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0:56:53

챈슬러스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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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챈슬러스빌 전투
Battle of Chancellorsville
시기 1863년 4월 30일 ~ 5월 6일
장소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861-1863).svg미합중국(북부)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3-1865).svg미연합국(남부)
지휘관 조지프 후커 로버트 리
스톤월 잭슨
병력 133,868명 60,892명

1. 개요2. 상세3. 전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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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전쟁 중 1863년 5월 챈슬러스빌 지역에서 13만 3868명의 북군(포토맥군)과 6만 892명의 남군(북버지니아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2:1의 수적 열세를 화려한 기동과 집중으로 극복한, 로버트 E. 리의 역량이 최고점을 찍은 그의 아우스터리츠 전투로 당대인들은 높이 평가했다.[1]

전투가 일어난 챈슬러스빌 주변은 버지니아주의 원시림지대로 '야생'(The Wilderness)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400킬로 평방미터의 광활한 지대다. D.C.에서 리치몬드로 사이에 놓여있어서 줄곧 전장이 되어왔는데, 1862년 프레데릭스버그 개울가에서 남군에게 닥돌한 북군이 남군의 스톤월 잭슨에게 도륙당한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가, 이후 북군 대장이 율리시스 그랜트로 교체된 다음 로버트 E. 리를 추격하다가 부하가 하도 많이 죽어 그랜트를 밤중에 울게 만든 스팟실베이니아 전투가 1864년 벌어진 나름 죽음의 땅이다.[2]

2. 상세

포토맥군의 새 지휘관 후커는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이후 망가진 북군을 북부 자원의 힘으로 추스리고, 다수의 병력으로 로버트 리의 남군을 포위해 박살내겠다는 전략을 가진 채 전투 전 군대를 사열하러 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이제 언제 남부의 수도를 점령하느냐는 문제만 남았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에이브러햄 링컨 왈, "그런데... 나는 암탉이 가장 똘똘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놈은 알을 낳기 전에는 울지 않으니 말이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4][5]

한편,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제임스 롱스트리트 휘하 일부 부대가 버지니아 해안으로 보급 및 북군 소탕을 위해 떠난 상태였기에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약화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북군과 남군의 전력 차이는 이제까지의 동부전선 전투들 중 가장 커져 2:1에 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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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군은 계획대로 기동하여, 세지윅의 4만 군대는 4월 29일 밤에, 후커의 7만 군대는 4월 30일에 남군의 저항이 없는 가운데 강을 건너, 양쪽에서 남군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였다.

첫 총탄이 오간 것은 5월 1일 11시였는데, 교전 시작 후, 현재 위치를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려버렸다!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후커는 자신의 군대가 리의 군대를 동서 양면에서 포위하는 데 성공하면, 리는 당연히 남쪽으로 후퇴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리가 맞서 싸우자 당황했고, 자신이 선공을 가했다가는 자칫 바로 직전에 당한 참패인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가 재현될까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6]

당시 2군단장 카우치 장군은 후일, "후커는, '그동안 우리는 성공적으로 기동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숲 속에 들어가 방어전을 통해 그 동안의 성공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실성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한편 전장 북쪽의 언덕 지역을 선점했던 5군단장 조지 미드는 후퇴 명령에 대해 "우리가 이 언덕 위에서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후퇴해서) 언덕 밑으로 내려가선 어떻게 지킬 생각인데?"라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후커는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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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후커의 꼬락서니를 보고 상대의 생각을 간파하여, 세지윅 쪽 4만 병력 앞에 얼리의 1만 1천명만 남겨 견제하도록 하고 5월 2일 스톤월 잭슨에게 2만 8천 병력으로 북군의 우측면으로 19km를 우회기동하여 측후방을 기습하도록 하면서 그 동안 1만 3천으로 후커의 7만 북군을 견제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근대 전쟁사에서 가장 훌륭한 전술 기동으로 손꼽힌다. 사실 남군의 우회 진군로는 숲으로 가로막혀있어 기동이 불가능해보였지만, 지역민 가운데 남군 동조자가 숲속에 최근에 건설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이 지역, 즉 북군의 우익을 지휘하는 하워드 장군은 매우 용감한 인물이었지만, 현명함은 그에 미치지 못했고, 그가 지휘하는 11군단은 독일계 이민자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하워드는 독일어를 몰랐다. 게다가 11군단은 보급과 훈련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하워드는 잭슨의 부대가 우회하여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고 심지어 후커에게서까지 방어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남군이 숲을 통과해서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대비하지 않았다. 결국 11군단은 잭슨의 기습에 20분도 채 못버티고 붕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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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Gods and Generals(2003) 후반에 묘사된 잭슨 부대의 기동(본격적인 돌격은 1:55초부터).

