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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1932년 5월 4일 이와테현 게센군 야하기촌 (현 리쿠젠타카타시 야하기정) |
본적 | 경기도 미상 공훈전자사료관 분류: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
묘소 | 미확인 공훈전자사료관 분류: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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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2. 생애
경기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1]1926년 1월 오사카大阪니시나리노동조합西城勞動組合 사무소에서 한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자유노동단을 창립했다.[2]
같은해 6월 일본노동조합평의회日本労働組合評議会가 주최한 전국노동조합회의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洞盟 관서동맹회関西同盟會 간부 자격으로 참가했다.[3][4]
1931년 6월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서 열린 조선노동총연맹朝鮮勞動總聯盟전남병영자유노동조합대회에 참석하여 청년부장으로 선출되었다.[5][6]
1932년 4월 이와테현岩手縣 게센군氣仙郡 야하기촌失作村의 오후나토선 철도 공사 현장에 종사하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열악한 주거 환경과 과도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본 평균 일당에 못미치는 저임금과 소모품 강매를 당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순암具順岩 등과 함께 쟁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현지 지도를 위해 강유홍姜有鴻 · 김범이金凡伊 2인을 파견했다.[7][8][9]
같은해 4월 26일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飯場를 중심으로 한국인 60여명과 일본인 4명이 참가한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을 요구했다. 동년 동월 28일 200여명의 노동자들은 업무를 중지하고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파업 노동자를 대리하는 교섭위원들이 아이다쿠미有田組와 협상한 결과 사측이 요구 사항의 상당부분을 받아들이면서 양측은 합의서에 조인했다. 이후 파업을 주도했던 지도부는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하여 논의했다.[10][11][12]
같은해 5월 2일 합의서에 조인했던 아이다쿠미는 한국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며 일본인 100여 명을 무장시켰다.[13][14][15][16][17]
같은해 5월 4일 오후 5시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정순옥과 구순암은 폭도들에게서 탈출한 강유홍 등과 함께 공사 현장 내 간이식당 '모찌야餅屋'에서 대책을 숙의하던 중 오후 8시 30분 무장한 일본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한국인 지도부가 연달아 살해당하는 동안 정순옥은 방에서 끌어나와 폭행을 당하던 중 탈출을 시도했으나 붙잡혀 피살되었다.[18][19]
3. 사후
같은해 5월 6일 검사의 입회 아래 정순옥 등에 대한 부검이 집도되었고 8일 오후 2시 가매장되었다. 같은해 6월 8일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식이 열렸다.[20]2006년 광복 6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총313명의 독립운동가에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순옥 등 99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21]
4. 기타
- 활동 당시 정순경鄭順敬이라는 이명을 사용했다.[22]
- 정순옥의 사망 원인은 2016년 부터 진행된 대한민국 정부의 『일본지역 한국독립운동가 찾기』 사업 와중에 확인되었다.[23]
[1]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3] '재외한인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일본 지역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임영언(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4] 일본노동조합평의회는 1925년 결성된 좌파계열 노동단체이다. 다수의 노동쟁의를 이끌어 내었지만 당국의 탄압을 받아 1928년 해산했다. 같은해 12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조직을 재건했다. '日本労働組合評議会',2023.01.02 ウィキペディア[5] '兵營自由勞組大會', 조선일보 1931.06.11[6] 조선노동총연맹은 1927년 조직된 노동운동단체로서 1924년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서 분리된 조직이다. 결성 초기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중앙기구가 무력화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해방 정국까지 조직을 유지했다. '조선노동총연맹 (朝鮮勞動總聯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기미년 이후 우리 사회 운동 일람-三.연합 단체-', 독립 1945.03.21, '일본 조선동포들이 정치범 석방운동', 독립 1945.11.21[7]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8] '200206 훈장미전수자 명단(일본)',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9] '関東大震災から9年後、虐殺は「平時」にも起きていた', 安田 菜津紀, Dialogue for People 2024.1.4[10]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11] '岩手県大船渡線鉄道工事場スト', 法政大学大原社会問題研[12] '이와대현 조선인 학살사건 (岩手縣 朝鮮人 虐殺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13] 아이다쿠미有田組에 대하여 주 나고야 총영사관 자료에는 폭력단을 조직한 주체로 설명하였고,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는 아이다쿠미가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했다고 서술했지만 폭력단과의 관계가 누락되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에는 폭력단의 명칭을 아이다쿠미로 기재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는 아이다쿠미를 청부업체로 표기하면서 노사협상 주체이자 폭력단을 조직한 배후로 기술했다. 오노데라 노리오小野寺教郎가 저술한 「산리쿠의 철로 그 빛과 그늘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에는 당시 관련 재판에 출석한 일본인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아이다쿠미를 원청업체(元請けの有田組)로 기재했다.[14]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6]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7]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 재인용[18]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1] '독립운동 포상자 명단', 동아일보, 2006.08.09[2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23]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