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 정벌 林胡征伐 Conquest of Linhu | ||
시기 | 기원전 343년 | |
장소 | 임호 세력 구원(九原)-운중(雲中) 일대 (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呼和浩特 市) 일대) | |
원인 | 돈황 전투의 여파로 인한 임호-누번 간 충돌 격화, 누번 지원비용 증대로 인한 조선의 부담감 | |
교전국 | 임호林胡 | 조선朝鮮 누번樓煩 |
지휘관 | 임호왕† | 공자 조옹(趙雍) 하관대부 겸 별부사마 고정(高町)[1] 별부사마 곽구(郭救)[2] 누번 대족장 |
병력 | 9천여 명+@[3] | 3만 2천 1백여 명[4] |
피해 | 3천여 명 사상, 3천 6백여 명+@ 투항 | 피해규모 불명(미미한 수준) |
결과 | 임호의 멸망, 임호왕 전사, 조선의 기미부주 설치 | |
영향 | 조선-누번 갈등의 불씨 누번 멸망에 영향 조옹의 군부 주요인사화 조선-초원 간 상호작용 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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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동호 영향권에서 이탈, 흉노 및 동월지와 공조하며 누번과 각축을 벌이던 임호를 조선이 누번과 함께 멸망시켰다. 초원의 일에 조선의 영향력과 개입이 상호 증대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지도 링크:
2. 배경
2.1. 초원의 상황
기원전 348년 거듭되는 세력 약화에 실망한 좌대당호(左大當戶)[5] 아무로가 기병 6천여 명 및 그 일족을 데리고 조선에 귀부할정도로 몰락해가던 흉노였지만, 이들은 상군 월지(동월지) 및 임호와 연합해 월지 주류파를 상대로 치른 기원전 346년의 돈황 전투 및 이듬해 출병한 동호의 간섭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지역을 장악하면서 재흥에 성공하였다. 산하에 오손, 의거, 서월지, 동월지, 임호 등을 두고, 서쪽으로는 하서회랑, 동쪽으로는 오르도스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서초원의 패자로 부활한 것이다. 갓 세력을 확대한 흉노와 장거리 원정에 부담감을 느낀 동호 모두 숨고르기에 들어가면서 양측의 대립은 일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이런 거시적인 형세와는 별개로 임호-누번 경계에서는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다.임호는 본래 누번과 함께 동호 영향권의 세력으로 누번과 친선하며 서쪽의 인접 세력이자 월지 영향권의 일원인 상군 월지(동월지)와 다투는 사이였다. 그러나 돈황 전투를 전후하여 이루어진 관계 재정립으로 흉노, 동월지, 임호가 한 편이 되면서 임호는 동월지와 관계를 개선한 대신, 동호 산하에 남은 누번과는 이전까지의 친선이 적대관계로 바뀐 것. 이에 따라 임호와 누번 사이에는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2.2. 조선의 사정
조선은 인근의 초원 부족들과 관시를 통해 우호 관계를 맺어왔다. 일례로 연나라 정벌 이후엔 최강국 위나라와 앞에서는 친선하며 뒤로는 흉노를 이용해 견제하였다. 누번의 경우 조나라의 사주를 받아 조선 변경을 기습에 성공하였는데도 제대로 습격하지 않고 오히려 배후에 대한 힌트를 남기기까지 할 정도였다.이는 장기간에 걸친 관시를 통해 초원 부족들과 조선이 상호 신용을 쌓으면서 양측 모두 이득을 보는 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초원 부족들은 관시를 통해 식량, 소금 등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었고, 또한 지배층이 하사용 또는 권위과시용으로 쓸 사치품 역시 들여올 수 있었다. 조선은 관시를 통해 변경의 안전을 확보하고 군마, 기타 가축, 모피, 서역산 사치품 등을 수급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들을 수 있는 서쪽(특히 진나라)의 소식이나 초원 부족들과의 친선관계 등은 중원 열국과의 관계에서 무형의 자산으로 기능하였다.
