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20:33:24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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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Oliver Otis Howard
파일:1000012698.jpg
출생 1830년 11월 8일
미국 메인주 리드스
사망 1909년 10월 26일 (향년 78세)
미국 버몬트주 벌링턴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복무 기간 1854~1894
학력 보든 칼리지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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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메인주 리드스에서 태어나 보든 칼리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대했고 1854년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세미놀 전쟁에 참가해 세미놀족과 전투를 치렀다. 1857년 중위로 진급했고 1861년 섬터 요새 전투 당시 남군과 조우해 전투를 치렀다.

이후 대령으로 파격승진해 제3 메인 의용보병 연대장이 되었다. 제2차 불런 전투에 참가했고 준장으로 진급해 연대에서 여단으로 부대가 확대편성되었다. 1862년 페어오크스 전투 당시 필립 카니가 왼팔을 잃자 본인 역시 오른팔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대리지휘해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명예 훈장에 수여되었다.[1] 11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11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챈슬러즈빌 전투 당시, 북군의 우익방어를 맡았지만, "그쪽으로 남군의 기습이 예상되니 대비하라"라는 명령을 받고도, "남군이 숲을 뚫고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다."라고 고집을 피우며 대비하지 않다가, 정말로 남군에게 기습당해 20분만에 11군단 전체가 붕괴하고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나 2달 뒤 치러진 게티즈버그 전투 첫날에는, 리처드 유얼이 이끄는 남군 제2군단을 상대로 선전하며 피해를 강요했다. 결국 A. P. 힐에게 요청한 지원군아 거부당하자 유얼은 로버트 E. 리의 지시인 세메터리 힐 점령을 포기했다. 이는 게티스버그에서 남군이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막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애브너 더블데이가 대리지휘하고 있는 제1군단을 서쪽에서 엄호했으며, 피켓의 돌격 당시에도 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서부전역에서 남군과 전투를 치르다 종전을 맞이했으며 종전후 해방노예국의 국장으로 복무했다. 이후 인디언 전쟁당시 아이다호, 몬태나인근의 원주민 네즈퍼스족과 전투를 치르기도했다. 1894년 퇴역했으며 1909년 사망했다.

3. 여담

  • 하워드 대학교의 이름은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대학설립에도 기여했다.


[1] 결국 하워드는 부상을 입은 오른팔을 잘라야만 했는데, 카니가 찾아와 "앞으로 장갑을 살 때 같이 사자."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본문에 언급되었다시피 카니는 왼팔을 잃었으므로 둘이 한켤레만 사서 한쪽식 나눠가지면 된다는 뜻의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