문화재 보호에 힘썼다.

또한 그는 자신의 미학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도 능숙하여,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영어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차의 책(The Book of Tea)』(1906)은 서양에 동양의 차를 비롯한 일본다도를 소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차의 책』은 오늘날에도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함께 많은 미국인들이 아시아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로 꼽는다.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도 친분을 가졌다.

1903년 미국에 갔을 때, 한 미국인이 오카쿠라 일행에게 "네놈들은 차이니즈냐? 재패니즈냐? 자바니즈냐?"라면서 시비를 걸자 "우리는 일본 신사다. 너야말로 양키냐? 몽키냐? 동키냐?"라며 대응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사람의 양아들 비슷한 관계가 쿄토4철[1]의 일원이며 오늘날 한국 내 칸트 번역 논쟁의 원흉이 되는(...) 쿠키 슈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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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의 책(The Book of Tea)』

『차의 책』은 덴신이 미 보스턴 미술관에 근무하던 시절 펴낸 책이다.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1899)로 서양 세계에서 히트를 치는 한편, 당대 서양인에게 '이교도인 일본인(혹은 동아시아인 전반)은 죽음을 숭배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한다는 우려를 낳자, '그건 죽음의 도리이고, 일본에는 생의 도리인 다도도 있다'면서, '서양인들은 허구한 날 폭력적인 것에만 열광하는데 평화로운 동양의 정신을 배워 보라'는 논조로 작성하였다.
For Teaism is the art of concealing beauty that you may discover it, of suggesting what you dare not reveal. It is the noble secret of laughing at yourself, calmly yet thoroughly, and is thus humour itself,—the smile of philosophy. All genuine humourists may in this sense be called tea-philosophers. . .

다도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예술이며, 노골적인 표현을 피하고 암시를 통해 표현하는 기술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조용히, 그러나 철저하게 웃음거리로 삼는 품격 높은 비장으 기술이며, 이 때문에 다도는 유머 그 자체이자 깨달음의 미소다. 바꿔 말하면, 유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다인(茶人), 즉 차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다도는 동양 정신의 대표인데, 중국 당송대의 도교와 불교가 이 다도 정신의 기원이지만, 송나라가 이민족들에게 박살난 이후 본토에서는 그 정신이 사라져버리고 몽골군을 훌륭히 격퇴한 일본에서만 다도가 보존, 발전, 완성되었다 한다. 그는 1장에서 중국 고전을 인용하며 다도의 역사를 소개하고, 차의 정신을 예찬하며 몇 세기 전부터 서양 문화에 유입되기 시작한 차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서양 문화와의 대결의식을 내비치며, 2장에서는 일본 내 다도 성립까지의 차 문화 발달사를 논하며, 3장에서는 다도에 내재한 도교와 불교 선종의 요소를 심화적으로 살펴본다. 4장부터 마지막 7장까지는 각각 다실, 예술 감상, 꽃, 다인(특히 센노 리큐) 등을 중심 주제로 하여 덴신 특유의 미학적 시선으로 해부한다.

세계 다도계에서는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과 더불어 동양 차 문화 연구의 필수 서적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국역본이 다수 출판되었다.

4. 내셔널리즘과 정한론

그는 근대 동양 사회와 문화의 모든 면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던 서양 세력에 대응해 전통 문화와 정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이었지만, 한편 그의 사상적 내셔널리즘은 후일 일본 제국주의의 기초가 되는 정한론을 지지하는 등 현대의 관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아래는 그가 자신의 저서 『일본의 각성(日本の目覚め, The Awakening of Japan)』에서 한국에 대해 언급한 부분 #으로, 20세기까지 일본 국내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초기 기록 등을 토대로 널리 연구되었던 '남선경영론(南鮮経営論, 임나일본부설)'을 답습하고 이를 정한론의 동기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Our earliest traditions tell of the god Sosano, brother of our imperial ancestress, settling in Korea; and Dankun, first king of that country, is considered by some historians to have been his son. The third century discloses our Empress Zhingo leading an invasion of the peninsula in order to re-establish our sovereignty, threatened by the rise of a number of small independent kingdoms. Our annals are filled until the eighth century with accounts of our protection over colonies. From this time onward, however, a great change comes over Japan, and all our energy is expended in religious fervor. This age, which witnessed the erection of in numerable monasteries and the casting of the colossal Buddha of Nara, saw the last of our Korean colonies allowed to perish, her appeals for help unheeded by the mother country.

우리의 초기 전통은 우리의 황실 조상(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소사노(스사노오) 신이 한국에 정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나라의 첫 번째 왕인 단군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그의 아들로 여겨진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한 진구 황후가 작은 독립 왕국들의 부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연대기는 식민지에 대한 우리의 보호에 대한 설명으로 8세기까지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에는 큰 변화가 찾아오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종교적 열정에 소비된다. 수많은 수도원이 세워지고 나라의 거대한 불상이 주조되는 것을 목격한 이 시대는 우리의 마지막 한국 식민지들이 멸망하는 것을 허용했고, 그녀는 모국의 관심 없이 도움을 호소했다.
The attempted Mongol invasion of the thirteenth century kindled in us a feeling of animosity toward the Koreans who led the Chinese vanguard. Our only act of retaliation, however, consisted in the unique expedition of the Taiko Hideyoshi, who, in the sixteenth century, led an army into Korea to measure swords with those whom he considered as his hereditary enemies.

