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21:11:05

존 호크우드(용병대장)

파일:존 호크우드.png
이름 존 호크우드
John Hawkwood
출생 1323년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시블 헤딩엄
사망 1394년 3월 17일
피렌체 공화국
아버지 길버트 호크우드
형제 니콜라스, 아그네스, 조앤, 앨리스
아내 성명 미상의 아내, 돈니나 비스콘티
자녀 안티오치아, 자넷, 캐서린, 앤, 존, 존(사생아), 토머스(사생아)
직위 콘도티에로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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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출신의 이탈리아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 부대 지휘관).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로 불렸다. 백년전쟁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로 건너가 뛰어난 군사 활동을 보여 피렌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323년경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시블 헤딩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길버트 호크우드는 무두질에 종사하는 인물로, 시블 헤딩엄과 핀칭필드에 토지를 보유하는 등 상당한 부를 갖췄다.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찍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동생 니콜라스는 노르망디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약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며, 세 자매인 아그네스, 조앤, 앨리스는 현지 남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134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유산 일부를 받은 뒤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한동안 견습 재단사로 일했다. 1342년 프랑스로의 원정에 착수한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에 장궁병으로 입대했다. 기록상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대에 입대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호크우드 가문이 거주하는 지역 근처에 옥스퍼드 백작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에,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의 군대에 입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1346년 크레시 전투와 1356년 푸아티에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모종의 시기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60년 5월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중단되자, 그는 프랑스 각지를 떠돌며 약탈을 자행하던 '화이트 컴퍼니(White Company)'에 가담했고, 나중에는 용병대 지휘관이 되어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360년 가을 그의 용병대는 아비뇽으로 쳐들어가서 12월 28일 퐁생에스프리 요새를 공략했다. 그곳에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 때 생포된 뒤 지불할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자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후 용병들은 3개월 동안 아비뇽 각지를 돌며 지역 주민들을 약탈했고, 교황궁까지 위협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그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달래기로 했다.

1361년 10월, 호크우드는 밀라노 통치자 베르나보 비스콘티에 맞서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싸우던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 팔레올로고스와 계약을 맺고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그는 1362년 이탈리아에서 피에몬테의 7개 성을 함락하고 사보이 백작과 그의 남작들을 생포했고, 몸값으로 180,000 플로린을 받았다. 1363년 4월 22일, 슈바벤 백작 콘라드 폰 란다우가 지휘하는 헝가리 분견대를 상대로 로마냐노 인근에서 맞붙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그 직후 노바라 인근의 칸투리노 전투에서 콘라드를 생포했다. 콘라드는 생포된 지 얼마 안 되어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호크우드의 활약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몬페라토 후국과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1363년 7월, 호크우드와 부하들은 피렌체에 맞서는 피사와 계약을 맺었다. 1364년 4월, 그는 모든 용병대를 이끌고 프라토에서 피에솔레까지 이르는 피스토리아 평원을 관통했고, 만토바를 함락했다. 5월 1일 피렌체를 포위해 여러 차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지만 함락에 실패하고 피사로 후퇴했다. 피렌체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갈레오토 밀라테스타가 이끄는 군대를 피사로 진격했고, 그는 이에 맞섰지만 패퇴했다. 이후 조반니 델라그넬로의 봉기를 지원해, 그가 피사 통치자가 되도록 도왔다. 그해 8월 28일, 조반니 델라그넬로는 상당한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피렌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65년 7월, 호크우드는 움브리아를 침공했다가 피사-피렌체 전쟁 당시 동료였고, 현제는 페루자에 고용된 독일 용병대장 한스 폰 본하르트에게 패배했다. 이후 제노바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사생아인 암브로조가 지휘하는 성 게오르기우스 부대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요한 백작이 지휘하는 독일 부대와 연합했다. 1365년 가을, 제노바와 시에나 사이의 시골 지역을 황폐화시킨 뒤 다시 페루자를 침공해 타격을 입혔고, 1367년 피사로 돌아가 조반니 델라그넬로의 경호원 신분으로 비테르보에서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접견했다. 두 사람은 교황에게 오스만 베이국을 상대하는 십자군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368년 6월 5일, 용병 400명과 함께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에게 고용되었다.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교황령과의 전쟁에 동참한 페루자를 돕기 위해 그를 파견했다. 그는 아레초 인근에서 교황을 받든 독일 용병들에게 패배해 생포되었지만, 곧 피사 측이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 1369년 12월 1일, 레조 출신의 조반니 말라타카의 지휘 하에 피렌체군을 격파했지만, 이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피사에서 마찰이 생겨 그곳을 떠나야 했다. 1372년 6월 2일 루비에라 성에서 몬페라토 후작을 섬기던 란다우 백작 루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아스티 공략에 실패했다. 같은 해 가을, 비스콘티 가문에 전쟁을 선포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군대에 고용되어 피아첸차를 침공해 보르고 누오보 성을 포위했다. 이듬해 1월에는 밀라노군으로부터 볼로냐를 방어했고, 1373년 5월 7일 키에사 강변에서 비스콘티군을 섬멸했다.

