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6:14:39

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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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장군
전한의 평주후(平州侯)
王唊
왕협
작위 평주후(平州侯)
최종직위 고조선장군(將軍)
전한 불명
성씨 (王)
이름 (唊)[1]
생몰기간 ? ~ 기원전 105년

1. 개요

위만조선우거왕시기의 장군이자, 전한 중기의 제후.

2. 생애

왕겹은 고조선의 장수로서 한나라 군대가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에 쳐들오자 조선상 노인, 한음과 함께 모의한 뒤 우거왕을 배신하고 한나라에 투항했다.[2]

한나라에 항복한 이후 기원전 108년 4월 정묘일에 평주후(平州侯)에 봉해져 식읍 1,480호를 받았다. 그러나 3년 후에 금새 죽었고, 후사가 없어 봉국은 폐지되었다.[출처]

3. 여담

고조선 멸망 이후, 장군 왕겹은 별다른 공로가 발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봉호 1,480호의 열후로 봉해졌는데, 한음이 540호, 참이 1,000호를 받은 것에 비하면 봉호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이는 공로와는 무관하게 한나라 조정이 그의 이용가치를 높게 평가했거나 고조선 내에서 장군 왕겹의 위치가 높았던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추론했을 때, 노태돈 교수는 장군 왕겹은 고조선 왕실의 직속 부대의 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상'이 자신의 집단 주민들로 구성된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는 지위라면, 장군은 왕실에 소속된 직할 주민들로 이루어진 군사를 이끈 것이라고 추정했다.
[1] 겹이라고도 읽는다.[2] 이 과정에서 의 아버지인 노인이 사망했다.[출처] <漢書> - 景武昭宣元成功臣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