13세기 몽골의 침략 시도(여몽연합군)는 우리에게 중국 선봉대를 이끌었던 한국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보복은 16세기에 군대를 이끌고 한국으로 들어와(임진왜란, 정유재란) 그가 대대로 이어진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검을 맞춘 타이코 히데요시의 독특한 원정뿐이었다.
Any hostile power in occupation of the peninsula might easily throw an army into Japan, for Korea lies hke a dagger ever pointed toward the very heart of Japan. Moreover,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Manchuria is economically necessary to the preservation of our race, for starvation awaits our ever increasing population if it be deprived of its legitimate outlet in the sparsely cultivated areas of these countries.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적대적인 강대국들은 일본에 군대를 쉽게 보낼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의 심장부를 겨누는 비수처럼 누워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만주의 독립은 우리 민족의 보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들 국가의 희박한 경작지에서 정당한 배출구를 박탈당할 경우 계속 증가하는 우리 인구로 인해 기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Under these circumstances, we are compelled to regard our ancient domain of Korea as lying within our hnes of legitimate na- tional defense. It was when the independence of the peninsula was threatened by China in 1894 that we were compelled to go to war with the latter country. It was for this same indepen- dence that we fought Russia in 1904.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대 영토인 한국이 정당한 국방의 영역 내에 있다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1894년 중국이 한반도의 독립을 위협하면서 우리는 중국과 전쟁(청일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1904년에 러시아와 싸운 것(러일전쟁)도 바로 이와 같은 독립을 위해서였다.
There were several occasions when we might have taken possession of Korea, but we forbore, in the face of strong provocation, because our wishes were f oij peace. We must remember that the historic spirit that created the Restoration also recalled the fact that Korea was originally a Japanese province, and in the Tokugawa days paid tribute to the shogunate.

우리가 한국을 점령할 수 있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강한 도발 앞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평화였기 때문에 포기했다. (메이지) 유신을 만든 역사적 정신은 한국이 원래 일본의 지방이었고 도쿠가와 시대에 막부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도 상기시켰음을 기억해야 한다.[3]

5. 기타

  • 2023년 3월 윤석열 대통령 일본 순방 당시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초청되어 강연자로 나서서 강론할 적에 오카쿠라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이에 대해서 정치계 일각에서는 '제국주의 사상가를 인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종문 한신대학교 교수(일본학)는 인터뷰에서 "오카쿠라 덴신은 전형적인 한국 멸시론과 침략론의 소유자이고 식민지배에 적극 찬성한 인물"이라며 "대통령과 보좌진의 역사인식과 일본 시각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

    민주당은 "해당 인물이 경술국치에 찬동하고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안호영 수석대변인은 18일에 논평을 내고 “윤석열 대통령이 게이오대학 연설 중 인용한 오카쿠라 덴신은 조선은 원래 일본 영토라던 한국 멸시론자”라며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떻게 식민지배에 적극 찬동했던 침략론자의 발언을 인용할 수 있나"고 밝혔다. 안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3.1절에도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며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했다"며 "일본에 국익과 국민 자존을 팔아버린 것도 부족해서 조선 총독이라도 자처하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반면,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오카쿠라 덴신은 침략론자보다는 아시아론자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 한 예로 그는 저서 『차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상적 핵심을 밝힌 바 있다.
    What dire consequences to humanity lie in the contemptuous ignoring of Eastern problems! European imperialism, which does not disdain to raise the absurd cry of the Yellow Peril, fails to realise that Asia may also awaken to the cruel sense of the White Disaster. . . Let us stop the continents from hurling epigrams at each other, and be sadder if not wiser by the mutual gain of half a hemisphere. We have developed along different lines, but there is no reason why one should not supplement the other.


    동양의 문제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해 인류는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맞이했던가? 황인이 해를 가져온다(Yellow Peril)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서슴없이 하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인들 역시 백인이 가져올 잔혹한 재난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중략)… 이제 서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거두자. 동양과 서양, 서로 다른 둘이 만나 더욱 더 지혜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동서양이 서로 상호 보완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오카쿠라 덴신이라는 인물을 당대 사회상과 현대 윤리를 아우르는 입체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제시된다.

    텐신은 아시아 국가들이 이상과 현실 속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현실을 직시하고 서로 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서구를 무력으로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자각하자고 호소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문명은 폭력이나 유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유경 "오카쿠라 텐신의 아시아통합론과 불교" 2008. 『종교와 문화』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그는 스스로는 '서양'이라는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동양적 가치를 지키고자 한 투사적 인물이었으나, 그 자신도 당대 성장하는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팽창주의가 형성한 사상적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4]

[1] 쿄토학파로 불린 근대 일본의 유명 철학자 넷, 니시다 키타로, 와츠지 테츠로, 미키 키요시, 쿠키 슈조.[2] 오카쿠라가 유부녀였던 쿠키 슈조의 어머니랑 썸을 타고 같이 사는 바람에(...) 쿠키 슈조는 어렸을 적 덴신이 아버지인 줄 알았다 한다.[3]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간의 기유약조와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조공을 바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일본 국내의 장계에 근거한 내용으로 일본 측의 입맛에 맞게 윤색되었다.[4] Pekka Korhonen "The Geography of Okakura Tenshin" page 105-108. Japan Review, No. 13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