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五行摠括. 동국통감, 동문선, 동인시화, 필원잡기, 태평한화골계전, 사가집, 경국대전 등을 편찬하며 조선 전기 관각문학을 이끌었던 서거정이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명리서(命理書).2. 내용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인으로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의 삼불후(三不朽)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대인이라 칭송받았던 서거정이 세조 시기에 공조참의, 예조참의, 이조참의, 형조참판, 예조참판, 형조판서, 성균관지사,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며 그 능력을 드러내자 이에 세조의 명에 따라 1467년 완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명리서이다.“녹명서(祿命書)를 연구하는 것은 곧 이치를 궁구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세상에서 고인(古人)을 논하는 자들은, ‘사군자(士君子)는 마땅히 공자와 맹자를 배우고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을 공부해야 한다. 어찌 감히 계주(季主)와 곽박(郭璞)의 일을 본받겠는가.’라고 한다. 그 말을 들어 보면 옳지만,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있어서는 옳지 않다. 이런 까닭에 녹명의 이론에 대해서는 대략을 아는 자가 아주 드물다. 하물며 심오한 뜻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옛날의 명가(命家)는 한둘이 아니어서, 그 학설이 잡다하게 질서 없이 흩어져 있다. 지금 가령(假令)을 한 책 만들어 초학들의 지침서를 삼고자 하니, 그대가 그것을 편찬하라.”
하셨다.
거정이 문견이 적으니 어찌 주상의 뜻을 제대로 우러러 받들 수 있겠는가. 다만 여유가 있는 날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핵심을 뽑고 항목을 나누고 종류별로 모아서, 앞에 범례를 놓고 다음에 길흉 신살(吉凶神殺)을 놓고 끝에 길흉 논단(吉凶論斷)을 놓아서, 책으로 엮어 올렸다.
주상께서 웃으며 말씀하기를,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다만 복명(卜命)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깊은 이치를 탐색하고 숨은 뜻을 찾아내며 과거의 일을 인하여 미래의 일을 미루어 알며 천지의 비밀을 밝혀내고 음양의 온축을 드러냄에, 그 오묘함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과연 이 책과 같다면, 사람마다 책을 열면 스스로 환히 알게 되어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듯 모두가 앞에 펼쳐질 것이니, 추산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작은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오행총괄》이라는 책 이름을 내리고 신에게 서문을 쓰라 명하셨다.
서거정 - 《오행총괄(五行摠括)》 서문
하셨다.
거정이 문견이 적으니 어찌 주상의 뜻을 제대로 우러러 받들 수 있겠는가. 다만 여유가 있는 날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핵심을 뽑고 항목을 나누고 종류별로 모아서, 앞에 범례를 놓고 다음에 길흉 신살(吉凶神殺)을 놓고 끝에 길흉 논단(吉凶論斷)을 놓아서, 책으로 엮어 올렸다.
주상께서 웃으며 말씀하기를,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다만 복명(卜命)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깊은 이치를 탐색하고 숨은 뜻을 찾아내며 과거의 일을 인하여 미래의 일을 미루어 알며 천지의 비밀을 밝혀내고 음양의 온축을 드러냄에, 그 오묘함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과연 이 책과 같다면, 사람마다 책을 열면 스스로 환히 알게 되어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듯 모두가 앞에 펼쳐질 것이니, 추산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작은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오행총괄》이라는 책 이름을 내리고 신에게 서문을 쓰라 명하셨다.
서거정 - 《오행총괄(五行摠括)》 서문
1467년, 세조 13년[1]에 완성하였으며, 궁중 사람들이 녹명(祿命)에 관한 설을 수고롭게 배우지 않고도 책을 펴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용례를 가지고 설명한 사주명리서이다. 당시에 운명을 치는 방법과 학설이 번잡하므로 세조가 이를 정리해서 체계화시키고자 서거정에게 책 이름을 직접 하사하고 저술을 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행총괄은 한국에서 저술된 최초의 명리서이며, 140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사주명리 체계와 당시 한국인들의 사주팔자에 관한 운명 인식론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문헌이다.
범례(凡例), 길흉신살(吉凶神殺), 길흉논단(吉凶論斷)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서거정의 문집인 63권 26책의 사가집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3. 기타
오행총괄은 필원잡기와 함께 한국에서 '사주(四柱)'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이다. 다만 정작 이 용어를 한국 최초로 수록한 서거정은 책에서 '사주는 못 믿을 것'이라고 써 놓았다.세조 : “그대는 녹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且謂臣曰: '卿意謂祿命何如.')
서거정 : “갑년과 기년의 정월은 병인월이고 갑일과 기일의 생시는 갑자부터이니, 60갑자를 가지고 유추해보면 그 수가 720이면 끝납니다. 720년을 가지고 720의 일시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는 518,400명에서 그치고 다시는 더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가 태평할 때는 인구가 1천 5~6백만에 이르렀으니 억조의 수많은 백성이 어찌 518,400명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지금 항간의 백성들에는 진실로 사주는 모두 똑같으나 길흉화복은 다른 자들이 많습니다. (중략) 어떤 사람은 “이순풍과 소요부, 서자평 같은 이는 말한 것마다 모두 맞았으니, 어찌 모두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여기에 밝은 거울이 있는데 물건이 와서 비추면 곱고 추한 모양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이순풍과 소요부 같은 이들은 마음(心)이 본디(本) 비어있고 밝아서(虛靈) 거울이 밝은 것과 같았으므로 사물이 오면 길흉화복이 저절로 밝혀졌기에 숨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후세의 술사들이 한갓 고인의 부질없는 이론을 갖고서 518,400개의 명조命造로 천하 억조 사람의 명을 미루어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녹명의 글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徐居正, 筆苑雜記 卷1
서거정 : “갑년과 기년의 정월은 병인월이고 갑일과 기일의 생시는 갑자부터이니, 60갑자를 가지고 유추해보면 그 수가 720이면 끝납니다. 720년을 가지고 720의 일시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는 518,400명에서 그치고 다시는 더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가 태평할 때는 인구가 1천 5~6백만에 이르렀으니 억조의 수많은 백성이 어찌 518,400명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지금 항간의 백성들에는 진실로 사주는 모두 똑같으나 길흉화복은 다른 자들이 많습니다. (중략) 어떤 사람은 “이순풍과 소요부, 서자평 같은 이는 말한 것마다 모두 맞았으니, 어찌 모두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여기에 밝은 거울이 있는데 물건이 와서 비추면 곱고 추한 모양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이순풍과 소요부 같은 이들은 마음(心)이 본디(本) 비어있고 밝아서(虛靈) 거울이 밝은 것과 같았으므로 사물이 오면 길흉화복이 저절로 밝혀졌기에 숨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후세의 술사들이 한갓 고인의 부질없는 이론을 갖고서 518,400개의 명조命造로 천하 억조 사람의 명을 미루어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녹명의 글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徐居正, 筆苑雜記 卷1
즉 천하의 인구는 1천 5~6백만 명이나 되는데 겨우 51만 8천 4백 개의 사주명조를 갖고서 그 많은 사람의 명을 추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의 타고난 명의 길흉화복을 추리하는 녹명에 관한 글의 내용은 신뢰할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1] 성종실록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서거정이 예조참의로 있던 1458년, 무인년(세조 4년)에 세조의 명을 받아 완성하였다고 나오고, 서거정의 문집인 사가집에서는 1466년 10월 2일에 세조의 명을 받아 1467년에 완성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