문제는 이 시기 조선의 상황이었다. 조선은 제나라의 중원 패권 장악에 순응하며 내부적으로 요하도로 공사, 안문관 설치, 문자나 도량형과 같은 제도 정비 및 중앙통제 강화 등 각종 대사업을 동시에 벌여나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누번에 지원해야 하는 물자를 관시가 위치한 대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하북의 조선 본령에 추가 지원을 요구할 정도로 늘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번에 대한 지원을 줄이거나 현상유지하자니, 그러다가 누번이 임호에 패해 흡수되거나 견디다 못해 칼끝을 돌리면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 된다는 우려가 불거져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의견을 낸 것은 공자 조옹이었다. 가문의 영지가 주요 관시가 이루어지는 지역 중 하나인 대 땅에 위치해 초원 사정에 밝았던 그는 '누번과 연계해 임호를 토벌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누번 지원을 계속할 수 없다면, 원인이 되는 임호를 없애버리면 된다는 논리였다.
상황을 심사숙고한 조선 조정은 조옹의 의견을 받아들여 임호 정벌을 결의한다. 당분간 중원 쪽으로 군사력을 투사할 일은 없다는 전제 하에, 대군 사병에 일부 정예기병을 지원하고 안문관 공사 중이던 공병대를 일부 차출하는 수준이면, 기존의 여러 대공사와 임호 정벌을 병행할 예산이 나온다는 게 그들의 계산이었다.
3. 전쟁의 전개
3.1. 양동작전, 시작
조선군은 조옹의 사병인 대군 기병 7,100여 명, 고정이 이끄는 중앙군 기병 5,000여 명, 곽구 휘하의 보병대(공병대) 10,000여 명을 동원하였고, 누번군 1만의 지원을 받았다. 총 32,100여 명이니 누번과 비슷한 동원력의 임호군 전력의 3배, 보병 빼고 기병만 계산해도 2배가 넘는 압도적 우위였지만 대신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조건이 붙은 상황이었다.보병대의 경우 비축된 보급물자 상 활동기한은 최대 5개월이었고, 계속되는 재정지출 확대가 싫어서 출병한 만큼 이번 출병에서 임호를 확실하게 짓밟아야 했다. 즉 제한 시간 내에 적을 회생 불가 상태로 만드는 결정적 승리가 필요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이 택한 건 양동 작전이었다. 조옹이 누번군과 함께 임호 영역 동쪽에서 임호군 주력을 유인하면, 고정과 곽구가 그 사이 안문관에서 북상, 주력이 빠져나간 임호 영역을 빈집털이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임호군 주력이 눈치채고 복귀를 시도하면 조옹이 추격해 꼬리를 물어뜯고 너덜너덜해진 그들을 고정과 곽구가 마무리, 반대로 눈치채지 못한다면 고정과 곽구가 빈집털이를 끝내고 동진해서 적을 앞뒤로 포위하는 것으로 섬멸 완료.
이 계획을 입안한 것은 고정이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은...
조옹: - 너도 마음에 들고 네 생각도 마음에 들어. 그걸로 가도록 하지. 다만, 네가 오기 전에 이겨버려도 큰 상관은 없는 거겠지?
고정: 그게 가능하다면, 아무쪼록!
고정: 그게 가능하다면, 아무쪼록!
"죄다 호전광들뿐이야! 이 시대의 북방민족들은 망했어!(착란)"
- 어장주(진행자) 왈(曰).
- 어장주(진행자) 왈(曰).
3.2. 천리 밖을 내다보다
계획은 술술 풀려나갔다. 조옹의 대군 7천여명과 누번군 1만이 임호 동쪽 변경에서 출몰하자 임호 측은 긁어모은 주력 9천을 전부 이쪽에 투입하였다. 그래도 조선군 측 전력이 2배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조옹은 이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면 임호 측이 유인에 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누번군도 멀찍이 떨어뜨려 숨겨놓고 대군만으로 유인 작업에 들어간다.임호군 주력이 이렇게 조옹과의 숨바꼭질을 막 시작할 무렵, 빈집털이 역할을 맡은 고정과 곽구는...
