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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鴻基
1831년(순조 31) ~ ?
1. 개요
조선 말기의 개화 사상가이자 의관(醫官)이다. 본관은 한양(漢陽)[1],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大癡)·여여(如如)이다.2. 생애
1831년(순조 31)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유익소(劉益昭, 1797.8.2. ~ ?)[2]와 어머니 전주 김씨(1796.2.18. ~ ?)[3]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익소는 무과에 급제했으며, 조부 유흥오(劉興五, 1769.8.4. ~ 1841.6.24.)[4]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경희궁 위장(慶熙宮衛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형제로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사과(司果) 벼슬을 지낸 유한기(劉翰基)가 있었고, 조카 유운원(劉運元, 1857. ~ ?)[5]은 승문원(承文院)의 사자관으로 근무하다가 1882년(고종 19) 식년(式年) 음양과 명과학(命課學) 전공에 2등 1위로 입격하여[6] 일관(日官)에 종사하였다.박규수, 오경석, 최한기와 함께 개화 사상가이자 통상 개화론자였다. 오경석과는 친한 친구였으며 박규수와도 친분이 있었으나, 박규수와 오경석이 1876년, 1879년에 세상을 떠나자 홀로 개화론을 이끌며 주로 급진 개화파에게 영향을 주었다.[7] 중인에 의관 출신이었으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유길준, 윤치호, 이시영, 홍영식, 박정양 등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도 불렸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감생청(減省廳)이 설치되자 부안(簿案)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고[8], 부사용(副司勇)으로 임명되었다.[9]
1884년에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과 함께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4일 뒤에 가출하였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에 개화파가 닥치는 대로 학살당할 때 변을 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1910년(융희 4) 7월 18일 특별히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규장각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된 승정원일기 기사로 보아, 적어도 1910년 이전에는 사망했음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