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4:02:20

육군(영화)

육군 (1944)
[ruby(陸軍, ruby=りくぐん)]
Army
파일:o0330049114802765564.jpg
장르 <colbgcolor=#ffffff,#1f2023>드라마
감독 기노시타 케이스케
제작 야스다 켄이치로
원작 히노 아시헤이
각본 이케다 타다오
출연 류 치슈
다나카 기누요
호시노 카즈마사
촬영 타케토미 요시오
제작제공 일본 육군성
제작사 쇼치쿠오후나촬영소
배급사 파일:일본 국기.svg 쇼치쿠
개봉일 파일:일본 국기.svg 1944년 12월 7일
화면비 1.33:1
상영시간 87분
흥행 수익 추정불능 (전시 전쟁선전영화물로 비영리상영)

1. 개요2. 시놉시스3. 등장인물4. 평가
4.1. 결과적으로 의뢰인(일본육군)을 물먹인 영화4.2. 논란의 영화 마지막 11분 부분
5. 여담

[clearfix]

1. 개요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1944년(쇼와 19년) 영화. 그의 일본 패망 전 초기 4작품중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던 히노 아시헤이(필명이며 본명은 타마이 카츠노리/玉井勝則)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으로 일본제국 육군성이 전쟁선전영화로 기획하고 쇼치쿠에 의뢰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 맨 처음 시작부분에 크레딧으로 '육군성 후원/정보국 국민영화(陸軍省後援 情報局國民映画)'라고 아예 대놓고 박아놓았다. 뒷 배경 역시도 일본 육군의 기마보병부대 사열식을 깔아놓아 아예 딴 해석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았다.
파일:vlcsnap-2022-05-11-20h40m20s292 copy.jpg
영화 첫 부분 크레딧에 '육군성 후원/정보국 국민영화(陸軍省後援 情報局國民映画)'라고 아예 대놓고 박아놓았다.

전쟁선전영화로 제작을 의뢰했던 일본 육군성은 완성된 영화를 보고 극도의 분노를 표시하지만 대규모 지원을 해준 이 영화를 그냥 창고에 처박아 두는 것은 아까웠던지 개봉은 허락한다. 하지만 감독인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이후 일본제국 육군성 정보국으로부터 영화 제작을 규제당하게 된다. 또한 정보국은 기노시타 감독을 요시찰 딱지를 붙여 활동에 제약을 가했고, 다음 작품으로 기획 중이었던 "카미카제 특공대(가칭)" 영화 감독도 강제로 취소당한다. 이와 같은 탄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나고 기노시타 감독은 쇼치쿠로 복귀한다.

2. 시놉시스

일본의 혼란기 막부시대 말기에 전당포를 운영하는 '토모스케'는 우연히 부상을 입은 막부 무사 기자에몬을 치료하고 보답으로 '대일본사'라는 역사책을 보관해달라는 유언 겸 부탁을 받는다. 이후 '토모스케'의 아들인 '토모유키'는 세월이 흘러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삼국 간섭을 통해 산둥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을 목도하고 동경으로 상경해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 병을 얻어 병원신세를 지고 아들 '토모히코'를 불러 사관학교에 들어가 일본육군이 되라고 유언하고 협심증으로 사망한다.

3.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Army_RYU.png
파일:Army_Tanaka.png마지막 12분 시퀀스 부분에서 다나카 기누요의 연기는 말 그대로 신들린 연기였다는 일본 국내외 평론가들의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파일:Army_Sintaro.png
  • 신타로-와카-토모히코 부부의 아들역(호시노 카즈마사)

4. 평가

"국방TV" 두시간짜리 전쟁홍보영화 만들라고 후원해줬더니 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말 마지막에 집어넣어 스폰서(일본 육군)를 경악에 빠트린 영화.

