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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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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장소
유럽, 아시아
기간
1870년 ~ 1873년
교전세력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이탈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
덴마크 왕국
자유 폴란드군
내몽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발칸 반도 독립군
외몽골
지휘관 나폴레옹 4세
빅토리아 여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압뒬라지즈 술탄
크리스티안 9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프란츠 요제프 1세
알렉산드르 2세
카를 마르크스
병력
피해 규모
결과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진 영불 연합군, 오러동맹 피로스의 승리.
영향
프로이센 공화국의 멸망 및 왕정 복고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
1. 개요2. 배경3. 진행 과정
3.1. 서부 전선 (프랑스 vs 오러동맹 & 프로이센)3.2. 남부 전선 (이탈리아 vs 오스트리아 & 베네치아)3.3. 발칸 전선 (오스만 vs 발칸 반도 슬라브인)3.4. 동부 전선 (폴란드 vs 러시아)3.5. 영국의 참전과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3.6. 베를린: 마르크스의 등장3.7. 전간기
3.7.1. 검은 월요일
4. 전후 처리

[clearfix]

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 일곱 번째로 등장한 전쟁이자 최초의 세계구급 스케일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 전쟁은 이형이 벌인 나비효과가 모이고 모여서 벌어진 최대의 사건이자 이후 대한의 변화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아시아 한정이 아닌 전세계의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음이 이 사건으로 독자들에게 강하게 실감되었다.

2. 배경

보불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을 향하여 최후의 한방이자 용맹한 돌격으로 프로이센 군을 궤멸시킴과 동시에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온 프랑스가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프로이센은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면 필패라는 것을 직감하고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 최단시간 내에 파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려 단기결전을 노려보지만 당시 파리 방어 사령관으로 부임한 루이 베르그송이 내세운 참호전에 의해 궤멸당하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1]에 대한제국 황제 이형은 서양 열강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틈에 대한제국의 힘을 키우고자 음모를 획책했다.[2]이형은 세계 정세가 극히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빅토리아 여왕영국 보수당이 굉장히 호전적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특사인 솔즈베리 후작과 토마스 공사에게 보수당의 재집권을 도와줄 테니 어서 전쟁 준비를 해달라 통보하였고,[3]미국에게는 영국 조기총선에 보수당의 승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미국 자본가들이 투자한 대한제국의 이권 지대를 국유화시키겠다는 협박까지 던졌다.

이 만남에서 이형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연방에 굴복하고, 이 틈을 노린 러시아가 서진해오면 미쳐날뛰는 프랑스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그들과 동맹을 타진할 것이고, 그러면 프랑스 역시 오스만과 이탈리아 등을 끌어들일 것임을 예감한다. 그리고 이형은 솔즈베리 후작의 앞에서 세계대전을 암시한다. 결국 미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보수당의 승리를 도와줬고, 이에 다시 집권하는데 성공한 보수당은 범세계급 스케일의 전쟁을 준비하며 유럽을 예의주시한다.

3. 진행 과정

3.1. 서부 전선 (프랑스 vs 오러동맹 & 프로이센)