이미 임호령 운중 일대의 제압을 완료하고 구원 일대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곽구의 보병대 속도에 맞춰서 행군하면서도, 고정이 조옹의 유인과 임호군의 출병 타이밍 예측을 완벽하게 해 낸 덕에 이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른 도착이 가능했던 것(...) 여기에 정탐하러 보낸 척후가 돌아오기도 전에, '가는 길에 접선해서 보고를 들으면 된다'면서 출병을 시작하는 등 상식을 벗어난 파천황스러운 행보 역시 한몫했다. 실로 적의 수준을 꿰뚫어 본 천재성에 그에 기반한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자기확신이 더해진 결과물이라 할 만 했다.
아군도 혀를 내두르는 마당이니 주력군도 빠져나간 운중군 일대의 임호 부족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조선군에 전부 패닉에 빠져들었다. 결국 도주할 기회조차 놓친 이들은 제대로 조직적인 대응 한 번 못 해보고 바로 항복하거나, 별 피해도 주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는 행군 일정을 계획한 고정 스스로가 상정한 수준조차 뛰어넘는 대성과였다.
3.3. "적장, 물리쳤다!"
고정과 곽구가 이렇듯 병귀신속(兵貴神速)[6]을 증명하는 사이, 임호왕을 상대로 시간을 끌던 조옹 역시 스스로의 재능을 증명하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멧돼지처럼 덤벼드는 임호왕을 완벽하게 유인, 누번군 1만과 함께 적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 것. 전투는 완벽한 포위섬멸진의 형태로 진행되었고, 조옹은 그 와중에 무쌍까지 찍으며 스스로의 전략안, 통솔력에 더해 일신의 무력까지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무쌍의 마무리는 무려 임호왕과의 일기토. 조옹의 괴물같은 무력에 당황한 임호왕은 '자신을 죽이면 분노한 나머지 부족원들에 의해 큰 후환을 맞이할 것'이라 협박했지만, 애초에 그런 협박이 먹힐 상대면 귀찮게 여기까지 출정할 일도 없었다. 조옹은 그 '후환'은 박살나고 있거나 이미 박살났을 거라 코웃음치고 단칼에 임호왕의 목을 베었다. 임호군의 33%가 전사, 40%가 투항한 조선-누번 연합군의 대승이었다.3.4. 충격과 공포, 4개월만에 끝난 전쟁
이제 남은 것은 구원 일대의 임호 부족들. 그러나 조선에 가까운 운중 일대의 부족들도 패닉에 빠져 순식간에 무너졌는데 더 멀리 있던 이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운중 일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충격까지 더해져 바로 고정과 곽구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 조선군은 임호 전역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전쟁의 시작부터 조옹과 고정이 양 방면의 정리를 모두 끝낸 이 시점까지 걸린 기간은 겨우 4개월,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였다. 특히 곽구가 이끄는 보병대의 보급 여력이 최대 5개월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싸우고서도 보병들에게 1달은 더 보급할 여력이 있던 셈이었다.4. 결말
임호의 멸망직전까지 흉노, 상군 월지(동월지)와 연합해 돈황 전투에 참전하는 등 기세를 올린 임호였지만, 단일 세력으로는 누번과 아옹다옹하는 1만 남짓하는 수준인 상황에서 조선이란 덩치가 끼어들자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다. 다만 임호왕이 적을 발견하자마자 근거지를 비우다시피하며 뛰쳐나가지 않고 신중하게 반년 이상 시간을 끄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임호는 생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보병대의 보급 한계를 유도해 돌려보내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돈황에서 공투했던 흉노나 동월지의 조력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멸망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임호왕의 식견이 지나치게 짧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평가일 수도 있다. 이전 반 세기 가까이 조선은 특정 부족에게 관시를 확대하거나 물자를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 지원은 했어도 초원의 일에 자신들의 병력을 움직여가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후 소식을 접한 흉노와 동호 등 초원의 대세력들의 반응 역시 그러하였다.
