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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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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로고3. 선인재단 산하 인천대학교4. 시립인천대학교5.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1. 개요

파일:인천대학교 심벌 화이트.svg 인천대학교 연혁
파일:인천대 약사.jpg
1979년 개교한 인천공과대학을 시초로 하여 198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94년 시립 인천대학교로 출범하였다. 이후 2013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로 전환되었다.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13년에 국립대법인화하여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라는 법인을 설립하였다. 즉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이다.

역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 참조하며 하단에 있는 인천대학교 역사 문서는 #1 #2 #3 위 세 링크 및 학교 홈페이지 대학 소개글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2. 역대 로고

파일:인천대학교 심벌 화이트.svg 인천대학교 로고
파일:인천대학교 휘장 로고.svg 파일:인천대학교 로고.svg
휘장 심벌

파일:인천대학교 심벌 화이트.svg 인천대학교 이전 로고
파일:인천대학교 초기 로고.svg 파일:시립인천대학교 로고 (변경 전).svg 파일:시립인천대학교 로고 (변경 후).png

3. 선인재단 산하 인천대학교

파일:인천대학교 초기 이미지마크 화이트.svg 인천공과대학 / 인천대학 → 인천대학교 Inchon University
파일:인천대학교 초기 UI.svg
1979.01.10 인천공과대학(5개 학과) 설립 인가(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1979.09.22 6개 학과 신설 인가(경영학과, 무역학과, 공업경영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1979.12.13 인천대학으로 교명 변경
1980.10.02 10개 학과 신설 인가(국어국문학과, 일어일문학과, 법학과, 행정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가정학과, 미술학과)
1981.10.20 3개학과 신설 인가(국민윤리학과, 정치외교학과, 체육학과)
1981.11.25 인천대학 교육대학원 설립 인가
1984.10.05 3개학과 신설 인가(전자계산학과, 경기지도학과, 경제학과)
1984.11.27 인천대학 대학원 설립 인가
1987.10.23 2개 학과 신설 인가(재료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1988.10.29 4년제 종합대학 인천대학교로 승격 인가
1988.11.23 6개 단과대학 설립 인가(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공과대학, 경상대학, 예체능대학)
인천대학교는 선인학원에서 만든 사립학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선인학원에 관한 내용이 엮여있다. 또한 중간에 여러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학교 이름이 많이 바뀌게 된다. 전체적으로 나열하면 1979년 인천공과대학, 1980년 인천대학, 1988년 인천대학교, 1994년 시립 인천대학교, 2013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개교 이후 지금까지 ‘인천대’의 이름이다.

선인재단 아래에서 인천대의 출발은 제물포캠퍼스에서 시작한다.[1]

박정희 정권과 재단의 설립자인 백인엽-백선엽의 관계가 특별했기에, 선인학원은 급성장 할 수 있었고 온갖 부정과 비리가 넘쳤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최규하 정권의 짧은 임기 후에 다시 군부 독재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런 정권 교체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개혁을 표방하여 선인재단의 비리를 일부 밝혀내게 되었다. 선인재단은 1979년 1월부터 무려 9,900명을 부정 편입학하게 해주었고, 기부금 61억 원 중 상당액을 이사장인 백인엽 씨가 횡령했던 것이다.[2] 게다가 건물 시설면에서도 건물 내부에는 내벽공사를 하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었고 10층이 넘는 건물에 실내 화장실이 없어서 쉬는 시간마다 건물 밖에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 앞에 학생들의 긴 줄이 생기곤 했다.
결국 개교 1년 만에 인천대 학생들은 학원 자율화와 학생자치권 강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진행했다. 학생들의 저항과 함께 백 씨의 추가로 비리가 드러나자 백 씨는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히며 선인학원에서 물러났고 이사회는 전원 사퇴했다. 이에 문교부[3]는 1981년 4월, 처음으로 선인학원에 관선이사, 즉 문교부 추천 이사를 파견해 재단 정상화에 나섰다. 그러나 그해 7월,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백 씨의 형인 백선엽을 선인학원 관선이사로 보내며 선인학원 정상화는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이후 백선엽은 교수 근무 평정인 '고과제' 등을 이용해 교수진을 장악하고 교수진과 직원들을 통해 일부 학생들을 포섭해 학생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다시 학교를 장악하기 시작했다.[4]

이후 백인엽-백선엽에 대한 인천대 학생들의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문교부는 단일대학에는 전국 최초로 인천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전두환 정부는 전경 2000여명, 헬기, 소방차 등을 인천대에 투입했다.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5] 인천대는 198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및, 선인재단 정상화 작업과 더불어 젊은 교수들이 충원되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물려서 인천대는 1994년 시립화에 성공했다.
선인학원 정도 규모의 거대 사학이 시·공립화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천대의 시립화는 우리나라의 법률체계와 행정 등 모든 것들을 바꾸는 혁신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과 그의 신임을 받은 최기선 시장은 관련 지침을 거침없이 개정해 나갔다. 불의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으로 시작된 인천대, 선인학원 학원민주화의 결실은 여전히 국내 유일한 사례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6]