이제 보불전쟁에서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고, 프로이센은 이제 건재한 프랑스 정부군의 공세를 두려워해야 했다. 운좋게도 프랑스 군부가 루이 베르그송을 체포해서 황제와 시민들과 실랑이를 벌이는[4] 약 한 달간의 시간을 번 프로이센은 나라의 전력을 긁어모아 27만 명을 새로이 징집, 프랑스 국경에 19만 명을, 오스트리아 국경에 8만 명을 배치하고 참호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루이는 참호전의 효력과 그것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이미 연구하던 인물이었고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 4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샷건을 주무장으로, 흉갑을 보호구로 삼은 장갑척탄병이란 새 병과와 대량의 개틀링을 보급해 프로이센의 전선을 압박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와 빌헬름은 나라의 격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오스트리아에 굴종, 그들 주도의 독일연방을 재건하게 된다.[5] 오스트리아는 불리하던 프랑스와의 전선에 다수의 지원군을 보냈으며 점차 서진해오는 러시아를 상대로 발칸과 지중해 진출을 용인하는 대가로 동맹을 요구한다. 이로서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형태가 복원된 오스트리아 주도의 독일연방과 러시아 제국의 동맹이 체결된다.[6] 오러동맹이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끝마쳤을 때는 라인란트가 돌파당했고 루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북독일에 들어와 하노버를 점령하고 뮌헨을 포위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영국의 전권대사가 나폴레옹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폴레옹 4세에게 찾아가 라인란트를 떼어가도 좋으니 프로이센을 멸망시키지는 말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만약 이를 거부하게 된다면 영국은 프랑스를 적대하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를 전해들은 루이는 황제에게 혁명 전쟁 시기 때와 똑같은 대프랑스 포위망 형성을 당하게 될 거라며 경악했고, 이에 나폴레옹 4세는 친위 세력인 루이마저도 섭정 의회와 같은 소리를 하냐며 푸념한다. 하지만 조용히 기회를 엿보던 오스트리아는 이를 계기로 신성 로마 제국을 부활시킬 거라는 루이의 예상에 전쟁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기분을 풀었고, 정말로 그 전쟁은 스케일이 극도로 커져버려서 쉽사리 끝나지 않게 되었다.

때마침 프랑스군은 보불전쟁 때와는 다르게 자신들이 프로이센에게 공격을 가는 입장이었고, 지난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 의용군들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처럼 프랑스군 또한 프로이센 의용군들에게 시달렸다. 이후, 프랑스는 자신들만으로는 전쟁을 쉽게 이기기 힘들 거란 판단하에 과거 크림전쟁 때 인연이 있던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였고, 러시아가 서진해 온 사이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긴 폴란드의 독립군에게 지원을 시작했다. 또한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가 쥐고 있는 달마티아와 쥐트티롤 지역에 미련을 보인 이탈리아도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결의한다. 이들은 교황령을 합병해버렸으며 신문과 언론에서는 신성동맹이라 칭해진다.

오러동맹은 라인란트 국경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5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투입했으나 불행히도 그들은 뒤늦게 참전한 탓에 참호전의 혈투를 몰랐고[7], 프로이센 군관들의 간절한 만류를 무시하고 "천하의 프로이센군이 겁쟁이가 다 됐네?"라고 프로이센군을 비웃으며 전열보병 형태로 대군을 돌격시킨다. 당연히 프랑스군들은 이런 러시아군의 멍청함을 비웃으며 개틀링 포로 그들을 도륙했다.

루이는 1차 방어선의 거짓 후퇴와 2차 방어선에서 매복한 부대까지 합세시킨 대반격, 그리고 땅굴을 이용한 후방교란에 적 전열 붕괴 후 기병대를 이용한 추격전까지 완벽하게 성공시켜 말 그대로 오러연합군을 철저하게 박살냈다. 이후, 루이는 21만명에 달하는 적군을 무너뜨렸으며(사망 및 부상 12만명, 지휘계통 붕괴로 인해 포로로 잡힌 9만명.) 부관 조프르와 다음 기동을 계획한다. 수도 베를린은 이미 철저한 참호 도시로 변모되었기에 방어 능력이 덜 된 북독일의 도시들을 차근차근 공략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그때 신성동맹의 일원인 이탈리아가 베네치아 일대에서 오스트리아 군에게 대패, 10만에 달하는 이탈리아 군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그들을 구원해야 했던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진군 방향을 남독일로 돌려 오스트리아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해주기로 한다.

