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이진영(李鎭榮) |
이명 | 이진영(李珍榮)·이선호(李善浩) |
본관 | 경주 이씨[1] |
생몰 | 1890년 11월 1일 ~ 1933년 9월 17일 |
출생지 | 경기도 양성현 (현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2]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이진영(李鎭榮)은 1890년 11월 1일 경기도 양성현(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으로 이주했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양성면·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처음에는 양상면과 원곡면이 별도로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원곡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워 버렸다. 다시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은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 온 이진영은,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었으며#, 그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주거침입·강도·소요·전신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 공소가 수리되지 않아# 미결수로서 복역해야 했다.
결국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500일을 본형에 산입함)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33년 9월 17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