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5:07:14

찐민테

정명세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누가 죽였는가?
3.1. 빈쑤옌3.2. 프랑스군3.3. 오정염·오정유
4. 평가5. 사후

1. 개요

찐민테(정명세, [ruby(程,ruby=Trình)][ruby(明,ruby=Minh)][ruby(世,ruby=Thế)])는 베트남의 군인,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였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에서 등장하는 악역 '테 장군'은 아예 이름부터가 그의 이름인 만큼 그를 모티브로 했다는 의혹이 강하다. 애초에 그린 본인이 친공 성향이 강했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비판했으니만큼 생전에 미국과 사이가 좋았던 찐민테가 소설에서 좋게 나올 리가 없다.

2. 생애

떠이닌성에서 1920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까오다이교 가정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까오다이교 신자가 되었다. 까오다이교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탄압에 피해를 보았기에 프랑스에 적이었던 일본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던 때가 있었고,[1] 그 영향으로 당시 20대였던 그 역시 일본군에게서 훈련을 받았다.[2] 하지만 딱히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기보다는, 그저 까오다이교가 프랑스에게 탄압받아 일본군에게 협력한 행적에 그 역시 묻혀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 치하로 돌아갔다. 호아하오교[3]와 까오다이교의 군대는 1940년대 후반에 베트민과 손을 잡고 프랑스군에 맞써 싸우는 길을 택했으나, 1947년이 되자 베트민이 이들의 통수를 치고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의 주요 인사들을 납치하기 시작하자 반대로 반공주의로 돌아서서 프랑스와 협력해 버렸다. 찐민테는 여기에 반발해서 까오다이군을 탈퇴, 스스로의 까오다이교 민병대를 조직해서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을 상대로 맞써 싸웠다.

1950년대에 미국 정보부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까오다이교 휘하의 병력 수 전체가 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찐민테 휘하의 군대는 약 4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 내에서 급격하게 기세를 올리고 난립한 군벌들을 베트남 국민군[4]으로 묶는 과정에서, 찐민테 역시 응오딘지엠 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다른 수많은 군벌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지엠에게 아주 우호적이라고 보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3월 27일에는 결국 반공 투쟁을 더 효과적으로 하겠다면서 완전히 응오딘지엠을 지지하게 된다. 직후 그 직속 병력뿐 아니라 다른 까오다이군까지 합해 약 8000명 정도의 병력이 베트남 국민군에 합류를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응오딘지엠이 찐민테와 응우옌타인프엉 같은 군벌 지도자들에게 돈을 줬는지도 논쟁거리가 됐다. 실제로 돈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Nu-Anh Tran 교수는 찐민테에게 실제로 돈이 들어갔다면 그 액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군벌의 수장치고는 죽을 때까지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군벌 중 단 한 차례도 프랑스와 협력한 적이 없어서 프랑스에게 돈을 받았을 리도 없고, 돈을 응오딘지엠으로부터 받았어도 휘하 병력 먹여 살리기도 바쁜 수준이었을 거라고.[5]

찐민테는 1955년 5월 3일, 사이공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와중, 뒤통수에 어떤 저격수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고작 만 35세, 너무나도 때 이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3. 누가 죽였는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다. 혼란스럽던 당시 베트남국의 상황에서 그를 죽일 만한 잠재적인 적들이 너무 많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그를 죽인 범인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현 베트남 정부 역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영웅시되는 것이 그닥 달갑지 않을 테니 그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해 봤자 별로 이득이 없을 것이다. 설령 베트남이 민주화된다고 해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 데다가, 그 이후 베트남이 너무 오랫동안 혼란에 휩싸여서 진상 조사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3.1. 빈쑤옌

다음 날인 5월 4일 날 나왔던 주장이다. 빈쑤옌은 베트남 국민군뿐 아니라 테의 리엔민([ruby(聯,ruby=Liên)][ruby(盟,ruby=Minh)])과도 적대 관계였다. 당대에 흐르던 소문에 따르면, 빈쑤옌이 점거했던 프랑스제 보트에서 총알이 날아와서 테의 머리를 맞췄다고 한다.

3.2. 프랑스군

소문에 등장하는 빈쑤옌의 보트가 원래 프랑스 해군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입각한 주장이다. 테의 동료이자 부하였던 니랑(Nhị Lang)이 소개한 주장에 따르면, 사바니(Savani)라는 프랑스군이 상관이었던 샹송 장군의 복수를 위해 그를 죽였다고 했다.

