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08 17:59:44

조남명(1870)

파일:조남명.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중철(仲哲)
본관 풍양 조씨[1]
출생 1870년 9월 24일[2]
충청도 한산군 남상면 금당리
(現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 하리마을 446번지)
사망 1947년 7월 2일[3] (향년 76세)
묘소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 북리마을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70년 9월 24일 충청도 한산군 남상면 금당리(現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 하리마을 446번지)에서 아버지 조찬구(趙粲九, 1848 ~ 1909. 11. 9)와 어머니 남양 홍씨(1849 ~ 1913. 11. 10)[4]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찬구는 1870년 한산군의 보부상 접장(接長)을 역임했다.

1919년 3월 4일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에서 유재경(劉載璟)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전해받은 뒤 3월 6일 화양면 구동리(現 한산면 구동리) 이근호(李根浩)[5]의 집에서 이근호와 한백희(韓伯熙)·최경진(崔敬鎭)에게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학생들은 나랏일로 지금 군산경찰서에 유치돼 취조를 받고 있는데, 우리들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이를 수수방관하지 말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도 함께 군산부로 건너가 만세를 부르자"며 전라북도 군산부(現 군산시)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제안했고, 이튿날인 3월 7일에는 이근호·한백희·최경진과 함께 기산면 화산리 이경욱(李敬旭)[6]의 집에 가서 이경욱과 정희석(鄭熙錫)[7]에게도 앞서 한 말을 하며 전라북도 군산부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제안했다.

이후 이근호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대한 준비를 갖추던 중 발각되어 3월 8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날 압송되던 도중 서천군 서천면 삼산리 장터에 있던 장하영(張河榮)의 집 앞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이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던 것을 보고 "대한국 독립 만세"를 외쳐 주위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1919년 4월 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형벌을 받은 뒤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평양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고, 이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47년 7월 2일 별세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회양공파(淮陽公派)-한산군파(漢山郡派)-처사공파(處士公派) 26세 남(南) 항렬.[2] 양력 10월 18일.[3] 음력 5월 14일.[4] 홍문선(洪文善)의 딸이다.[5] 이명 이건호(李建浩).[6] 이명 이경옥(李敬玉).[7] 조남명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鄭錫으로 기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