3.2. 남부 전선 (이탈리아 vs 오스트리아 & 베네치아)

한편, 독일 전선이 점차 과열되는 양상을 띄는 와중에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무난하게 이탈리아군을 밀어내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침략자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려는 주세페 가리발디[8]가 위태로운 조국의 부름을 받고, 재차 붉은 셔츠 군단을 조직하여 궐기하면서 대접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이 베르그송은 프로이센 진격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병력들을 이탈리아로 돌리면서 전황은 뒤집혀진다. 그렇게 이탈리아 통일전쟁 최고의 영웅이자 모범적인 군인이던 가리발디가 재조직한 붉은 셔츠 군단은 동아시아가 한창 천명대전 중으로 난장판이 된 9월 중순 경에 불과 얼마전까지의 졸전이 무색하게 빠르게 밀라노와 롬바르디를 수복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본토 진격은 할 수 없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베네치아가 자주독립을 외치며 도시에 참호를 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가리발디와 붉은 셔츠 군단은 베네치아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이탈리아와 베네치아의 전쟁은 날로 격화되었다. 베네치아군을 반란군 혹은 외세를 끌어들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민족반역자들로 생각하는 이탈리아군과 자신들을 이탈리아라고 불리길 거부하며 스스로를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 자유 시민으로 생각하는 베네치아군은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그렇게 두 진영은 국제법도 무시하고,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로 진행된 것이다. 결국 북부 이탈리아 전선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베네치아의 대리전 비스무리하게 흘러갔다.

다만 유럽에서 제일 부유한 국가에 속하는 프랑스는 척탄병들에게 흉갑과 투구, 샷건들을 부족함없이 무장시켜줄 돈이 있어서 장갑 척탄병 병과를 만들고 유지시킬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신생 왕국인 이탈리아는 그런 고급 장비들을 쥐어줄 돈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소총과 총검만 든 맨몸으로 참호에 뛰어들었고, 급조된 베네치아군도 이탈리아군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장 수준으로 맞서 싸우게 된다. 이러니 이탈리아 전선은 백병전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급기야 철퇴와 장검 따위의 전근대적인 무기와 함께 총알이 없어서 총에다가 총검을 장착하고 돌격하는 말도 안 되는 짓까지 튀어나오는 상황. 더욱 막장인 것은 두 진영을 지원해주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것.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향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보냈지만 오스트리아가 물자를 탈취하는 개막장의 상황이 발생하는 데다가 애당초 이탈리아가 크게 이기지 못해도 좋으니깐 이대로 영토를 사수하면서 버티기만 하면 쟁땡이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대충 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또한 지원을 해주기는 했지만 바다쪽에서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함대로 포격만 몇번 하거나 물자만 조금씩 보내주는게 끝이었고 에시당초 목적 자체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토만 사수하면 장땡이었기에 이번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를 지켜내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결과였기 때문. 그리하여 이탈리아 전선은 현실의 2차 대전의 북아프리카 전선처럼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 죽어나가는 것은 애꿎은 이탈리아 청년들 뿐이었다.

3.3. 발칸 전선 (오스만 vs 발칸 반도 슬라브인)

그리고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려는 슬라브인들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그런 슬라브인들을 저지하려는 오스만의 혈전으로 바쁜 상태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처럼 이들 또한 내전이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언어, 종교, 인종의 차이. 슬라브어파를 쓰고,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슬라브인튀르키예어를 쓰고,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튀르크인은 절대 융화될 수가 없던 것. 따라서 이 두 진영의 싸움은 사실상 독립전쟁에 더 가까운 내전인 셈이다.

슬라브인들에게는 침략자 오스만 제국에게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그들에게는 민족주의라는 시대적 상황에 충분한 명분과 열의를 갖게 되는 상황에서 비슷한 문화권의 러시아가 도와주기까지 하니 힘이 실리는 상황. 허나 이들에게는 후원자인 러시아가 프랑스와 싸우는 와중에 몽골 내전과 태평천국 지원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탓에 제 역량을 다해 발칸 독립군을 온존히 지원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지난 조러전쟁에서의 패전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제대로 된 전력을 낼 수 없다는 약점이 존재하고 있다.

