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5AA65> 조선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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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朝鮮通寶조선 세종 재위기에 만들어진 동전이다. 조선 시대 처음으로 만들어진 동전으로 숙종 때부터 유통된 상평통보의 선배 격인 화폐이다. 세종 5년(1423년)부터 주조하기 시작하여 세종 7년(1425년)부터 유통이 시작되었다.
2. 상세
조선 시대 최초로 유통이 시도된 동전이며 태종 때부터 유통을 시도했던 지폐 저화(楮貨)를 보조하기 위하여 세종 5년(1423년)부터 주조되었다. 중국 당나라 때 화폐였던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양식과 제도를 참고하여 제작하였다고 하며 유통은 세종 7년(1425년)부터 시작되었다.조선 정부는 한성과 지방 여러 곳에 주전소를 설치하고 구리 수급에 전력을 다하는 등 의욕적으로 주전을 하여 통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쌀과 면포 등으로의 물물거래를 선호하고 동전을 신뢰하지 않았다. 동전 사용을 거부하는 백성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등 강제로라도 통용시키려 하였지만 백성들에게 규정된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가치가 계속 떨어졌으며 결국 시세가 구리 가격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결국 세종 27년(1445년)에 더 발행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발행과 유통을 완전히 중지하니 조선의 첫 동전 유통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남겨진 동전들은 민간에서 녹여져 유기로 만들어지거나 구리 원료로 밀수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조선통보의 적극적인 유통 시도와 실패는 세종대왕의 몇 안 되는 실책이다.
조선통보는 당시 조선 내의 부족한 구리를 총동원하여 주조하였는데 철폐된 사찰들의 동제 물건들과 불구(佛具)들을 많이 녹여 재료를 충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불구들이 재료로 들어간 동전이기 때문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여 조선통보는 점을 치는 데에도 많이 쓰였다.
3. 인조대의 조선통보(팔분서)
<colbgcolor=#C5AA65> 조선통보 팔분서(八分書) |
인조 11년(1633년)부터 주조하였다고 하며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가 침공하여 병자호란이 터지자 주조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재료인 구리가 크게 부족하였던지 주조량은 고작 60만 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2] 상평통보도 수억 개는 만들었다고 추정되지만 잘 유통되면서도 전체 거래의 10%도 대체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통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도 아니고 이건 아예 만든 것이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조선통보 팔분서는 독특한 서체와 모양, 큰 희소도 탓에 엽전 수집가들에게 특히 선호되는 품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