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5 21:57:41

이성애(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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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이성애
출생 1952년 7월 29일 ([age(1952-07-29)]세)
서울특별시
신체 169cm[1]
종교 개신교
학력 수도사대부속고등학교[2] (졸업)
단국대학교 (사학과)
데뷔 1971년 1월, 《사랑의 오두막집》

1. 개요2. 초기 생애3. 일본진출, 그리고 성공4. 결혼, 그리고 은퇴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2. 초기 생애

1952년 7월 29일[3]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수도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 1971년 1월 《사랑의 오두막집》이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키 169cm에 당시로서는 시원한 외모를 가진 허스키한 목소리[4]의 가수로 점점 인기를 얻어, 1973년 '기다리는 마음'[5]이라는 곡으로 MBC 10대가수상 여자신인가수상, KBS 10대가수상 신인상, CBS 10대가수상 신인상을 수상한다.[6]

하지만, 불렀던 곡들이 대부분 번안곡이었고, 1973년 이후 한국 음반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앨범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3. 일본진출, 그리고 성공

【 음반 펼쳐 보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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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oshiba 사에서 만든 음반이지만 녹음은 서울 스튜디오 1976년 9월 14,15,16일이라고 적혀 있다.#

수록된 <カスマプゲ>가 일본에서 대히트 친다. 남진(南珍)의 노래 《가슴 아프게》를 일본어로 번안한 것이며,
일본어 제목도 한국어 발음을 일본식으로 "카스마뿌게"라고 적은 것이다.



일본에 진출한 가수로 흔히 계은숙이나 김연자 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70년대 일본에 진출하여 큰 성공을 거둔 가수는 바로 이성애였다.

인기가 어느정도였냐면, 그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하던 '8트랙가라오케'[7]에 당당히 수록될 정도였고, 무려 후지TV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8]에 출연까지 한다.# 이후 일본의 노래방에 한국어 가사로 된 한국 가요가 무리없이 불리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

앨범은 EMI로부터 발매된 총 4장의 싱글과 5장의 LP, 카세트테이프까지 해서 6억 5천만엔(!!)의 매출고를 올렸다고 하니, 당시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실감이 된다. 일본의 평론가들이 '엔카의 원류를 한국의 이성애로부터 찾았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4. 결혼, 그리고 은퇴

이렇게 인기 절정의 가도를 달리던 이성애는 1978년 돌연 결혼 발표를 한다. 상대는 당시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한국인[9]이었고, 은퇴 리사이틀을 연 후, 은퇴한다.은퇴 리사이틀 앨범 中

이후 1979년 백년가약을 맺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하다가, 2000년도 초반 CCM가수로 앨범을 냈다. 대전지역의 교회에 가끔 찬양집회에 초대되어 CCM을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2005년 10월에는 18년만에 일본에서 신곡을 레코딩해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한일복지교류자선공연'의 테마곡이었던 《눈물은 사람을 위해》와 《마음의 여로》를 불렀다.

2006년과 2007년에는 과거 히트했던 곡들을 모아 골든앨범을 일본에서 발매하기도 했다.

5. 기타

  • 비틀즈의 Let It Be를 번안한 '하나님 뜻대로'라는 곡을 1974년에 발표했다. 가사 중 Mother Mary를 성모 마리아로 바꿔 CCM으로 번안했는데, 정작 작곡가인 폴 메카트니는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이다.


[1] 그녀가 살았던 시기를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 180cm이 조금 안 되는 장신인 셈이다.[2]서울세종고등학교[3] 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성애 디럭스앨범'에 보면 상술된 것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4] 목소리가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패티김과 비슷하다고 하여, '패티김을 이을 가수'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5] 1936년생 미국 가수 겸 영화배우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1970년에 발매한 곡인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의 번안곡이다.[6] 당시 MBC를 필두로 여러 방송사들이 10대가수상을 기획하여 방송했었다.[7] 앰프 기계에 1개 100엔인 노래반주 테이프를 재생해 부르는 것으로, 노래방기계의 시초 되겠다.[8] 줄여서 '요루히토'라 불리던 후지TV의 음악방송으로, 1968년 11월 4일 시작해 1990년 10월 3일에 종영한 인기 절정의 프로그램이었다. 백미는 오프닝에 출연진들이 서로의 노래를 바꿔부르는 것과,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골라 경품을 주는 이벤트였다.[9] 충남대 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차상철 교수로 전공은 미국사, 미국외교사, 한미관계사이며, 미군정시대에 대해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에 퇴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