3.3. 오정염·오정유

찐민테의 미망인 완시금([ruby(阮,ruby=Nguyễn)][ruby(氏,ruby=Thị)][ruby(金,ruby=Kim)])과 막내아들 찐민선이 했던 주장이다. 찐민선의 주장에 따르면, 낌은 남편의 시신에서, 언론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 달리 한 발이 아닌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죽었으며, 시신에서 탄매를 봤다고(즉 총이 아주 가까이서 발사됐다고) 한다. 따라서 정부나 언론의 공식 발표는 찐민테의 실제 죽음과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사실은 군사적인 입지가 불안했던[6] 응오딘지엠과 응오딘뉴가 찐민테를 포섭해 놓고, 후환을 막기 위해 그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상쩍은 인물 몇몇이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낌에게 찾아와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실 찐민테의 시신이 찐민선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오정유(吳廷瑈)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증거나, 오정유가 범인이 맞더라도 과연 오정염과 함께 꾸민 일인지 혹은 오정유의 독단이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오정염이 정명세를 암살했다고 가정했을 때, 오정염이 이후로 취했던 행보들은 맥락이 들어맞는다. 정명세의 연맹은 정규군에 편입되지 못했고, 까오다이교의 다른 군대들도 마찬가지로 베트남 공화국군 합류를 거부당하고 와해된다.[7] 니랑도 탄압을 피해 캄보디아로 망명한다. 다른 종교파 장군들이 숙청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다른 종교파 장군들이 미국과 별다른 협력 관계를 맺지 못한 데 비해, 찐민테의 경우 랜스데일과 친분 관계를 가지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여차하면 진짜로 응오딘지엠의 대안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 니랑은 이 설을 부정한다. 니랑 본인이 오정염 개인의 인품에 대해 의외로 높게 평가하던 건 차치하더라도, 5월 3일이면 4월 30일 혁명으로부터 고작 4일 뒤고, 이때는 아직 빈쑤옌과도 충돌 중이었을뿐더러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장군 응우옌반비가 무력화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점일 정도로 지엠의 정부가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벌일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다.

4. 평가

사실 찐민테는 스스로의 세력만 따져보면 당시 남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파 군벌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나이가 사망 당시에 고작 만 35세에 불과해서 같은 까오다이교의 응우옌타인프엉(Nguyễn Thành Phương)이나 호아하오교의 진문수([ruby(陳,ruby=Trần)][ruby(文,ruby=Văn)][ruby(帥,ruby=Soái)])에 비하면 보유한 병력도 적었다. 하지만 찐민테가 지녔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트민과 프랑스를 상대로 동시에 싸웠다는 경력과 명성 그 자체였다.[8] 그 덕분에 찐민테는 응오딘지엠과 협조하는 종교파 연립 조직인 '혁명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간부가 되었다.

이렇게 명성 있던 장군이 55년 5월에 사망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리더십의 대안 하나를 어처구니없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은 이후로 독재 체제를 완성하면서 다른 종교파 인사들이나 베트남 국민당 같은 야당 세력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나라 상황을 막장으로 몰고 갔고, 참다못해 일어난 즈엉반민이나 다른 군사 지도자들도 딱히 능력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심지어 국가 지도자 위치에 오를 만한 명성과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베트남 공화국은 스스로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결국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물론 찐민테가 55년에 죽지 않았더라도 남베트남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일단, 고작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은 권력 장악을 위해 대규모로 종교파 숙청을 단행했다. 당장 찐민테의 부하들도 약속받은 바와 달리 베트남 공화국군 편입을 거부당했듯이, 그 스스로가 살아남았더라도 종교파 숙청에 휘말려 사망했거나 응우옌타인프엉처럼 모든 힘을 몰수당하고 몰락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찐민테 본인이 죽을 때까지 매우 가난했다는 것은 테 스스로가 베트남 정규군 장군들보다 훨씬 청렴했다는 증거로도 쓰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재정적인 기반은 상당히 취약했다는 증거도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응오딘지엠을 몰아냈던 즈엉반민의 능력치가 기대 이하였고, 그 이후의 집권자들도 나을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베트민, 프랑스와 싸우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어느 정도 증명했던 찐민테의 죽음이 아쉽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살아간 삶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자기 나라에서 출신 성분에서 소수파였다는 점(찐민테는 종교, 마수드는 민족), 젊은 시절 다른 군벌의 봉기에 참여했으나 갈라서서 독립된 세력을 만들었다는 점, 뛰어난 지휘력으로 적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는 점, 젊은 나이로 요절한 뒤 그가 건국에 크게 기여한 정부가 속절없이 썩어 들어갔다가 망했다는 점 등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리엔민은 병사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해체된 반면 마수드의 세력은 명맥을 유지했고, 찐민테의 아들들은 전사했거나 망명해서 평범하게 살아간 반면 마수드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는 자기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갔다는 점은 다르다.

민족 종교 신자에다 독립운동가였고, 무공을 세운 제1세계 진영의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최덕신과도 유사한 면이 상당수 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최덕신은 오래 살아남아 외교관까지 되었고, 결정적으로 최덕신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으로 대표되는 학살 행위와 월북을 했다는 점이다.

5. 사후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어쨌건 간에 그는 남베트남에서는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던 인물이었기에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나 다리가 있었으나, 베트남 통일 이후 대부분 바뀐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몬현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남아 있다.

그의 장남 정명일([ruby(程,ruby=Trình)][ruby(明,ruby=Minh)][ruby(一,ruby=Nhật)])은 베트남 공화국 공군으로 복무했으나 전사했다. 그의 미망인과 막내아들 찐민선은 무사히 망명에 성공해서 2002년에 캐나다 퀘벡주에 살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밑의 후손들도 캐나다나 다른 서방권 국가에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1] https://www.jstor.org/stable/20071767?seq=1[2] 베트남어 위키백과 찐민테 문서에서 참조.[3] 불교에 기반한 베트남 토착 종교.[4] Vietemanese nationalist army, 훗날의 베트남 공화국군.[5] https://escholarship.org/content/qt4407j6sj/qt4407j6sj.pdf[6] 근로인위혁명당은 자체적인 군사력이랄 것이 없었다.[7] 이러한 일 때문에 힘의 공백이 생긴 떠이닌성은 베트콩의 자동문으로 전락하고 만다.[8] 물론 다른 종교파 장군들의 프랑스와의 동맹은 베트민의 배신이 그 원인이었으므로 다른 종교파들이 명분상 큰 타격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찐민테가 더 돋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