5. 전후처리
5.1. 조선, 기미부주를 설치하다
정복자가 된 조선은 구 임호령에 대해 3가지 조치를 실시하였다.1) 구 임호령의 기미부주화
2) 구 임호령 동부 영토 일부를 이번 싸움을 지원해준 누번에 할양
3) 신영토와 인접한 동월지에 사절 파견해 안심시키기
1번은 정복지의 빠른 안정화를 위한 조치, 2번은 동맹에 대한 사례, 3번은 안정화 기간 동안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동월지에 보낸 서신은 싸움이 두려워서 평화를 유지하려는 게 아니란 걸 강조하려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써 있었다.
아래는 유목계 출신의 조선 사신이 동월지에 전달한 서신의 내용이다.[7]
조선국(朝鮮國)의 가한[8]은 월지의 추장과 백성들에게 말한다.
과인(寡人)이 이번에 임호를 정벌한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임호의 군신(君臣)이 먼저 경계를 침범하여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과인은 그들과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임호에 있다.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안심하고 편히 양과 말을 먹일 것이요, 망령되어 지레 짐작하여 싸움을 걸어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과인(寡人)이 이번에 임호를 정벌한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임호의 군신(君臣)이 먼저 경계를 침범하여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과인은 그들과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임호에 있다.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안심하고 편히 양과 말을 먹일 것이요, 망령되어 지레 짐작하여 싸움을 걸어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이외에 기미부주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해프닝(?)도 발생하였다. 임호인들은 무쌍을 펼치며 자신들의 왕(가한)을 죽인 공자 조옹 역시 조선의 가한이나 그 후계자 쯤 되지 않나 지레짐작하였다. 이런 착각을 전해 들은 조옹은 조선군에 멸망한 조나라 왕족 출신이란 태생 문제도 있겠다, 펄쩍 뛰면서 "난 조선에서 일개 나안(만인장)에 불과하다"고 해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조선에는 총 40만이란 어마어마한 대군이 있다"는 고정의 (기병-보병 차이, 동원 한계 등을 무시한) 프로파간다성 발언이 겹쳐진 결과, 임호인들은 '조선에는 저런 괴물이 최소 40명은 있다고?'란 오해를 하고 만다. 지레 겁먹은 이들은 납작 엎드려 조선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선군은 굳이 그 오해를 풀어주지 않고 활용하여 신영토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5.2. 흉노의 반응
충격 + 반신반의관시 등으로 초원 부족들과 꾸준히 교류해오긴 했지만, 무력 투사는 하지 않고 근 50여 년을 물주 노릇만 하던 조선이 움직인 것은 흉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조선이 적대세력인 동호의 우방이란 점과 4달이란 짧은 시간에 정복을 끝낸 강군을 가지고 있단 사실은 조선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다만 조선이 바로 흉노 팩션의 일원인 동월지에 사신을 보내 입장을 설명하며 (다소 뻣뻣하지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점, 누번에 떼 준 일부 영토를 제외하면 구 임호령의 부족들을 보존한 점, 점령지에 중원식 통치를 시도하지 않고 기미부주의 형태로 초원의 방식을 존중한 점 등을 고려해 바로 공격하기 보다는 정보 수집 및 동호 견제에 더 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조선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5.3. 동호의 반응
환영 + 오해 + 잔머리동호는 조선의 임호 정벌에 열광적인 환호로 응답하였다. 우호관계이자 든든한 물주인 조선이 배신자 임호를 응징했다고는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나치게 열렬한 반응이라 조선측에서 당혹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후 사정을 알고 보니, 동호 측이 이번 싸움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받아들여서 생긴 일이었다. 50여년 만에 조선이 초원 일에 무력 개입했다는 건, 초원의 패권을 둔 동호와 흉노의 결전에 자신들 편으로 전면참전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냐고 해석한 것.