반대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위협에서 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좀 더 수월하게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독립군들을 제압하고 발칸 반도를 안정화시킬 능력 자체는 없었다. 오스만군은 크림전쟁 때의 문제점들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땅바닥에 처박혔으며 장교들의 규율도 엉망이었다.[9] 차라리 제1차 조청전쟁 당시 온갖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서로 한심한 추태를 부리면서도 기어코 총력전을 벌였던 조선군과 청군이 기강이 잡힌 정예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10] 게다가 그 정도로 끝이 아니었다. 힘들게 다시 반군들을 진압해도 점령한 지역에 지나친 보복과 이슬람교 및 이슬람적 율법을 강요하는 폭정을 일삼아 점령지에서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게 되면서 전황은 오스만군에게 더할 나위없이 불리해져만 갔다.

이러니 오스만 제국의 참전을 권한 프랑스도 뒷목을 잡으면서 오스만을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한 동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오스만군을 불신하여 발칸 반도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슬라브 독립군과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했다. 이러다보니 오스만 또한 프랑스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오스만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나서다가 민병대 수준인 슬라브 독립군에게도 패배하는 막장 상황에 이르렀다.

3.4. 동부 전선 (폴란드 vs 러시아)

프랑스에게 도대체가 답이 없는 오스만보다 더 든든한 동맹군이 있다면 바로 자유 폴란드군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연합군의 후방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처바르고 다니면서 격렬한 저항을 해내고 있었다. 이들의 지배 영역이 늘어나는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의 숨통을 트게 해줬으며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에 최소한의 지원만으로도 최대한의 성과를 내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독일 전선만 신경쓸 수 없어 일부 병력들을 폴란드로 투입시켰고, 가장 중요한 발칸 전선에서의 지원도 부족해져서 난전 상황으로 흐르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연합군 내에서의 발언권 축소를 각오하면서까지 발칸 진출과 폴란드 독립 저지에 힘을 쏟았다.

3.5. 영국의 참전과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

그리고 마침내 보수당이 재집권한 영국이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 유럽 대륙의 평화 회복과 러시아의 발칸 진출 저지라는 명분을 내걸어 동맹국 측에 붙어서 참전하게 된다. 앞서 프랑스는 혁명 전쟁 시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걸출한 천재를 낀 상황에서도 전유럽의 강호들을 적으로 돌려서 패배한 악몽을 떠올린 과거의 교훈 덕분에 영국이 제시한 합의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그 나폴레옹이 멸망시킨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과 60여 년 만에 찾아온 독일 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영국의 평화 중재안을 대놓고 거부해버렸다. 그렇게 영국의 전권대사가 나폴레옹 4세에게 감사를 표하며 양국의 우호를 다짐한 그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거의 백년 만에 독일 제후 전원이 참석한 제국 선거에서 만장일치[11]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을 부활시킨 오스트리아는 영국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교황령 합병을 무효로 선언하고 헝가리의 추기경 조셉 미할로비치를 대립교황으로 삼아 교황령의 해방, 프랑스군의 격멸을 내걸어서 대독일주의를 외치던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게 되었다.

3.6. 베를린: 마르크스의 등장

독일 일대와 베네치아가 피로 물들고 있을 때, 베를린의 독일 시민들의 불만은 임계점에 달했다. 그들은 그들의 피값으로 몰아낸 오스트리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켜달라 빌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음을 한탄하며, 보불전쟁부터 시작해 자신들의 아들과 형제를 끔찍한 참호전의 전장으로 내몬 호엔촐레른 왕가와 정부를 증오하게 되었다. 시위대의 수는 경비, 경찰,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수가 불기 시작했다.

이 틈을 노리고 베를린에 들어온 혁명가가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세력을 소집했으며 이내 그 세력은 심상치 않은 사이즈로 부풀었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들과도 협약을 맺어 세력을 확장했으며 이내 혁명 혹은 반란이라 불러야 할 궐기를 일으킨다.

최소한의 군대 외엔 전부 전장에 배치한 정부는 이들의 연합에 결국 무너져 빌헬름과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한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연방 공화국으로 개칭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확장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던 북독일의 제후들과 오스트리아는 곧바로 이들에게 전쟁을 걸게 된다.

