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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예종(睿宗) |
시호 |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황제 (聰明寬厚英敏惠和孝定皇帝) |
능호 | 장소릉(長紹陵) |
성 | 응우옌(Nguyễn, 阮/완) |
휘 | 푹투언(Phúc Thuần, 福淳/복순) |
생몰기간 | 1754년 12월 31일 ~ 1777년 10월 1일 |
재위기간 | 1765년 ~ 17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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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 남북국시기 응우옌씨 정권의 9대 국왕이자 유일한 태상왕(太上王). 다른 이름은 응우옌푹헌(阮福昕)이며 재위 중 존호는 정왕(定王)이다.2. 생애
1765년 세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응우옌푹투언은 형 응우옌푹루언의 존재로 인해 왕위를 계승할 일이 없었으나 간신 장복만(張福巒)의 농간으로 응우옌푹루언은 옥사하고 응우옌푹투언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 내막은, 장복만에게 있어 응우옌푹루언은 영특하기에 그가 왕이 되면 자신의 세를 확장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무능한 푹투언을 이용한 것이다. 즉 응우옌푹투언 역시 장복만에게 이용당할 목적으로 선택당한 기구한 운명에 불과했던 것이다.어찌되었건 즉위한 응우옌푹투언은 장복만을 국부(國傅)로 임명하는 등 그를 공신마냥 대우하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신의 역할도 아니었고 원했던 왕위도 아니기에 푹투언은 뭘 해야 할지를 몰랐고 국정에 관심조차 가지질 않았으며 방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모든 조정은 그를 옹립한 장복만이 관할했으며 불순한 목적으로 권력을 잡은 만큼 광남국은 뇌물, 불법이 판을 치기 시작했고 당연히 백성들이 반발했으나 모두 처형하는 등 폭력적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결국 1771년 장복만을 비롯한 간신들의 횡포를 보다 못한 떠이선 농민 운동이 발발하고 떠이선 당의 수령인 응우옌냑은 세종의 다른 손자이자 응우옌푹하오의 아들인 응우옌푹즈엉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사실상 응우옌푹투언을 폐위시키겠다는 뜻을 전국적으로 내비쳤다. 당연히 응우옌푹투언의 조정은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방탕하게 지낸 만큼 본조(本朝, 푹투언의 조정)의 군대는 기강이 잡혀있지 않았고 평정(平定), 광의(廣義), 평순(平順) 총 3성(省)을 도리어 빼앗기고 마는 수모를 맞는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지켜보던 찐씨 정권도 광남을 멸할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고 판단, 간신 장복만을 처형한다는 명분 하에 서산당과 협력하여 광남 멸망전에 합세하자 광남의 수도인 푸쑤언(富春)이 함락당했고 광남국은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군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린 응우옌푹투언은 마지못해 서산당이 옹립한 괴뢰 응우옌푹즈엉을 세자로 책봉해 민심을 조금이라도 확보하여 쟈딘(嘉定, 現 호찌민 시)에서 할거했고 두청인(杜淸仁)과 이재(李才)의 도움으로 응우옌르의 공격을 방어하며 연명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재의 조언으로 응우옌푹즈엉에게 양위한 후 본인은 태상왕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777년 마지막 요새인 쟈딘마저 함락당한 후 까마우로 도주했고 자신을 추격하러 온 떠이선 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향년 22세로 그와 응우옌푹즈엉 대에 나라가 망했기에 본래는 시호가 없었다.
1778년 완씨 부흥운동의 지도자 응우옌푹아인에 의해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왕(聰明寬厚英敏惠和孝定王)으로 추시되었고 응우옌푹아인이 자롱 황제로 즉위하자 묘호를 예종(睿宗), 시호를 황제(皇帝)로 격상하였다. 능호는 장소릉(長紹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