4. 시립인천대학교

파일:시립인천대학교 이미지마크 화이트 (변경 전).svg 시립인천대학교 University of Inchon
파일:시립인천대학교 UI (변경 전).svg
1994.03.01 재단 공립화, 시립 인천대학교 출범
1995.11 캠퍼스 송도신도시 이전 논의 시작[7]
1997.03.07 동북아 발전연구원 설치 운영
1997.11.05 법과대학, 동북아 국제통상대학 신설
2002 인천광역시송도신도시 4공구 15만 6000평의 이전부지 협약 체결
2002.10.15 정보기술대학 설립인가
2003.08.25 교육인적자원부『송도신캠퍼스 위치변경(이전) 계획』승인
2004.07.08 ‘인천지역혁신발전계획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인천에는 260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구가 있으나 국립대가 없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며 시립 인천대학교의 국립대 전환 검토지시
2005.03 인천대 국립화 범시민추진위원회 결성
2005.04.23 인천대 국립화 시민서명, 총 130만 38만 명 참여로 마감
2005.09.28 미래관(미추홀캠퍼스) 준공
2006.04.03 인천대학교 국립대학 특수법인 양해각서 체결
2009.07.30 송도 신캠퍼스 준공
파일:시립인천대학교 이미지마크 (변경 후).png 시립인천대학교 University of Incheon
파일:시립인천대학교 UI (변경 후).png
2010.03.01 시립 인천전문대학 흡수 통폐합
기존 인천전문대학 입학정원을 통해 단과대학/학과 신설[8]
입학정원 1,680명 > 2,680명으로 확대[9][10]
미술학부 폐지, 조형예술학부, 디자인학부 신설
토목환경공학과, 건축공학과 폐지 후 도시과학대학 설립
예체능대학 공연예술학과 신설
경영대학 세무회계학과 신설
사회과학대학 문헌정보학과, 창의인재개발학과 신설
공과대학 에너지화학공학과, 나노공학과 신설
사범대학 설립[11]: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 일어교육과, 수학교육과, 체육교육과, 유아교육과, 역사교육과, 윤리교육과 신설
2011.09.01 생명과학기술대학 설립인가, 자연과학대학 해양학과 신설[12]
2011.12.30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 인천대법) 국회 본회의 의결
선인재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립화가 된 시립인천대학교는 학교 발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인천시와의 갈등이 생기게 된다. 등록금 7%인상,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통합, 송도 캠퍼스 이전에 관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13] 그러던 중 97년도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하여 송도 개발 계획이 중단되었다가 2002년 당시 최기선 인천시장이 송도신도시 4공구에 15만 6000평[14] 이전부지 체결을 약속했고[15] 2008년 캠퍼스 이전 계획이 확정됐다.

그 사이에 인천대의 국립화 논의가 시작되게 되었고,[16]2006년 인천대 국립대학 특수법인 MOU를 맺으며 국립대 법인화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인천대는 2009년 8월 송도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다. 또한 2010년 인천전문대와 통합하여 현재의 인천대학교/송도캠퍼스의 모습을 천천히 갖추기 시작했다.

5.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파일:인천대학교 심벌 화이트.svg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Incheon National University
파일:인천대학교 엠블럼.svg
2013.01.18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출범
2016.11.09 법학과 폐지, 법학부 신설
2017.06.01 기초과학연구소 – 대학중점연구소지원사업 선정
2019.04.29 단과대학 명칭변경: 글로벌법정경대학 → 글로벌정경대학
소속 단과대학 변경:글로벌법정경대학 법학부 → 법학부(독립학부)
2021 정부출연금 1000억 원 돌파(인천시 출연금 200억원 미포함, 총 운영지원비 약 1200억 원)
2022 신입생 모집 주야간 구분 폐지[17]
인천대학교의 국립대 전환 논의는 2003년부터 시작하고 2006년에 계획이 되었으나, 이후 전환 과정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로 국립대 법인화이다.[18] 지금은 큰 반발감이 없으나 당시에는 법인화로 진행될 경우 대학의 총장이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정부 인사가 이사회에 자리를 차지하기에 학생들의 의견이 총장에게 잘 반영되지 않는 점. 또한 재정 지원이 잘 안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거부감을 가졌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MOU만 체결했을 뿐 많은 반발에 부딪혀 주춤했으나, 결국 이명박 정부에서 서울대와 함께 인천대학교의 국립대학법인화를 추진시켰다.[19]

이렇게 법인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된다. 선인재단시절 인천 사립대학이 소유하고 있던 땅과 재산을 시립대 전환과 함께 인천시가 모두 가져갔는데, 시가 국립대를 추진하면서 기존 인천대의 재산은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약속했던 시의 재정 지원도 없었으며 국가에서는 국립대에 들어가는 재정을 줄이기 위해 국립대 법인화를 추진했으니, 이 사이에서 인천대는 재정지원 면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대학교 국립대법인 전환 과정 참고.