덕분에 조선은 '그렇게까지 전면전으로 일을 키울 생각은 없다'며 오해를 푸느라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다만 동호 측은 오해가 풀린 이후에도 '전면전 상황이 되면 조선이 10만 대군으로 동호를 지원할 것'이라며 의도적인 언론플레이를 전개, 흉노의 동진을 억제하는데 쏠쏠하게 써먹었다.
참 또는 거짓 여부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면 흉노 역시 대세력인 만큼 빠르게 대응 전략을 세울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 어려운 상황이란 점이 효과를 배가했다. 조선이 동월지에 보낸 사신이 전달한 유화적(?) 메시지와 동호의 언플 내용이 상반되었던 데다, 흉노 입장에서는 둘다 곧이곧대로 믿기도, 그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자연히 이들은 반신반의 상태로 뭐가 진실인지 정보수집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호의 잔머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5.4. 북방절도사 조옹?
정벌이 대성공으로 끝난 만큼, 장수들의 논공행상이 이뤄지는 것도 당연했다. 고정은 하관상경[9]으로 승진, 곽구는 정서장군으로 승진에 안문관 완공 시 사방장군 승진을 약속받았다. 문제는 차기 대군인 조옹에게 어떤 직위를 내리냐였는데, 내려진 은상은 실로 파격적이었다.1) 군정계인 하관 중외대부 직위.
2) 군령계인 진북장군의 직을 겸임.
3) 사병인 대군의 병력 양성을 국고에서 지원.
4) 수도 맥성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 병력까지 휘하로.
5) 유사시에는 허가를 받고 진북장군부에서 자체 징병까지 가능.
한마디로 직위만 사진장군/사정장군 급이지 실권은 사방장군을 넘어 위장군에 준하는 사실상의 북방절도사였다. 어장주(진행자)가 '마음을 잘못 먹으면 조선 자체가 위험해지게 되는군요. 거용관은 프리패스니까 결국 위장군[10] 휘하 병력이랑 야전 한판해서 이기면 바로 맥성 점령각 아닌가(착란)'고 할 정도로 권한을 몰아준 것.
이는 여전히 심상찮은 북방 상황과 조선 공실에서 조씨들에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11]이 종합된 결과였지만, 우대받은 본인조차 '이렇게 퍼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어도 되나?'하고 다른 중신들이 최소한의 견제조치조차 없다며 염려하면서 불안의 씨앗이 된다.
다만 이후 북방에서 한동안 뒤숭숭한 정세가 계속되면서, 이런 내부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북방문제 대처에 있어서는 훌륭한 결정이었다는 게 드러나게 된다.
5.5. 누번, 임호의 뒤를 따르다
변경을 침범하던 임호가 멸망하고 조선이 그 영토 일부를 떼어주기까지 한 이상, 누번은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정상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전후처리의 여파로 누번까지 4년 뒤인 기원전 339년 멸망하게 된다. 조선의 임호 정벌 목적 중 하나가 우호관계인 누번을 안정시키는 거였단 걸 감안하면 얄궂은 일이었다.문제의 원인은 조선의 기미부주 설치였다. 임호 부족들의 기존 체제를 용인하면서 그들에게 조선의 관작을 내리고, 일부 핵심지역에만 조선군을 주둔하는 식의 관대한 조치는 누번으로 하여금 사실상 임호가 그대로 보존된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 것이다. 이는 누번이 기존에 쌓인 악감정을 계속 구 임호 부족들 상대로 화풀이하게 만들었다.
대군의 조옹은 당연히 이제 저들은 임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며 이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누번은 이런 '형식'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군이나 조선인들은 안 건드리고 다만 임호와의 묵은 원한을 청산할 뿐'이라고 반응하였다. 여기에 동월지까지 부족 연합체란 특성 때문에 수뇌부끼리 유화적으로 나오는 것과 별개로 일선 부족 수준에서 일탈행위를 벌여 약탈을 시도하고는 하니 기미부주 안정화는 요원하기만 했다.
