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8 03:39:50

장화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11월 29일
평안도 삭주도호부 하남면 남장동 254번지
(현 평안북도 대관군 남장리)
사망 1945년 6월 16일 (향년 53세)
중화민국 산시성
본관 거창 장씨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1년 11월 29일 평안도 삭주도호부 하남면 남장동 254번지(현 평안북도 대관군 남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읍내 서문 밖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창성군에 연통제 임시군청을 개설하였고, 1920년 1월 12일 창성군 경감(警監)으로 임명되어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창성군의 각 관공서 직원들에게 독립을 쟁취하는 데 적극 협조할 것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의 밀정 이용익의 밀고로 연통제 조직이 드러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평양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20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이후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되었다.

출옥 후 1927년 4월 동아일보사 창성지국 기자로 임용되었다.[1] 1930년 6월 4일 당시 창성군 전창면 신평리 207번지[2]에 거주하고 있었다.[3]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화민국 산시성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아들 장동근(1941년생)은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누나 둘과 함께 살았다. 1.4 후퇴경상남도 부산시로 피난하여 2015년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1.4 후퇴 때 어머니와 누나 둘만 피난하는 바람에 친척도 없고, 누나들마저 요양병원서울특별시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또 부인과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고 1995년 이혼하였다. 홀어머니께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식 셋을 키워 대학교 진학까지는 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고혈압당뇨 등을 앓으며 홀로 앵글에 박스를 얹어 만든 간이침대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4]

[1] 1927년 4월 24일 동아일보 기사[2]창성군 신평리[3] 1930년 7월 10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1055호[4] 2015년 8월 13일 부산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