딴지일보 기사중 이 영화에 대한 평론-[문화]일본 영화계의 카이저 소제 : 국책영화 '육군' 이 있다.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배경까지 매우 깊이있는 평론임으로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4.1. 결과적으로 의뢰인(일본육군)을 물먹인 영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뢰인인 일본육군성은 이 영화에 만족을 할 리가 없었다. 시사회가 끝난후 일본제국 육군성 내부에서 온갖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평가회'가 벌어졌다고 기록에 남아있으며 정보국 소속 육군 장성 몇몇은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쇼치쿠 사무실로 달려가 관계자들을 군화발로 조인트를 깠다(?)고 쇼치쿠 관계자들이 술회할 만큼 일본 육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쇼치쿠로 들이닥친 육군 장성들은 감독인 기노시타 케이스케를 반역죄로 기소하겠다며 당장 기노시타 감독의 행방을 대라며 길길이 날뛰었으며, 쇼치쿠, 도호 등 영화사들을 검열로 길들여, 영화를 전쟁선전활동에 이용하는 것에 온건적인 군 관계자들도 쇼치쿠에게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느냐?','기대했던 결과물이 아니지 않느냐?'며 항의하는 바람에 당시 쇼치쿠에서는 표면상으로는 기노시타 감독의 사직서를 받았으며 의뢰처인 육군에게 다시는 체제에 반하는 영화를 제작하지 않겠다며 허리를 연신 굽혀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영화산업 전반에는 이 사태에 대해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일본제국 육군성의 삽질을 고소해 했다는 분위기가 만연했다는 후문도 전해지는데 사실 일본 육군성이 사전 극본 검열을 했고, 제작 중간중간에도 편집본을 검열했기 때문에 육군성이 기노시타 감독과 쇼치쿠를 무작정 욕할 것만도 아니었다. 당시 (1944년)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일 정도로 전황은 일본에게 절망적이었다. 일본의 절대방어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고 본토에 B-29가 자기집 안방처럼 드나들게 되는 상황에서도 일본 육군은 본토결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킬수 있다며 '야마토 민족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 '2천만 일본국민을 특공으로 삼으면 카미카제는 반드시 분다' 라는, 현실감각이라고는 씨알도 없는 소리를 계속 해댔다. 전시 선전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지식인층과 반군국체제에 동조하는 이들, 그리고 특이하게도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영화인들이 그나마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는 축에 속했다.

당시 일본의 영화산업이 해외에서 도입된 선진산업인 점, 영화라는 특성상 종사자들의 의식이 군부에 비해 어느정도 깨어있었던 점, 더군다나 쇼치쿠 사풍상 (쇼치쿠는 감독/조감독/작가로 입사하려면 대학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고등교육 수료자들이 많았던 탓에 군부의 전횡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 영화계 전반의 풍토가 기노시타 감독과 쇼치쿠에게 더욱 동정적으로 작용했다. [1]

4.2. 논란의 영화 마지막 11분 부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 11분 시퀀스는 사실 영화 제작 콘티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콘티는 커녕 초기 영화 기획서에도 이 내용은 없었다. 대본에는 이 11분짜리 시퀀스가 달랑 한줄로만 존재한다.
'어머니(와카)는 역에서 아들이 출병하는 것을 바라본다'

당연 대본을 검열했던 육군 정보국은 아무런 딴지를 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 단문은 기노시타와 쇼치쿠의 비밀 작전이었고, 고작 이 한줄이 어머니가 지켜왔던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큰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어머니의 좌절과 슬픔이 표현되는 11분짜리 롱 시퀀스로 변신하게 된다.