결국 조선은 '임호 쪽을 외교적으로 해결해주면 동월지 쪽은 대군에서 적절히 무력대응할 수 있다'는 조옹의 간언을 따라, 누번의 상전인 동호 쪽에 사신을 보내 누번을 통제해달라 부탁하기로 한다. 조선 사신은 동호의 칸을 만나 '누번의 횡포로 북변이 불안해졌다. 그래서 군사비 증강이 필요해진 반면, 무역 호응은 떨어져 이대로라면 부득이하게 관시 규모를 축소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설득하였다.[12] 관시 덕을 크게 보던 동호 칸은 앞뒤가리지 않고 분기탱천, 누번에 자제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누번은 이를 거부한다! 세력차가 어마어마한데 무슨 깡인가 싶었지만, 이들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동호 내에서 칸이 반농반목을 장려하는 것으로 전체의 1/3정도인 순수유목 지향 부족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 전사가 농경을 가까이하면 야성을 잃는다거나, 농사는 사정이 나쁠 때의 궁여지책이지 초원의 늑대들이 오래 할 일은 못 된다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의지해 문제를 쿠릴타이로 가져가려던 누번이었지만, 정작 이들은 누번을 토벌하라는 칸의 명령에 복종해 누번부터 토벌하고 농사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다. 한배를 탄 사이 아니었냐며 아연실색한 누번 대족장에게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바보냐. 우리는 '칸의 쿠릴타이에 왔다'고."
"막말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쿠릴타이에서의 제의가 아니라 방심한 상태에서 통수를 치는 게 제일 확실하겠지, 안 그래?"
"아무도 거기까지 나가기를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어.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란 이야기지."
"막말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쿠릴타이에서의 제의가 아니라 방심한 상태에서 통수를 치는 게 제일 확실하겠지, 안 그래?"
"아무도 거기까지 나가기를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어.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란 이야기지."
기원전 339년, 누번은 순식간에 동호에 의해 멸망당했고, 그 땅과 유민들은 이후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해 친조선계 동호 부족들에 나뉘어 흡수되었다. 그리고 농경 문제는 일단 각 부족의 재량권을 존중하는 것으로 일시 봉합되었다.
[1] 가상인물[2] 가상인물[3] 소규모의 근거지 수비병력(인원수 미상)[4] 대군 7천 1백여 명, 고정군 5천여 명, 안문관 주둔군 1만여 명, 누번군 1만여 명[5] 흉노의 관직명. 선우 - 좌/우현왕 - 좌/우녹려왕 - 좌/우대장 - 좌/우도위 다음의 10위권 서열이다. 선우가 군주의 호칭, 좌현왕이 차기 군주를 위한 직책임을 고려하면 신하들 중 8위의 고위직.[6]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신속함이 중요하다.[7]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 숭덕제의 유시를 수정해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 링크: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anchor/1543940944/580/588/.[8] 호칭을 중원식인 '후'로 할지 초원식인 '가한'으로 할 지 다이스를 굴려 정해진 표현이다. 작중 조선의 외교 예법이 중원과는 중원식으로, 초원과는 초원식으로 상대하는 방식이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9] 당시 조선 최고위직인 삼공-육경 중 육경의 일원, 군정 담당[10] 현재의 수도방위사령관과 유사한 역할[11] 세후 기식 시절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반란을 염려해 그 국군이던 조씨 가문을 현재 영지인 북쪽 변경의 대로 내몰았다. 당시 태자였던 유후 기이는 지나치게 잔혹하다며 이를 탐탁찮아했고,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였던 대군 조어를 자식인 정왕 기토로 하여금 형제자매처럼 대우하게 하였다. 그래서 공자 조옹 역시 기토의 자식인 장왕 기유와 사촌처럼 어울리며 자라났다.[12] 실제로는 문제가 생긴 건 구 임호 영역이라 관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다만 기미부주가 설치된 이상 구 임호 지역도 이제 조선 북변이 된 건 맞았고, 상황이 장기화되면 군사 증강을 '언젠가'하게 될 수 밖에 없으므로 현실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방식으로 과장해 표현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