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22:05:55

왕예(전한)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01위 중수장후 여마동 102위 두연장후 왕예 103위 적천장후 양희
시호 장후(莊侯)[1]
작위 오방후(吳房侯)[2]
최종직위 낭중기(郞中騎)[3]
(王)
이름 (翳) 혹은 저(翥)
생몰 기간 ? ~ 기원전 183년
1. 개요2. 생애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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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한쟁패기 당시 한나라 휘하의 무장. 항우를 마지막까지 추적하여, 항우 사후 그의 시체를 다섯 등분한 중 하나.

2. 생애

고제 2년인 기원전 205년[4],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한신에게 속했다.

기원전 202년,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관영휘하에 소속되어,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를 마지막까지 뒤쫓는 군대에 있었다. 오강에서 항우와 만나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하자 이 틈에 왕예가 항우의 머리를 취했다.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양희·여마동·낭중 여승·양무가 나머지 시체를 나눠가졌고.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두연후(杜衍侯) 1700호에 봉해졌다.

3. 사후

재위 18년 만인 여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했고, 아들 공후 왕복(王福)이 뒤를 이었다.
[1]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공통으로 받았다.[2] 남양군의 속현이다.[3] 관영 휘하에서 항우를 추적할 당시의 관직[4] 혹은 3년(기원전 2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