기노시타 감독과 쇼치쿠는 제작이 막바지에 닿을 즈음, 이 장면을 대사 없이 와카(어머니)와 신타로(아들)의 마지막 이별씬으로 구성할 계획을 짜고 육군성에게 촬영협조를 구했다. 육군성은 천황폐하의 은덕을 입고 대동아공영을 위해 출병하는 자랑스러운 일본 육군의 모습이 찍히겠구나 싶어 얼씨구나 대규모 군 시가행진을 열어 영화촬영에 협조한다. 당시로서는 일본 육군성이 파격적인 지원과 협조를 해주는데 이게
* 후쿠오카 중심가를 완전히 통제하고 육군 1개 여단급의 병력을 동원해줌
* 촬영당일 후쿠오카 시민들을 대규모로 촬영에 자발적으로 동참토록 유도(라 쓰고 징발이라 읽는다)
* 촬영장소인 후쿠오카 시내에 모든 노면전차, 버스 운행중지. 자동차 진출입 모두 통제.
* 간지가 충분이 날 수 있도록 군악대와 기마보병 병력도 차출
* 동원된 환송인파 엑스트라들과 후쿠오카 시민들의 복장차림은 최대한 깨끗하고 미화된 것으로 사전 지도
* 행사당일 군 병력통제 및 지휘부는 쇼치쿠기노시타 케이스케감독 및 영화제작팀에게 최대한 협조토록 할것.

실제로 이날 동원된 일본 육군 병력은 임팔로 출병하는 버마방면군 15군 소속 병력들이었다.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로도 유명한 임팔에서의 궤멸적인 패배로 인해 이날 영화에 나온 일본군 군인들 대부분은 임팔 전투 최전선에서 전사했다.[2]

이 마지막 부분은 여러 평가를 받겠지만 분명한 것은 의뢰인인 육군이 이 부분으로 인해 분노했다는 점이다. 전쟁선전영화인 이 영화의 목적은 전쟁을 홍보하고 전쟁을 수행중인 '일본 육군' - 그래서 영화 제목도 '육군'으로 만들었는데!!! - 을 지지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일본 육군'인 '신타로'를 배웅하는 어머니 '와카'는 지지는 커녕 그녀의 열굴은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누가 보더라도 연전연승, 패배를 해본적이 없다는 대일본 제국 육군의 위엄은 커녕 아들의 불길한 운명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애닳는 모정만이 화면에 가득찰 뿐이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관람했던 일본 육군성 장성들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5. 여담


일본의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영화평론가는 "영화의 시선은 정직하고 강경하게 카메라를 통해 통렬한 당시의 현실을 계속 직시한다. 그것은 뚜렷하게 강한 (감독의) 표현으로 보이기에 성공적이다.이 필름은 당시 일부 군국주의 군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저항 영화로 보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라고 영화의 단점을 지적했다. [3]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이 영화 감독직을 맡는 것을 거부했다는 설도 있다. 일본 육군성쇼치쿠에게 제작을 의뢰한 만큼 쇼치쿠도 당시 군부의 눈밖에 나는 것을 조심했기에 당시에 쇼치쿠에서 능력이 있는 감독을 선정했을 것이다. 일본 육군성이 기노시타를 콕 집어 지명했다는 말도 있고, 쇼치쿠에서 맡기 싫어하는 기노시타에게 강압적으로 권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인된 바는 없다.

1953년 NHK 특별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해 육군(영화) 제작당시 일화를 솔직하게 술회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인터뷰에 따르면 기노시타 감독은 제작 스폰서인 육군성의 외압이 상상외로 컸으며 감독직을 맡으면서 부담이 컸음을 밝혔다. 마지막 다나카 기누요의 11분 시퀀스 장면에 대해서는 "그 장면이 최선이었다. 육군의 주문대로 아들의 출병을 응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출할 수 없었다. 내 드라마에서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식에게 악수하고 '전쟁터에 나가 자랑스럽게 전사하라'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나는 결코 그런 걸 연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기노시타 감독이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가진 고뇌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 당장 일본 육군은 야마나카 사다오라는 천재 감독이 체제에 비협조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면제한 걸 취소해 징병해 끌고 가 간접적으로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어서 일본 영화계를 초상집으로 만든 전력이 있다.[2] 당시 1944년(쇼와 19년) 12월 극장 개봉시에는 이날 영화에 동원된 군인들의 유가족들이 대규모로 영화관으로 관람을 해서 자식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렇게라도 볼려는 애절한 사연이 이어졌다.[3] 요모타 이누히코는 한국의 건국대학교에서 강의한 적도 있고 하명중의 영화를 비롯한 한국 엉화를 높이 평가하며 일본의 좌파 문필가들과도 교류가 깊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