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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성남(星南) |
본관 | 양성 이씨[1] |
출생 | 1900년 2월 17일[2] |
경기도 양성군 반곡면 죽백리 (현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 |
사망 | 1970년 6월 20일 (향년 70세) |
경기도 안성군 (現 경기도 안성시) | |
묘소 |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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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2. 생애
1900년 2월 17일 경기도 양성군 반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에서 아버지 이관섭(李觀燮, 1879. 2. 12 ~ 1956. 11. 22)과 어머니 연산 서씨(連山 徐氏) 서평중(徐平重)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로 행진해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향했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천여 명과 합세했다.
이리하여 2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여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했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그 다음엔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의 기물을 파괴하고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후 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 방화했다.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0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규창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