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의주(張儀柱) |
이명 | 돈후발(敦厚發) |
생몰 | 1888년 6월 25일 ~ 1945년 9월 9일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 석삼리 |
사망지 | 평안남도 강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의주는 188년 6월 25일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 석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평원군에 양조장을 설치하고 만주 안동현에 주택을 구입하여 연락처를 마련했다. 이후 1919년 초 이탁이 27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을 처단하고자 대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자, 그는 대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3.1 운동이 발발하자 평원군 한천면 감팔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동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안동현으로 망명했다. 1919년 10월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비서장을 맡았으며, 1920년 3월부터 임시정부 내 군무부 군사편찬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20년 4월, 장의주는 이탁이 자신의 동생 이석(李錫)을 체포하는 데 일조한 밀정 김병헌(金秉憲)을 처단하는 걸 도와줬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했고, 1934년경 안동현으로 가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8.15 광복 때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광복 후 며칠이 지난 1945년 9월 9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장의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