당시 법인화 과정에서 정부는 5년간(2018년 중순까지) 출연금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 공백기 동안 원래 인천시에서 주기로 한 지원 금액도 받지 못해서 큰 발전을 이룰만한 돈을 사용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재정적 문제는 거의 해결된 상황이며[20] 대학 사정이 안정화되면서 인천대가 자체적으로 버는 돈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게다가 현재 재정안정성에 대해서는 정부 출연금 및 보조금으로 명시된 몇 국립대학교와 비교했을 때 법인치고 나쁘지 않다.[21]


[1] 대략적 내용은 인천대학교/제물포캠퍼스 문서 참조.[2] 무려 79년도 당시의 61억이다.[3] 당시 교육부[4] “학기 중에, 그것도 대낮에 체육관에서 학생들이(백선엽이 포섭한 호교회 학생들) 못이 박힌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서 체육관에 들어가려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 학생도 있었고, 항의하고 대응하는 예비역들도 있었지만 갑자기 나와서 무자비하게 패니까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당시 폭력으로 뇌수술을 받은 학생도 있다” 당시 신입생으로 집회에 참가했던 정수영 인천대 이사의 증언이다.[5]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 6월 항쟁과 맞물렸기 때문이다.[6] 기사 하단[7] 최기선 당시 인천시장은 현 송도캠퍼스 3배에 달하는 규모인 40만평의 캠퍼스 부지를 제안하였고 논의 과정을 거쳐 50만평까지 규모가 늘어났으나 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계획이 대폭 축소되었다.[8] 기존 인천전문대학의 학과는 통합으로 소멸하게 된다. 인천전문대의 학과를 유지하지 않고 사실상 기존 인천전문대학의 입학 TO만 흡수한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기존 재학생들은 2년제인 인천재능대 편입학 또는 인천대학교 4년제 특례편입학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천전문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례편입학전형은 2014년도까지 유지된다.[9] 송도캠퍼스는 인천전문대학과의 통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후 공간부족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초 송도캠퍼스는 8000명 정도의 대학정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 건축되었는데 인천전문대학과의 통합으로 인천대학교의 대학정원은 1만명이 넘어가게 된다.[10] 이 통합으로 인천대(모집정원 2,680명)는 단번에 제주대(2,110명)보다도 크고 충북대(2,788명)와 비슷한 수준의 준대형급 국공립대학으로 자리잡게 된다.[11] 기존학과의 교직이수제도를 폐지하는 조건으로 신설되었다.[12] 원래 계획은 해양대학 신설이였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무산되었다. 이후 2018년 박남춘 인천시장이 해양전문 단과대학 신설을 공약했으나 역시 흐지부지.. 2009년 인천시는 6천억 원을 들여 국립해양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전남과 부산의 반발로 무산되었다.[13] 시는 재정난을 이유로 인천대와 인천전문대를 통합하여, 두 시립대를 동시에 유지하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고, 90년대 송도 신도시 계획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인천대를 송도로 이전하려고 했다. 인천대 재물포 캠퍼스의 위치가 인천의 번화가기 때문에 반대 의견이 컸다.[14] 처음 시가 제안한 캠퍼스 이전 예정지 규모는 40만평에서 한 때 50만 평까지 갔었으나 IMF로 인해 축소되었다.[15] 현재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가 있는 위치이다.[16] 2003년부터 국립화 논의가 시작되었다.[17] 수도권정비계획법의 적용을 받아 대학정원 제한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의과대학 등 신규 단과대학 설립을 염두에 둔 사전정지작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18] 대학 민영화라고 생각하면 된다.[19] 이명박 정부는 모든 국립대의 법인화를 계획했었다.[20] 2019년부터 정부 지원금이 들어온다. 사실 인천대가 국립화 된 초창기보다 요즘이 더 활발히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도 있다. 총장이슈를 제외하고도 국립화 초기에 돈이 아예 없었으니 발전할 수 있을리가.. 만약 국립대 전환 초기에 지원을 제대로 받았더라면 지금의 위상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21] 2023년 기준 인천대학교 출연금 및 보조금 규모 152,157,000,000(1500억) 규모 2023 인천대학교 재무제표, 부산대학교 186,934,951,000(1800억) 규모 2023 부산대학교 재무제표, 경북대학교 220,592,518,000 (2200억) 규모 2023 경북대학교 재무제표 시설확충비 등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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