1374년 6월 비스콘티 가문과 평화 협약을 맺고 교황으로부터 급료를 받은 뒤, 호크우드는 토스카나로 가서 피렌체, 피사, 시에나, 루카 등 여러 도시로부터 공물을 받아냈고, 1375년 7월 12일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평생 연금으로 1,200플로린을 받았다. 이후 로마냐의 코티놀 성과 바그나카발로 성을 영지로 삼아 군림하던 그는 1381년 자신의 영지를 페라라 후작 니콜로 데스테에게 판 뒤 피렌체로 돌아와서 피렌체 인근의 새로운 땅을 구매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그는 1379년 12월 피에로 델 알비치의 처형과 치옴피 가문의 봉기가 진압된 후 피렌체 시뇨리아가 임명한 "47인 위원회"에 초대되었다고 한다. 1380년 로마에 잉글랜드 병원을 설립했으며, 1381년 67,533플로린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1386년 12월, 피렌체 공화국에 고용되어 피렌체군을 이끌어 파도바 후작 프란체스코 1세 다 카라라와 연합해 베로나 통치자 안토니오 델라 스칼라와 대적했다. 1387년 3월 11일, 그는 7,000 ~ 9,000명을 거느리고 카스타냐로 전투에서 지형을 성공적으로 활용해 2배에 달하는 베로나군을 대적했다. 그러다가 자기 군대 뒤에 군기 사본을 남겨두고 기병대를 오른쪽 숲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자 군기 사본이 떨어졌고, 호크우드의 기병대는 실제 군기를 앞에 두고 베로나군의 좌익에 있는 숲에서 튀어나와 공격을 퍼부었다. 베로나군은 급히 후방에 있던 예비 기병 2,500명을 투입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도로가 막혀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그 사이에 적의 맹공을 받아 막심한 타격을 입고 패주했다. 이날 베로나 병사 716명이 전사하고 846명이 부상당했으며, 포병 전원을 비롯한 4,000명 이상의 병력이 생포되었다. 조반니 다 이솔라가 지휘하는 베로나 보병 및 농민 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항복을 거부했다가 전투 후 파도바군과 존 호크우드의 맹공으로 파괴되었다.

호크우드는 카스타냐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파도바에서 개선식을 거행했고, 1391년 피렌체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 후 죽음이 임박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자기 재산을 매각했지만, 1394년 3월 17일 피렌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 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요청으로 그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피렌체 시민들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호크우드의 승리를 기념하는 프레스코화를 세웠다. 1436년 피렌체 정부는 호크우드의 호화로운 묘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예술가 파올로 우첼로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3. 가족

  •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 잉글랜드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신상이 전해지지 않는다.
    • 안티오치카: 에식스의 이스트 혼돈의 지주이자 에식스와하트퍼드셔의 고위 보안관, 하원의장, 왕실 재무관이었던 존 티렐의 부인.
  • 돈니나 비스콘티: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사생아. 자넷, 캐서린, 앤, 존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 사생아
    • 존: 런던에서 성직자로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 토머스: 아버지처럼 용병대장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