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 2000년 1월 7일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수, 역사학자. 전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역사문제연구소장, 역사비평 편집인,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2. 생애
1937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서울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1968년 사학 석사[1], 1983년 국사학 박사 학위[2]를 각각 취득했다. 2000년 1월 7일 오전 숙환으로 사망했다.추안급국안을 발굴하였으며,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을 민중운동사의 관점에서 연구한 개척자이다. 초서로 쓰여진 한문 사료의 해석에 뛰어났다. 조선후기 당쟁사가 양반 지배층만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힘과 재력을 가진 중하층민(무사, 상인, 노비 등)이 깊이 참여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내었다.
장길산에 대한 기록을 추안급국안에서 발견하고, 황석영에게 소개하고 자료를 제공하여 소설을 쓸 수 있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 역사관
그의 역사관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통해 엿볼 수 있다.세계사 발전 법칙의 보편성 속에서 각 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 발전 법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경제적 조건과 인간 주체 의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역사가 발전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의 의지다. '자본주의 이행 논쟁'에서 모리스 돕은 지배층 욕망의 확대가 생산력 발전을 이룬 것을, 에릭 홉스봄은 농민들의 저항과 집단 투쟁을 봉건제를 해체시킨 주요 요인이었다고 하는데, 후자가 타당성이 있다. 영국에서 14세기 말에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농노 해방 투쟁이 16세기 말 독일 농민전쟁보다 2세기 가량 먼저 발생하였기에 영국의 자본주의 이행이 앞섰다. 조선 후기 사회 체제 붕괴 경향은 사회경제적인 여러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분제를 질곡으로 느끼는 하층민의 신분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투쟁에 의해 실현되었다.[3]
[1] 석사 학위 논문 : 朝鮮後期(조선후기)에 있어서의 身分制(신분제) 崩壞(붕괴)에 對(대)한 一小考(일소고) : 蔚山府戶籍臺帳(울산부호적대장)을 中心(중심)으로(1968).[2] 박사 학위 논문 : 朝鮮後期(조선후기) 社會變動硏究(사회변동연구) : 肅宗朝(숙종조) 己巳(기사) 甲戌(갑술) 換局(환국)을 中心(중심)으로(1983).[3] "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