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3:37:37

용손


1. 개요2. 특징3. 역사4. 각종 매체에서의 용손5. 관련 자료

1. 개요

용손 (龍孫 : 용의 아들이라는 뜻)

용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용의 자손이 사람일 때 용손이라고도 한다.

여자일 때는 용녀라고도 하지만, 용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때도 용녀라고 한다.

2. 특징

  • 모든 면에서 사람과 같으나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고 한다.[1]
  • 용손도 용이기 때문에 승천 역시 가능하다.

3. 역사

"난(我) 용녀(龍女)이오. 오래 경(經)을 써왔지만 지금까지 끝내지 못했소.
낭군(郞君)이 글을 잘 쓰고 활도 잘 쏘니, 군(君)을 배에서 남기어 내(吾) 공덕(功德)을 쌓는걸 돕고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풀어주길 바라오.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7일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 《고려사》 <고려세계> 중.
  • 이규보의 박연폭포에서도 용녀가 언급되었다.
피리 소리에 반한 용녀 선생께 시집오니 / 龍娘感笛嫁先生
오랜 세월 그 정열 즐겁기만 하였겠지 / 百載同歡便適情
그래도 임공의 새 과부 탁문군이가 / 猶勝臨邛新寡婦
거문고 소리 듣고 실신한 것보단 나으리 / 失身都爲聽琴聲
동국이상국집》 권14, 고율시, 박연폭포 중

이렇듯 왕건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용손이라 표방하며 그 정통성을 내세웠었으나 후대에 들어서 특히 무신정변 이후에는 오히려 반란 명분이 되는 등 역기능이 되었다. 무신정권에 들어서면서는 고려 왕실도 역사가 250년이 넘어가며 왕손들이 많았던 관계로 무신세력들 입장에서는 지금 왕 말고 더 말 잘 듣는 다른 용손으로 바꿔 치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는데,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몽골제국의 부마국이 되면서 '大몽골부민(部民) 가한(可汗)의 부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이런 복속과 화친의 자세는 한편으로 고려 왕가의 보전을 도모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원간섭기에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고려 국왕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기존의 즉위 조건에 '용손'이라는 조건 외에 '몽골의 부마일 것'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스스로 추가하여, 몽골이라는 뒷배로 고려 무신세력들이 국왕을 쉽게 갈아치우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2][3]

4. 각종 매체에서의 용손

  • 고려 거란 전쟁 - 본편에선 고려시대를 다룬 다른 KBS 사극들과 달리 '용손', '용의 후손'이란 단어를 고려 왕족들이 스스로 자칭할 정도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통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인다. 본편에 등장하는 용손들 중 부계와 모계가 전부 태조 왕건의 혈통을 이은 자는 단 3명으로 천추태후, 목종, 그리고 훗날 현종이 되는 대량원군 왕순 뿐이다.
  • 정도전 - 우왕이 처형당할때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는 혐의를 씌우자 자신은 신돈의 아들 신우가 아니라 공민대왕의 장자 왕우임을 주장하고 증거로 왼쪽 가슴에 자기 몸을 인두로 지진 흉터를 보여주면서 서해 왕의 후들이 갖고 있다는 용의 비늘이라며 왕씨의 증표라고 말하다가 군사의 칼에 등을 베여 죽는다.

5. 관련 자료


[1] 주로 겨드랑이 밑이라고 기록되어있다.[2] 이정란, 2014, 「高麗 王家의 龍孫意識과 왕권의 변동」<<韓國史學報>> 제55호.[3] 그러나 이는 또다른 부작용을 만들었는데 '몽골의 부마일 것'은, 달리 말하면 몽골의 강한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왕실 입장에선 용납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진짜 문제는 몽골이 계승 문제까지도 개입했다는 것. 이 때문에 원간섭기의 왕들은 즉위와 퇴위에 있어 몽골의 영향을 안 받은 왕이 없다. 심지어 이것도 모자라 입성책동이라는 고려라는 나라 자체를 소멸시키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다. 그나마 이건 주류의 주장은 아니고 대게 고려 본국과 갈등을 빚은 부원배 측에서 주장하였고 그나마도 고려 왕들과 신하들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고려 왕실에서는 세조구제라는 명분이 있었고 몽골 또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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