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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1896)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장태수(張台秀)
성삼(星三)
본관 덕수 장씨[1]
출생 1896년 7월 12일[2]
경기도 풍덕군 군북면 풍천리
(현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
사망 1974년 8월 24일
개성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장경범은 그의 9촌 조카, 즉 삼종질(三從姪)이다.[3]

2. 생애

장태수는 1896년 7월 12일 경기도 풍덕군 군북면 풍천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에서 아버지 장순행(張淳行)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치관(李致寬)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같은 마을에 사는 장경범(張慶範), 김순흥(金順興), 유기윤 등과 함께 전국에서 일어나는 3.1 운동에 호응하기로 결의하고 상도면과 대성면 풍덕리의 주민 3백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헌병분견대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끊는 등 일련의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전신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항소하여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전신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판결에도 불복하여 다시 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했지만 10월 16일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개성에서 조용히 살았고 1974년 8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태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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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감공파 24세 수(秀) 항렬.[2] 1919년 판결문과 덕수장씨족보(갑인보) 소감공파 866쪽에는 7월 2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족보상으로는 15촌 지간이지만 장경범의 아버지 장현수의 증조부 장세룡(張世龍)은 본래 장태수의 증조부 장세화(張世華)의 맏형이나 장세화가 재종숙인 장상협(張相協)에 입양되어 8촌 지간으로 바뀐 것이며, 결과적으로 15촌 지간으로 멀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