비록 11군단은 붕괴되었지만, 11군단 좌측에 위치한 시클스의 3군단이 방어선을 형성했고, 이로인해 시간을 번 11군단은 간신히 병력을 추스릴 수 있었다. 결국 17시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잭슨의 기습은 북군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잭슨은 북군이 붕괴되었다고 오판하고 남군을 진격시키기 위해 남군의 전방으로 정찰을 나왔지만 바로 앞에는 북군의 방어선이 있었으며 결국 후방으로 돌아오려던 잭슨은 그를 북군으로 오인한 남군의 사격에 중상을 입었다. 한편 잭슨의 전면적인 공격을 접한 후커는 동쪽에서 조공을 담당한 세지윅에게 서쪽으로 빠르게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남군의 기습이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남군이 서쪽으로부터 북군의 우익을 크게 밀어내면서 북군의 전선이 동서방향으로 지나치게 얇아진 것은 사실이었고, 리는 여전히 자신이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북군 11군단의 빈자리를 북쪽에 있던 미드의 5군단이 메웠으며, 5군단의 자리는 세지윅의 조공부대로부터 복귀한 존 F. 레이놀즈의 1군단이 메워, 이제 북군은 남군의 43,000명에 대해 76,000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어쨌든 5월 3일 아침, 리는 남쪽으로 돌출된 북군의 전선을 포격과 함께 동/서/남 3면에서 집중 공격하라 명령했다. 이 때 남군의 포격으로 후커의 사령부가 피격당했으며, 후커는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퇴했는데, 제대로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지휘권을 부하에게 이양하기를 거부했다. 이로인해 북군은 남군보다 많은 병력을 가졌으면서도 공격을 하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했으며, 돌출된 남쪽의 챈슬러스빌에선 소유권이 여러번 넘어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후커는 챈슬러스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고 남군이 이곳을 확보했다.

한편 같은 날인 5월 3일, 리가 총공세를 위해 세지윅군을 견제하던 얼리의 사단까지 불러들인 탓에 동쪽의 세지윅의 북군 2군단과 남군 사이에는 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후커의 명령을 받은 세지윅군이 전진하여 프레데릭스버그 돌담을 돌파하고 남군의 견제병력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지윅은 병력 재편에 시간을 너무 소비했고, 간신히 시간을 벌은 리는 얼리의 사단을 되돌려보내고 앤더슨의 사단 일부를 급파해 결국 세일럼 교회에서 세지윅군의 전진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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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커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확신한 리는 5월 4일 맥그로우, 앤더슨, 그리고 얼리 사단의 3개 사단을 총동원해 세지윅의 군단에 대해 숫적우위를 차지했고, 이들에게 세지윅의 군단을 집중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남군의 공격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세지윅은 북쪽의 도하지점을 확보한 채 방어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후커는 자신의 명령대로 신속하게 진군하지 않은 세지윅에게 실망했지만, 세지윅 역시 남군의 공세에도 자신을 지원하지 않는 후커에게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5월 5일 해뜨기 전 강을 건너 철수해버렸다. 이를 본 후커는 일부 부하 군단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 5일 밤동안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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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투 후

이 전투에서 지리멸렬한 지휘를 보여준 후커는, 하워드와 세지윅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으나 결국엔 사령관직에서 잘렸고, 이후 서부전선으로 전임되었는데, 서부에서 군단장으로써의 활약은 좋았으나 역시나 동료 장군들과 불화를 빚었고, 나중에는 아예 후방에 배치되었다. 한편 포토맥군에서는 5군단장 조지 고든 미드가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

리는 절반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두 배의 상대방을 포위하는 화려한 기동과 놀라운 공세능력을 보여주었다. 2일 잭슨의 우회기동은 남북전쟁 최고의 전술기동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사실 잭슨의 우회기동은 기동 초반에 이미 북군에게 들켰으며, 이 첩보를 받은 하워드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대비만 했다면 실패작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 또 다음날 세지윅의 2군단이 빠르게 전진했다면 남군이 오히려 북군에게 협공을 당해 대패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피해는 북군 1만 7197명(1606명 사망), 남군 1만 3303명(1665명 사망)으로, 절대적인 수치는 북군의 피해가 컸지만, 실리적으로는 병력이 모자란 남군 입장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승리하면서 이 전투는, 남군에게는 "남군 병사 하나가 북군 병사 둘 이상으로 싸운다!"며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계기가 되었고, 반면에 북군은 프레더릭스버그에서의 패배와 함께 남군 공포증으로 번져나가는 심리적 충격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리와 북버지니아군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돌아 결국 게티스버그에서 무리한 공세와 개활지 돌격을 감행해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남군이 2일과 3일에 걸쳐 보인 도박적인 기동은, 롱스트리트를 비롯한 몇몇 남군 장군들에게 오히려 리의 지휘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게티스버그에서 이는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무엇보다 남군의 가장 큰 손실은 2일의 기습전 와중에 스톤월 잭슨 장군이 아군의 오발에 부상당하여 결국 10일에 사망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전쟁 역사학자들은 전략적으로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거둔 남군의 승리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남군이 북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에 실패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스톤월 잭슨 같은 유능한 장교를 허무하게 잃음과 동시에 대규모 충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군과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이 전투를 전형적인 피로스의 승리라고 보기도 한다.

