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1대 하남독군 | ||
정체 | 趙倜 | |
간체 | 赵倜 | |
한국식 독음 | 조척 | |
영문 | Zhao Ti | |
자 | 주인(周人) | |
출생 | 1871년 | |
청나라 하남성 여남현 | ||
사망 | 1933년 (향년 62세) | |
중화민국 베이핑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천진무비학당 | |
직업 | 정치가,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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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하남성의 토착군벌로 오랜 세월 하남성을 지배했으나 펑위샹에게 축출되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71년 하남성 여남에서 태어났다. 천진무비학당 졸업 이후 군에 들어가 기병관대, 통령, 의군익장을 거쳤고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여 총병에 이르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진남, 상서에 주둔하면서 혁명군과 교전하였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하남진수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하남호군사가 되었다. 1914년 1월 하남독리 장진방이 백랑기의 진압에 무능함을 보이자 위안스카이는 장진방을 해임시킨 후 육군총장 돤치루이를 하남도독에 임명하여 백랑기의를 진압하게 했다. 이때 자오티는 상남초비독판에 임명, 백랑기의 진압을 맡았다. 백랑기의 진압 이후 자오티는 8월에 하남독리 겸 덕무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토비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병력을 확충하였다.1915년 위안스카이가 제제운동을 벌이자 9월에 13성의 장관과 연명하여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지원하였고 12월 12일 홍헌제제가 단행되자 1등 후작에 봉해졌다. 자오티는 제제에 적극 호응하여 하남성의 모든 중학교와 소학교에서 공화라는 글자를 지우고 민국을 홍헌으로 대체할 것을 지시했다. 12월 25일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리례쥔이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통전을 보내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탕지야오 등이 다시 공화의 명의를 이용하는 것은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난을 일으키기 위함이니 이는 바로 공화가 끼치는 해독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더더욱 충분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중국에 다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반드시 깨끗이 없애버려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
하지만 호국군의 기세가 커져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고 사망하자 즉각 공화정 지지자로 돌아섰다. 1916년 7월 독리를 독군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자오티는 하남독군으로 유임되었다.
2.2. 부원지쟁과 장훈복벽
1916년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계임하고 돤치루이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된 이후 두 사람 간의 정쟁인 부원지쟁이 벌어졌는데 자오티는 돤치루이와 당시 협력관계에 있던 장강순열사 장쉰의 쉬저우 회의에 참여, 돤치루이 지지를 천명하였고 이 때문에 후일에 복벽 지지자로 분류되기도 했고 1917년 5월 돤치루이가 면직되자 극렬히 반발, 중앙과의 관계단절을 선포하고 리위안훙의 하야를 촉구했다.그런데 1917년 7월 1일 장쉰이 장훈복벽을 단행하자 하남성장 전문열과 함께 진수사, 도윤들에게 복벽 반대의 뜻을 밝히고 군민에게 공화를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장쉰 토벌을 통전, 상동진수사 보덕전(寶德全)을 상동총사령에 임명하여 관할 지역의 철로를 경계하게 하는 한편 쉬저우에 주둔한 장쉰의 정무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또한 7월 10일 카이펑 등 주요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장쉰 토벌에 나섰다. 7월 12일 장쉰은 토벌되었고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임성, 7월 17일에 다시 내각을 조각함으로 돤치루이 내각이 재출범하였다. 이후 자오티는 하남성장을 겸하게 되었다.
2.3. 호법전쟁과 안직전쟁
1920년 호남에 주둔한 우페이푸의 군대가 북상하는 과정에서 돤치루이가 자오티를 해임하고 자신의 처남이자 측근인 우광신을 신임 하남독군에 임명하여 우페이푸를 저지하려 하자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력히 맞섰고 이로 인하여 하남독군 교체 파동이 일어났다. 토비 제압을 위한 병력을 우광신 견제를 위해 이동시키는 바람에 산동독군 톈중위가 반발하는 등 일부 난관을 겪기도 하였으나 하남성 출신인 대총통 쉬스창과 직예독군 차오쿤의 지원으로 자오티는 하남독군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후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한 8성 동맹에 가입했다.하지만 1920년 6월 8일 정저우에 우페이푸가 나타나자 우페이푸 저지를 위해 돤치루이가 변방군 1,3사단을 직접 이끌고 섬서로 출병하여 내친 김에 자오티까지 제거하려 들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자오티는 1920년 7월에 발발한 안직전쟁에 참가, 7월 12일과 7월 19일에 안휘파를 공격하는 통전을 발표하고 동생 조걸을 시켜 호북독군 왕잔위안과 합작하여 7월 20일에 우광신 부대를 공격하여 해산시키게 했다. 또한 자오티 자신도 우페이푸와 함께 낙양에서 병방군 2개 여단을 포위하여 해산시켜 안직전쟁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직노예순열부사로 낙양에 주둔하여 대군을 지휘하는 우페이푸의 존재는 자오티에게 큰 위협이었다. 1921년 4월, 전 하남육군 1사단장이었던 성진이 사단장에서 해임되자 불만을 품고 16혼성여단장 펑위샹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자오티는 장쭤린의 도움을 받아 이를 신속히 진압했고 이후 직예파에게 섬서독군직을 양보하면서 사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성진은 자살했고 자오티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반란을 지원한 직예파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2.4. 1차 직봉전쟁에서 국민혁명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생하자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불만이 있던 자오티는 초반에는 장쭤린이 내세운 국무총리 량스이 하야를 요구하는 등 직예군벌의 편에 서는 척 했지만 이내 장쭤린의 봉천군벌을 지원하여 직예군벌에 맞섰다. 자오티는 직계가 봉계를 상대하느라 후방이 빈 틈을 타 동생 조걸에게 군대를 이끌고 정저우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고 정저우를 수비하던 군무 포덕전이 호응하여 정저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펑위샹이 포덕전과 자오티를 모두 격파하고 정저우를 사수하여 자오티는 몸만 건져 상하이로 달아나야 했다. 포덕전은 차오쿤과 우페이푸와 친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처벌받기는 커녕 정저우의 수비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펑위샹은 그를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며 총살시켰다. 이후 5월 14일 펑위샹이 하남독군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하남성의 주인이 되었다.자오티는 이후 봉천군벌에 의탁하여 봉군고급자문이 되었고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일어나자 봉천군과 함께 하남성 카이펑으로 진주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패하였다.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베이핑에 거주하다가 1933년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民國初 地域(小)軍閥의 운명 : 河南 趙倜·馮玉祥政權(1914~1922年)을 중심으로, 손승회, 중국근현대사연구 19권,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