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8 23:42:54

요승

1. 개요2. 상세3. 실존 인물

1. 개요

, wicked monk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승려.

2. 상세

양주에 금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고 유언을 퍼뜨린 중을 옥에 가두다


요망한 중[요승, 妖僧]을 양주(楊州)의 옥(獄)에 거두었다. 어떤 중[僧]이 대궐에 나와서 고하기를,

"양주(楊州) 땅에 금이 나오는 우물(金井)이 있습니다. 승(僧)이 꿈에 얻어서 파 보았더니, 과연 있었습니다. 우물 가에 나무를 심어 표를 하였는데, 지금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곧 내관(內官) 이용(李龍)을 시켜 중과 함께 역마(驛馬)를 타고 가보게 하였더니, 헛일이었다.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18일 계해 1번째기사
요승이라는 단어 자체는 불교가 부패하고 탄압받기 시작했던 고려 말부터 퍼졌다. 요승들이 백성은 물론 왕실까지 요사스러운 설법이나 행동으로 현혹시키고 도를 어지럽혀서 문제라는 내용이 골자이므로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학이 널리 퍼지고 숭유억불이 국가 기조가 된 조선시대에는 아예 지방 관찰사들이 요승을 찾아내어 거세시키거나 참수하기까지 했으며, 요승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현혹된 백성들을 문책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요승들을 공권력을 이용해 퇴치해나갔다.

현대 사회에서 사이비 종교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교주를 문제시 하는 것과 비슷하나, 기득권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진취적이거나 혁명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승려에게도 요승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다소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

설화나 고전소설에서 표현되는 요승은 더욱 기괴한데 죽음에서 부활하거나 날씨를 변화시키고 질병이나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실상 인간의 탈을 쓴 요괴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

딱히 불교, 승려와 관련이 없더라도 종교와 연관된 성직자를 비난할 때 요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예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 선교사들을 멸시하는 표현으로 서역요승이라는 단어도 있다.

3. 실존 인물

역사상 요승으로 기록된 인물, 혹은 승려 신분으로 그 악행이 명백한 인물만 기재할 것. 평가에 논란이 있거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요승으로 몰린 인물은 각주로 부연 설명할 것.
  • 그리고리 라스푸틴 : 엄밀히 말하면 정교회 수도사.
  • 김치양
  • 데바닷타 : 어찌 보면 요승의 시초 격인 인물.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자를 부추겨 부왕인 빔비사라의 왕위를 찬탈하게 만들었다.
  • 도쿄 : 일본 나라 시대의 권승. 여제 쇼토쿠 천황의 병을 치료한 일로 총애를 받아 태정대신 지위까지 올랐다. 우사 신궁에서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나라가 안태하다'라는 신탁이 내려왔다고 위조하여 황위 선양까지 노렸으나, 와케노 키요마로[2]가 직접 우사로 확인하러 간 결과 거짓 주상으로 판명되어 저지되었다. 쇼토쿠 천황 붕어 후 실각한다.[3]
  • 묘청[4]
  • 보우[5]
  • 법경 : 북위 효명제 대에 대승교도의 난이라 불리는 민중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죽일수록 보살로서의 경지가 높아진다는 정신나간 교리를 내세웠다.
  • 설회의 :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요승. 불경을 위조하여 측천무후의 황제 즉위를 정당화시켰다. 나중에 태평공주에게 살해된다.
  • 성지 : 광해군에게 총애받아 권세를 누린 요승. 왕을 부추겨 궁궐 공사를 여러 차례 벌이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때 주살된다.
  • 신돈[6]
  • 양련진가
  • 천고 : 고려 충렬왕 대의 요승. 혜숙사 석탑 밑에 질그릇으로 만든 거북 모형을 묻었다가 꺼낸 뒤 신령스러운 거북이라고 사기극(...)을 벌였다.
  • 최태민 : 현대판 요승의 전형. 실제 불교 승려로 활동한 전적이 있으며, 2007년 작성된 주한 미국 대사관 측의 문서에서도 '한국의 라스푸틴'으로 표현하며 요승 취급했다.
  • 팽형옥 :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문서 내용은 무협지 속 등장인물로서 다루고 있지만 엄연히 실존인물이다.
  • 학조 : 조선 전기의 승려. 신미 등과 함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활발한 경전 언해 및 대장경 간행으로 세조 대부터 왕실의 존경을 받았으나, 부패와 월권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간통까지 벌여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7]


[1] 사실 사람이 아니었고 요괴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둔갑한 모습이라는 내용도 흔하다.[2] 나라 시대의 문관으로, 이 일로 도쿄의 분노를 사 다리 힘줄이 잘리고 유배당한다. 이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거나 맷돼지 떼가 나타나 도쿄가 보낸 암살자로부터 키요마로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도쿄 실각 후 복직하고 충신으로 칭송되어 도쿄 황궁 앞에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문무 양대 충신으로서 동상이 세워져 있다.[3] 이쪽도 아래의 허응당 보우처럼 정치적 누명이 씌워진 것이라는 주장이 일본 사학계에서 제기됐었다.[4]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당대부터 쭉 요승 취급을 받았으나 근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단순히 혹세무민한 요승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한 점을 높이 산 신채호의 평가가 대표적. 현대 사학자들은 정지상 등 서경 천도 세력이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로 보고 있다. 문서 참조.[5] 문정왕후의 후원 하에 불교 중흥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를 반대했던 사림 측에 의해 요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요승 이미지가 덮어씌워진 케이스. 현재는 그의 행적과 저술 등이 조명되면서 불교를 되살리려 노력했으나 실패한 인물로 재평가받는 분위기이다.[6] 개혁가와 부패한 요승으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기록 상으로도 양쪽의 면모가 모두 나타나고 있어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인물.[7] 다만 학조의 비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한국어 위키백과에만 보이고, 그 출처도 불분명하거나 심지어 이덕일(...)의 저서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신뢰성에 다소 의문이 남는다. 이쪽도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점 때문에 유생들이 악의적 소문을 퍼뜨려 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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