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한성(張寒星) |
이명 | 장지호(張志浩), 장한성(張漢成) |
생몰 | 1891년 ~ 1931년 3월 13일 |
출생지 | 평안남도 진남포 비석리 |
사망지 | 길림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한성은 1891년생이며 평안남도 진남포 비석리 출신이다. 그는 국내에서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되자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자 만주로 피신했고, 1916년 연길현 상관도구의 영생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 연락 차 입국했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고려혁명군 사령부 대표로 참가했으며, 그해 2월 5일에는 제4차 회의에서 문시환(文時煥)·강일(姜逸) 등 7인의 노동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1929년 9월 27일에는 현정경·현익철 등이 중심이 되어 남만지역에서 조직한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제1회 중앙의회 선거에서 외무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때 서울에서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자, 그는 국민부 행동대원 20여 명과 함게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일제는 전국에 비상경계를 펴고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으며, 그는 주요 수배인물로 계속 추적을 당하였다.한편 그는 동만지방 독립군 행동대장으로서 북간도 일대의 지방조직 및 군자금 모집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연길현 숭례향 옹성랍자에서 독립군 체포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일본 경찰 순사보 츠보이 미요지(坪井三代治)를 처단했다.
1930년 2월 19일 일제의 강력한 항의에 시달리던 중국 치안당국이 장한성을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귀화 증명서를 소지한 것을 구실로 일본 경찰에 인도되지 않았다. 그 후 중국 길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1년 3월 13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한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