잭슨은 리와 호흡이 잘 맞고, 기동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 남군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군단장이었으므로, 만약 그가 여기서 죽지 않고 게티즈버그 전투까지 가서 롱스트리트의 위치에 있었다면 7월 3일 전투에서 북동쪽에서 이월의 포성이 들리지마자 주저없이 피켓 사단을 돌진시켰을 것이고,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게 만약을 달고 나오곤 하는 떡밥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계에서 보통 부정당한다. 롱스트리트가 말했다시피 탁 트인 개활지에서 고지를 선점하고 엄폐물까지 있는 적을 상대로 하는 보병돌격은 성공할 수가 없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이를 증명했고, 피터스버그 전투에서도 이를 증명했다.

게티즈버그에서 스톤월 잭슨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나타난 것은 남군의 도박적 승부수였던 피켓의 돌격에서보다는, 차라리 첫 날인 7월 1일, '사단의 나머지가 올 때까지 전면 교전은 피하되, 가능하다면(if practicable) 세메터리 언덕을 점령하라'라는 로버트 리의 지시를 받고는 선두 병력이 지쳤고, 후위대는 다음 날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연방군 패잔병을 쫓아가 세메터리 언덕이나 그 옆의 컬프스 힐을 공격하지 않은 리처드 유얼의 결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연방군은 다음날 남군이 북군 전선 중앙의 세메터리 언덕을 집중 공격하리라는 예상 하에 축성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로버트 리의 계획도 그 곳을 돌파해 연방군 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밤새 완성된 참호선과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세메터리 힐의 북군은 게티즈버그 전투 두번째 날과 세번째 날에 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만일 지휘에 익숙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유얼 대신 공격적이며 리와 손발이 잘 맞는 잭슨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첫날 세메터리 언덕과 컬프스 힐을 확보해서 둘째날의 전개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전쟁터는 1927년 미국의회의 허가를 얻어 프레데릭스버그와 스팟실베이니아 국립군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미 해군에 위 전투의 이름을 따서 함명이 명명된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16번함 CG-62 챈슬러스빌이 있다. 타이콘데로가급의 함명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치렀던 전투 지명에서 유래되곤 했다. 2020년 국방수권법 개정으로 남부연맹에서 유래한 함명을 모두 개명해야 해 퇴역을 몇 년 안 남기고 개명될 예정이다.

결국 2023년 2월 27일자로 USS 챈슬러스빌은 USS 로버트 스몰스(Robert Smalls)[7]로 함명이 바뀌게 되었다.


[1] 하지만 실제 아우스터리츠와 비교하면 당연히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전투 후 문단 참고.[2] 사실 북부의 수도 워싱턴 D.C.와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잇는 도로의 딱 중간지점에 있어, 싸움이 안일어나기 힘든 장소이기도 하다.[3]"그렇게나 해놓고 얘기허드라고~."라고 한 건데 다시 설명하면 후커의 허풍이 평소에도 심했다는 증거이다.[4] 후커의 경우, 유달리 허풍이 심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항간의 평이 좋지 않았다. 언론에서 '싸우는 조(Fighting Joe)'라는 나름 멋진 별명을 붙여주긴 했지만, 병사들이 부른 별명이 '주정뱅이', '작업남(...)'이었고, 그의 지휘부는 파티와 도박으로 흥청거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긴 술꼬장부리고, 여자를 꼬시고, 도박을 하는데 능했다면 확실히 허풍도 심했을 것 같기는 하다.[5] 그렇다고 후커가 아주 무능한 장군이었냐면 그것은 아니다. 사실 지휘관으로써 병사들 관리는 상당히 잘하는 편이었다. 챈슬러스빌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작전전개를 보면 전략적인 안목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본인의 승진을 위해 상관들을 비방하는 정치군인의 성향이 강해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옳아맸으며, 무엇보다 아래 전투 진행과정에서도 나오듯 문제가 생겼을 때 유연성을 발휘하지도, 그렇다고 뚝심을 발휘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6]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북군을 지휘한 번사이드를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인물이 후커 자신이었다.[7] 로버트 스몰스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함정을 탈취해 북군에 항복한 인물로 후에 공화당 하원의원까지 지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