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 John Fitzedmund Fitzgerald | |
성명 | 존 피츠먼드 피츠제럴드 John Fitzedmund Fitzgerald |
출생 | 미상 |
아일랜드 왕국 코크주 | |
사망 | 1589년 2월 |
아일랜드 왕국 더블린 | |
아버지 | 에드먼드 피츠모리스 리카드 |
어머니 | 샤일리 막 마올로니 |
배우자 | 호노라 |
자녀 | 에드먼드, 리처드, 캐서린, 엘리노어 |
직위 | 데스몬드 반란군 지도자 |
1. 개요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주동한 아일랜드 장군.2. 생애
12세기에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의 후손인 피르제럴드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에드먼드 피츠모리스 리카드는 이모킬리의 집사였고, 어머니 샤일리 막 마올로니는 엘리의 영주 마올로니 막 셰인 오캐럴의 딸이었다. 1569년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당함 그는 발리마터에 있는 자기 성에서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에게 포위되었다. 적의 오세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다수의 수비대가 부상을 입고 성벽이 무너지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한밤중에 추종자들과 함께 성벽에 바싹 붙어 있는 늪을 통해 도주했다.그후 1573년 2월까지 아허로 숲에서 피츠모리스와 함께 싸웠고, 피츠모리스가 킬말록 교회에서 먼스터 주지사 존 페로에게 항복할 때 함께 항복한 후 사면받았다. 1575년 피츠모리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지만 몇 주 후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피츠모리스가 해외의 지원을 받고 아일랜드로 상륙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576년 11월 16일 먼스터 총독 윌리엄 드루리에게 데스몬드 백작이 이모킬리에서 말 60마리와 기병 100명을 방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1579년 7월,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스페인 제국과 교황령의 후원에 힘입어 아일랜드에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돌아오자, 피츠먼드는 8월 1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수백 명이었던 반란군은 그가 가담하면서 3,000명으로 불어났고, 얼마 후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까지 가세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8월 18일 피츠모리스가 전사한 후에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잉글랜드 편에 남은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와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1580년 7월, 위클로 산맥을 기반으로 삼던 피아흐 맥휴 오바인이 아일랜드 동부의 렌스터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페일의 잉글랜드 출신 영주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앙심을 간직해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에 불만을 느꼈던 제3대 볼팅글래스 자작 제임스 유스터스도 가담했다. 이에 피츠먼드는 라오이스에서 볼팅글래스 자작과 회동하여 잉글랜드군과 공동으로 맞서 싸우는 걸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러나 배로 계곡 지역에서의 제한적인 협력을 제외하고는 공동 전략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아일랜드 게일 귀족 출신의 영국 군인이자 작가 필립 오설리번 베어는 1621년 출간한 <엘리자베스 전쟁사> 1581년 "복장과 무기로 구별되는 '붉은 코트'라고 불리는 잉글랜드 군인 중대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아일랜드로 파견되었지만 피츠먼드에게 리스모어 인근에서 압도당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피츠먼드는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아일랜드 총독부는 잉글랜드 정부에 그가 전사했다고 보고했다가 살아있다고 정정하기를 반복했다.
1583년 5월,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는 피츠먼드의 어머니 샤일리를 체포한 뒤 코크 시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피츠먼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지만, 6월 14일 보병 24명과 기병 4명만 자기 휘하에 남자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오몽드 백작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개인적으로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오몽드 백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수석 고문인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에게 그를 사면해달라고 간청했다. 오몽드 백작은 피츠먼드가 "용감하고 현명하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묘사했으며, 그와 그의 백성들은 항복한 후 질서와 농업에 헌신했다고 밝혔다.
잉글랜드 당국은 오몽드 백작의 요청에 따라 피츠먼드를 사면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영지를 소유하게 해줄 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개신교 농장주들이 그가 가졌던 영지를 자기들 농장으로 삼았는데, 만약 정부에서 그의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농장주들은 농장을 그에게 도로 넘겨야 했다. 이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피츠먼드가 스페인과 내통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결국 여기에 넘어간 잉글랜드 당국의 명령으로, 1587년 3월 피츠먼드는 토머스 노리스 경에게 체포되어 더블린 성으로 유폐되었고, 1589년 2월에 그곳에서 옥사했다.
피츠먼드는 호노라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 에드먼드와 리처드, 그리고 두 딸 캐서린과 엘리노어를 두었다. 그중 상속인인 에드먼드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18개월이었고, 잉글랜드 당국이 피츠먼드 일가족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해주기로 결의한 뒤 가족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 발라마터(Ballymartyr) 성을 중심지로 삼고 영지를 경영했지만, 영국 내전 시기인 1647년 초대 인치퀸 백작이며 그의 조카인 머러 맥더모드 오브라이언에게 공격받아 발라마터 성이 함락되고 본인은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