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11:41:59

존 벨 후드

존 벨 후드
John Bell Hood
파일:1000137537.jpg
출생 1831년 6월 1일
미국 켄터키주 오윙스빌
사망 1879년 8월 30일 (향년 48세)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복무 미합중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최종 계급 아메리카 연합군 중장
복무 기간 1853~1865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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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 연합국에서 가장 젊은 장성들 중 하나였다.

2. 생애

켄터키주 오윙스빌에서 태어났고 185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기병으로 전과해 로버트 E. 리,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휘하에서 복무했다. 1857년 텍사스 데빌스강 인근에서 코만치족과 전투를 치러 왼손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으나 지휘해 코만치족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 휘하로 들어갔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얼마 안 가 대령으로 진급하며 제4텍사스보병연대를 이끌었다. 준장으로 진급해 반도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 휘하에 들어가 엘섬스랜딩 전투에서 돌격으로 북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게티즈버그 전투에도 참가했다가 왼팔을 못 쓰게 되는 중상을 입었다. 치카모가 전투에서는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성공적인 돌격을 일선에서 이끌며 남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오른쪽 대퇴골에 중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후드는 치카모가의 전공으로 중장으로 승진했고 후방에서 치료하는 동안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과 친분이 생겼다. 애틀랜타 전역에서 테네시군의 군단장이었던 후드는 적극적인 전투 없이 계속 병력을 보존하며 후퇴한 조셉 E. 존스턴에게 반대하고 적극적인 전투를 주장했다. 존스턴이 애틀랜타를 지키는 마지막 자연방어선인 채터후치 강에서 후퇴하자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경질하고 후드를 대신 테네시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후드도 애틀랜타를 방어할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애틀란타 전역에서 패해 애틀랜타가 함락되었고, 지나치게 공세를 펼쳤다가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셔먼이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으로 서배너로 향하는 것을 알고 오히려 북부의 배후를 찌르기 위해 북상했다가, 셔먼이 남겨놓은 토머스의 컴벌랜드 군과 존 M. 스코필드의 오하이오 군에 의해 프랭클린 전투와 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박살났다.

1865년 5월 북군에게 항복했고 전후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면화중개업, 금융업에 종사하다가 1878년 미시시피에서 시작된 황열로 인해 자신, 부인, 장녀 리디아가 사망했다.

3. 여담

텍사스주 킬린에 위치한 부대인 포트 후드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후드본인이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노예제 찬성론자였기 때문에 명칭 변경의 필요성을 느껴 히스패닉 최초 대장 진급자인 리처드 E. 카바조스의 이름을 따 포트 카바조스로 변경되었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던 장군으로 꼽히며, 최일선에서는 유능하던 장군이 사령관으로 진급했을 때는 그만큼의 효용성을 보이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애틀랜타 전투에서 후드를 상대하다가 전사한 사관학교 동기 제임스 B. 맥퍼슨과 친구였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빅스버그 포위전 당시 주변 민간인들에게 보인 맥퍼슨의 신사적인 대우를 높이 평가했다.


[1] 당시 동기는 이후 남북전쟁에서 북군 소속으로 후드와 맞붙게 된 제임스 B. 맥퍼슨, 존 M. 스코필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