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27 16:42:06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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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왕조의 아미르 & 술탄
8대 아불 라비 술레이만 9대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 10대 아불 하산 알리

1. 개요2. 생애
2.1. 치세2.2. 마린-하프스 동맹과 죽음

1. 개요

أبو سعيد عبد الله عثمان بن يوسف
아부 사이드 압둘라 우스만 빈 유수프[1]

생몰 1276년 12월 ~ 1331년 8월
재위 1310년 11월 ~ 1331년 8월

마린 왕조의 9대 군주. 20여년의 치세 동안 무리한 원정 대신 내치에 집중하여 14세기 초의 혼란에 직면했던 모로코의 안정을 되찾았다. 자애로웠던 우스만은 장남 아부 알리의 연이은 반란[2]에도 그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시질마사 번왕에 봉하는 것에 그쳤다. 큰 무력 행사 없이 안달루스의 교두보를 되찾은 우스만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 및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특히 후자의 공주와 후계자 아불 하산 알리와의 결혼을 통해 양국은 긴밀한 관계에 이른다. 내부적, 외교적으로 안정을 구축한 우스만은 후대에 이어진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생애

5대 군주였던 아부 야쿱 유수프와 아랍 부족장[3]의 딸 아이샤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과 두 조카들이 있던 그는 계승 서열 4위에 불과하였으나, 형이 요절하고 1307년 부왕 유수프가 사망한 후 계승한 두 조카들 역시 각각 1년과 2년의 재위 끝에 후사 없이 요절하자 1310년 별 저항 없이 즉위하였다.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그는 하얀 피부와 평균 신장을 지녔고 외모가 준수하였다고 한다.

2.1. 치세

14세기 초엽 세우타를 거점으로 마린 조를 위협했던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의 반란이 1309년 막 진압되었고, 1310년 카스티야를 격파하며 알헤시라스가 수복된 상태에서 즉위한 그는 무리한 원정 대신 내부 안정에힘썼다. 1313년에는 돌려받았던 알헤시라스와 론다의 안달루스 교두보를 동맹 그라나다에 넘겨주며 부왕과 마찬가지로 안달루스 경영을 철회하였다. 그러던 1315년 우스만이 타자에 머물던 틈에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부 알리가 페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아들과 싸우기 싫었던 우스만은 협상을 통해 그에게 재위를 넘겨주고 타자 총독으로 은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부 알리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자 반격에 나서 페스를 포위, 항복을 얻어내었다. 아부 알리는 계승권을 잃었으나 자애로웠던 우스만은 그에게 시질마사 일대를 영지로 한 번국을 떼어 주었고, 이 시질마사 번국은 20년 이상 유지된다.

1316년에는 과거 반란의 거점이던 세우타의 총독 야흐야 이븐 아프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세우타는 12년 가량 자치를 유지한 후 재차 복속한다. 한편 1319년 카스티야 군은 그라나다 점령을 위해 두 왕자가 이끄는 1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에 의해 추대된) 그라나다 술탄 이스마일 1세는 마린 조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이전 반란을 기억하던 우스만은 개입의 조건으로 사실상 실권자였던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를 페스에 가두겠다며 그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제안은 당연히 거절되었고, 직접 반격에 나선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는 시에라 엘비라 전투에서 2배의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고 두 왕자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1320년 카스티야와 그라나다는 8년의 휴전에 합의한다.[4]
파일:모로코 페스.jpg파일:모로코 페스 1.jpg
1323-25년 건설된 알 아타리네 마드라사

1320년 시질마사의 아부 알리가 재차 반란을 일으켜 마라케쉬를 포함한 모로코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1322년 반격에 나선 우스만은 남부와 북부의 경계인 움물 라비아 강에서 반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우스만은 재차 아들을 사면하여 그가 계속해서 시질마사를 다스리게 해주었다. 한편 그 무렵 우스만은 페스에 여러 마드라사 (고등 교육기관)들을 건립하였다. 마드라사 페스 엘 제디드 (1320년), 엣 샤흐리즈 (1321년), 알 아트리네 (1323년)가 대표적이다. 한편 1325년 그라나다의 우마르 이븐 아빌 울라는 이스마일 1세를 암살, 어린 무함마드 4세를 옹립하고 전횡을 하였다. 다만 동맹이던 무함마드 이븐 알 마흐루크와 사위 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에게 밀려난 그는 우스만에게 사면과 모로코 귀환을 청하며 망명을 꾀하는 척하다가 말라가에서 무함마드 4세의 숙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아비 사이드를 술탄 알 카임 비 아므르 알라로 옹립하며 반격에 나섰다. (1327년)

그의 반군과 카스티야가 연합한 내전이 이어졌고, 6월 알폰소 11세는 올베라 성채를 점령하였다. 내우외환에 직면한 무함마드 4세는 론다, 마르베야, (그리고 이듬해에) 알헤시라스를 재차 마린 조에게 넘겨주며 원군을 청하였다. 그리고 1328년 여름 무함마드 4세는 전통적인 반란의 거점 과디시에 있던 우마르 이븐 아빌 울라와 화해한다. 11월에는 무함마드 4세에 의해 무함마드 이븐 마흐루크가 살해되었고, 대립 술탄 아부 압둘라는 마그레브로 망명하였으며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는 군부의 셰이크 알 구자트에 복귀하며 권력을 회복하였다. 다만 그는 1330년 테바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에 패한 후 말라가에서 병사한다. 결국 그라나다의 내전으로 우스만은 15년 전에 내어주었던 안달루스의 교두보를 손쉽게 되찾았다.

2.2. 마린-하프스 동맹과 죽음

1329년에는 틀렘센 자얀 왕조의 아부 타슈핀의 공격에 시달리던 하프스 왕조의 아부 바크르 (알 무타와킬)가 딸 파티마와 우스만의 아들이자 후계자 아불 하산 알리의 결혼을 제안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응한 우스만은 틀렘센으로 파병하여 아부 타슈핀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마린 해군을 보내어 하프스 조를 돕게 하였다. 아부 타슈핀이 패퇴하며 작전은 성공하였고, 마린-하프스 동맹이 성사되었다.

그러던 1331년 8월, 며느리를 맞을 준비를 하던 우스만은 와병하여 자주 머물던 타자 부근에서 사망하였다. 아들이자 예비 신랑 아불 하산 알리가 계승하였는데, 장남 아부 알리의 시질마사 번국 역시 건재하여 후일 대립의 씨앗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우스만의 비교적 긴 치세동안 마린 조는 14세기 초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성기의 토대가 될 안정을 구축하였다.

[1] Abū Sa'īd 'Abdullāh 'Uthmān ibn Yūsuf Abū Ya'qūb[2] 1315년, 1320-22년[3] 아부 아티야 므할할 이븐 야흐야 알 카틀리[4] 그후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는 732번이나 카스티야를 습격하고 1325년에는 루테를 수복하는 쾌거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