자국군도 수습못한 독일이 신성 로마 제국의 공세를 버틸 수 있을리가 없었고, 불과 보름만에 열세에 몰린 독일연방은 결국 얼마 전의 적국인 프랑스에게 동맹을 요청한다. 루이를 비롯한 프랑스 군인들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정부는 요청을 승락, 보복의 대상을 프로이센 시절의 왕가와 정부로 제약하고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3.7. 전간기

전쟁 개전 후 3년, 프랑스+영국+독일 연방+이탈리아+오스만 제국+덴마크+폴란드 독립군의 신성동맹 vs 오헝제국과 북독일이 합병된 신성 로마 제국+러시아+발칸의 세르비아 계 독립군+베네치아 독립군의 오러동맹 간의 혈투는 300만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사망자만 100만을 훨씬 넘겼고, 중사상자는 그 이상. 너무나 엄청난 피해에 기가 질린 양 세력은 일단 휴전을 제의하고 베를린에 모여 협상을 개시한다.

한편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과 솔즈베리 후작은 세계대전 사이 천명대전을 통해 사실상 중국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대한제국과 이형에 대한 견제의 필요를 느끼고 협상장에 이형을 승전국의 황제로서 초청한다. 그러나 이형은 갓 태어난 장남 문제로 닦달하는 아내 황후와 직접 내정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박규수에게 대타를 맡겨 베를린으로 보낸다.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지금의 세계대전은 서로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데다가 딱히 승패가 갈리지 않아서 패전국과 승전국으로 명확하게 갈라져있던 원역사와는 판이하게 달랐기에, 불만만 잔뜩 쌓인 참전국들은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회담장에서 회담은 뒷전이고 서로를 향해서 쌍욕만 하기 바빴다. 프랑스는 원흉인 호엔촐레른의 부활을 용납할 생각이 없는데다가 그 후신인 독일연방 공화국에게도 신성 동맹에게 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을 요구하는데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이를 양보할 리가 없었고, 더욱이 영국조차도 여전히 프로이센 지역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고 대륙의 균형을 통제한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탈리아 역시 베네치아를 간신히 제압하고 나니 달마티아와 쥐트티롤을 재차 갈망했다. 프랑스의 요청으로 참전했던 오스만도 발칸반도의 패권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개판이 되어버린 본토를 어떻게든 수습하고 부랴부랴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에 참가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오스만과 영국을 무력화 시키고 지중해와 북해 일대로 진출할 계획을 짜지만 동맹 오스트리아는 방해는 않아도 지지도 안하고, 영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다. 영국 또한 대륙의 중재란 간판 뒤에서 군비를 확충하는 모습을 보여 협상장에서 빈축을 샀다. 게다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중, 소규모의 공방전이 오고갔기에 피해는 더욱더 늘어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규수는 수 개월 동안 시끄러운 협상장에서 와인만 축내면서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때,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대공이 미국의 대사 러더퍼드 헤이스를 통해서 접촉해오고, 이내 박규수에게 영토 판매를 제안한다. 이에 박규수는 한-러 국경 확정의 일환으로 캄차카를 구매하는 것에 더해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시베리아를 반분하자고 역제안을 한다. 러시아는 이미 극동을 포기하고 유럽에 올인하기로 결정한 상황이고 알렉산드르 대공 역시 이형과 접촉한 적이 있던 미하일 체르나예프 중장을 통해 이를 예상한 상황이기에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대공은 본체인 캄차카 구입에 900만 달러라는 터무니 없는 가격을 고집하자, 박규수는 잠시 난처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에 그 부담을 모조리 떠넘긴다는 생각을 떠올린 박규수는 러시아의 가격을 받아들이면서 캄차카 거래를 성사시킨다. 이로서 캄차카가 일본 영토가 되는 대신 그 돈은 일본이 지불하며 캄차카를 제외한 예니세이 강 동쪽의 모든 러시아 영토가 대한제국령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대전은 전혀 예상밖의 상황으로 전개되는데...

3.7.1. 검은 월요일

이렇게 의미없는 협상을 질질끌던 와중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더 이상의 전쟁비용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을 선언했다. 그 바람에 이로 인한 연쇄작용이 연합군 측에 쓰나미처럼 덮쳐 들어왔는데, 독일의 파산 선언으로 독일에 엄청난 차관을 대줬던 런던 금융가가 몰락하고, 심리적 도미노 효과가 벌어지면서 연합국 각국의 금융시장이 연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렇다. 원역사보다 무지막지하고 스케일은 더 어마무시한 대공황이 터진것이다.[12] 이 때문에 연합군은 전투에 지지 않았음에도 말그대로 국가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배급할 음식을 살 돈은 물론이고 전쟁을 하는 병사들에게 지급할 월급과 무장을 줄 돈이 없어서 전쟁을 못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그와 반대로 적군이 스스로 무너지는 상황을 보게 된 동맹군, 특히 러시아 제국군은 만세를 부르며 후방에 모아둔 병력을 폴란드 방면과 발칸 방면으로 투입하여 1개월 만에 폴란드를 재점령한다. 그리고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각국의 내부 안정화 때문에 철수하면서 폴란드가 재점령당하는 꼴을 보고는 피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면서 복수를 맹세한다.

4. 전후 처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공화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급격히 악화되고, 협상국의 주력인 영국과 프랑스가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대독일주의가 압도적인 여론이 형성된다. 결국 입헌군주정을 조건으로 왕정이 복고되자만, 이와 동시에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에 흡수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종전 협정에서 홀슈타인을 덴마크에게 반환하면서 국력이 더 쪼그라든다.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함께 유럽대륙 횡단철도 공동 부설계획을 발표하면서 내정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제국의 재상이자 외무장관인 귤라 안드라시를 영국에 파견하며 러시아에 대한 견제에도 나선다.

중립을 유지하던 벨기에 왕국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1873년 대공황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리던 국민들에 의해 레오폴드 2세를 비롯한 벨기에 왕가가 주살당하며 왕정 성립 42년만에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 그나마 세력이 강했던 3개 주(룩셈부르크, 왈롱, 플랑드르)로 분열된다.

영국은 그동안 주도하던 유럽의 안정화에 실패하고 경제의 대혼란으로 고생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국: 늘 주도하던 유럽의 정세 안정화 실패. 경제적 위기로 인한 혼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부활의 저지에 실패. 군의 정예화.[1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 전쟁을 계기로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 독일 영지의 흡수와 함께 러시아와의 철도사업으로 대륙진출을 도모할수 있게 됨으로서 사실상 최후의 승자로 등극

독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몰락과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으로의 편입, 프로이센 왕국의 부활.

러시아 제국: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그를 메우기 위한 영토 매각.

이후 스톡홀름에서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과 대독일 선성로마제국의 재상이자 외무장관 귤라 안드라시와가 회담을 나누고 양국의 이해관계가 거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스톡홀름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 프랑스 견제에 나선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사실상의 제2차 조러전쟁인 몽골 내전이 벌어졌다. 초반엔 내몽골과 외몽골의 전쟁이었지만 천명대전 이후 이형이 직접 몽골 기병군단을 이끌고 침공했고,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 북변의 각지에서 러시아 제국과 대한제국 군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대한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맺은 휴전협정을 맺었고, 이 조약으로 인해 내몽골이 외몽골을 병합하고 몽골 전체가 대한제국령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를 일본에 900만 달러에 팔아넘겼고, 예니세이 강을 기준으로 동쪽 전토를 대한제국에 넘겼다. 이 조약이 끝나고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끝내고(독일의 파산으로 인해서) 이어서 오스만과의 성전까지도 승리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와 대한제국 사이의 적대감과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1] 대략 천명대전 직전 시기.[2] 이 시기 극동에서 영국의 대만 인구 증산을 통한 영구 독립 도모를 위해 일으킨 혐성질(쌀 가격 폭등)로 중화제국내에서 멸청흥한이란 구호가 팽배해지고 중화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자유당 내각의 온건지원으로 중화제국의 연착륙이 예정되었다.[3] 이때 고종이 예상한 전개가 소름돋을 정도로 정확하다.[4] 이유가 뭐냐면 군부의 원로들이 루이를 시기한데다 루이의 전투방식이 기존의 전투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루이를 직접 기용한 황제는 물론 그래도 루이에게 불만은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전쟁영웅이던 그를 진짜 체포해버리자 다같이 반발하니 어쩔 수 없이 루이는 석방할 수 밖에 없었고 황제는 아예 루이를 중장으로 승진시킨다.[5] 참고로 시기상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연방에서 탈퇴하여 바이에른 등 4개국을 제외하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해 있었다. 허나 보불전쟁에서 대차게 말아먹고 원상회귀된 셈. 한편으로는 이 덕에 오스트리아는 떡이 굴러온 셈이 되었다. 보오전쟁에서 털려서 프로이센이 독일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프랑스에게 털려서 다시 돌아온 셈이니... 그나마 프로이센에게 다행이라면 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 후 오스트리아에게 우호적으로 나왔기에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가혹한 조건으로 도움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 조건만 따지고 보면 보오전쟁 이전으로의 회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6] 이하 오러동맹이라 칭한다.[7]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러시아는 이미 조러전쟁에서 대한제국에게 참호전으로 크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패배의 원인을 심판인 미국의 불공정함과 극동의 괴팍한 난쟁이 황제와 약쟁이 기병대 때문이라고 억지와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참호전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거다.[8] 이때 가리발디의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긴 상태였다. 노익장[9] 어느 정도냐면 러시아군이 방어선을 뚫고 본진으로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인 와중에 지원군을 보낼 생각 없이 메카를 향해 기도 올리는 시간이라고 기도나 처하고 자빠져 있었다. 이러니 프랑스 군사고문단들도 학을 뗄 지경.[10] 이때 조선과 청나라 둘다 불쌍할 정도로 처절했는데 우선 조선은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 상태로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을 개전했다. 이러니 당연히 보급은 개나 줘버린 상태였고 무려 친정을 행하는 왕이 병사들과 함께 자갈이 들어있는 개판5분전의 주먹밥을 땅바닥에 앉아서 먹는 환장하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식량도 이지경이니 무기는 말할것도 없이 부족했고, 나중에 가서는 무기가 없어서 바닥의 짱돌까지 동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청군도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는데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탈영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고 나중에 가서는 지휘관의 명령을 씹고 단체로 도망가는 환장할 짓거리를 하는 막장 군대였다. 이러한 단체 병림픽의 화룡점정은 바로 고종의 무지성 개돌. 그나마 이때는 그 무지성 개돌이 성공한데다 하필이면 무지성 개돌을 감행한 사람이 자국의 국가원수인 탓에 사기가 올랐지만 저런 무식한 방법을 시도할 사람이 여기선 없었다.[11] 하노버 공작그러니까 영국 국왕은 부재로 자동 기권한 상황이다.[12] 프랑스 본국은 국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권위가 막강한 황가의 대국민 호소를 통한 금 모으기 운동과 국유화 조치, 군부의 시위 진압 등으로 겨우 혼란을 진정시켰다. 영국 역시 급히 거래소 일시 폐쇄와 증권 거래의 전면적 중단을 하는 등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막대한 식민지를 활용한 끝에 혼란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달리 오랫동안 정부의 시장불간섭주의를 유지했기 때문에 조치의 시점이 늦었고, 이에 따라 내부적으로는 템즈 강에 투신 자살자들의 유골이 넘쳐난다는 낭설이 나돌며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국민 담화를 하던 총리 디즈레일리가 오물을 투척당할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고 정권 지지율이 추락한다.[13] 추가적으로 그래도 원 역사대로 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파리가 점령당하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건국 선포가 이루어지는 굴욕은 피했다. 물론 많은 사망자를 내긴 했다만... 보나파르트 왕조 입장에서도 이득인게 일단 보불전쟁에서 완패하지 않은데다 어쨌든 프로이센에게 반격을 먹여 일시적으로나마 프로이센을 멸망시키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고 덕분에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