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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昭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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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손오문관이며 자는 공원(恭遠)으로 예주 영천군 출신.

2. 생애

위소, 설영, 화핵, 양광과 함께 오서를 편찬해 후에 중서랑으로 임명되었다가 어떤 사건에 연관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화핵이 표를 올려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손휴듣지 않고 그를 죽인다.

고소, 제갈근, 보즐, 장승엄준을 칭찬하기도 했는데, 진수가 이러한 주소의 논의는 이러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고 여겨 전문을 보즐전에 기록해 두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명한 사대부들이 명성을 실추시키고 몸을 잃으며 집안을 기울게 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는 이유가 한 가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 대체적인 귀결을 요약하고 흔히 보이는 근심을 총결해 보면, 4가지 뿐이다.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이 첫째요, 명리를 다투는 것이 둘째요, 당파를 중시하는 것이 셋째요, 신속하게 하려고 힘쓰는 것이 넷째다.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주장하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고, 명리를 다투면 친구를 파괴하고, 당파를 중시하면 군주를 가리게 되며, 신속하게 하려고 힘쓰면 덕을 잃게 된다. 이 4가지가 제거되지 않으면 온전하게 할 수 없다.
당대의 군자 중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 또한 있는데, 어찌 유독 고인에게만 한정하겠는가!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출난 사람들을 논한다면 고예장, 제갈사군, 보승상, 엄위위, 장분위 같이 완미함을 이룬 자는 없었다.
논어》에서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은 성실하게 학생들을 이끄는 데 뛰어나다’ 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선행은 이루도록 해야 되지만, 다른 사람의 악행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고예장이 이것을 갖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가까이서 보면 온화하다. 그 말을 들으면 엄격하다' 라고 했는데, 제갈사군이 이 특징을 나타냈다. '공경하지만 안정되고 위의가 있지만 용맹하지는 않다' 라고 했는데, 보승상이 이러한 풍모를 나타냈다. 학문에서 녹을 추구하지 않고 마음에 이익을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엄위위와 장분위가 나타냈다.
이 다섯 명의 군자는 비록 덕행의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고, 지위의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있지만, 처세의 큰 방침에 이르러서는 네 가지를 범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똑같은 원칙을 따른 것이다.
과거 정서는 신분이 낮은 집안의 출신이며, 오찬은 목동 출신이었지만, 고예장은 그들의 뛰어난 점을 발휘시켜 육씨나 전씨와 같은 반열에 있게 했다. 이 때문에 재능있는 자가 깊숙한 곳에 있지 않았으며 풍속이 순후해졌다. 제갈사군, 보승상, 엄위위 세 군자는 옛날에 평민의 신분으로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고, 논의하는 자들은 각각 그 우열을 서술했다. 당초에는 앞에 엄위위, 다음이 보승상, 그 뒤가 제갈사군이었는데, 이후에는 공동으로 영명한 군주를 섬겨 국가의 사무를 관리했으며, 그들간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재간에 차이가 있었으므로 앞뒤의 서열은 필연적으로 그 처음과 상반되었다. 이것은 세상의 일반 사람들의 판단이 얇은 결과이다.
세 군자의 우정은 끝까지 손상되지 않았으니, 어찌 옛 사람의 사귐이 아닌가! 또 노횡강은 옛날 1만 명의 병사를 인솔해 육구에 주둔하면서 지켰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능력이 있는 자든 능력이 없는 자든 간에 누가 이것을 희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횡강이 죽자, 엄위위는 그 후임으로 선발되었는데, 자신이 장수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깊고 완곡하게 사양해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그는 구경으로 승진했고, 여덟 명의 각료를 취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영예는 자신을 빛나게 하기에 부족했고, 봉록 또한 자신을 받들기에는 부족했다. 두 명의 군자에 이르러서는 모두 상장의 지위가 되었으며, 부귀함이 극에 이르렀다. 엄위위는 공명을 구하려는 욕심이 없었고, 두 군자는 또 적절히 추천되지 않았으므로 각자 뜻하는 바를 지키며 자신의 명예를 보전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긍지를 갖고 다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당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이 세 군자가 이 풍모를 갖추었다. 또 장분위의 명성 또한 세 군자 다음이었다. 한쪽의 수비를 담당하고, 상장의 직무를 받은 점에서는 제갈사군, 보승상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국사에 참여해 공로를 논함에 있어서는 확실히 앞뒤가 있었기 때문에 작위의 영광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장분위는 이 위치에 있으면서, 결심은 이 부분을 명확히 할 수 있었고, 마음은 도의를 잃는 사욕이 없었으며, 일에서는 욕망을 채우려는 욕구가 없었다. 항상 조정에 올라갈 때마다 예의를 따라 행동했으며, 말의 어기는 진실되고 간절해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숙사는 비록 그와 친근하며 지위가 높았지만, 장분위의 패망을 걱정했고, 채문지는 비록 그와는 소원하고 지위가 낮았지만, 그는 채문지의 현명함을 칭찬했다. 자신의 태자배우자가 되었을 때, 태자의 예절을 받을 때는 마치 조문하는 것처럼 했으며, 의기가 양양했고, 충성스런 인물이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모두 생각한 것과 같았다. 도의를 지키고 기회를 봐서 하며, 고대의 것을 좋아한 선비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국가를 경영하고 군대를 관장하며 동분서주해 패왕의 공을 세우는 것에 있어서는, 이 다섯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도의를 실행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고 이름과 행동을 보전한 점에 있어서는 아득히 세상을 초월하고 사실 모범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을 조잡하게나마 논해 후세의 군자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그가 죽은 이후에는 손호 대에서 하정이 주살되었다가 손호가 성계의 일을 추적해 조사하면서 설영을 옥에 가뒀다가 광주로 쫓아내자 화핵이 올린 상소에서 나온 오서에 대한 편찬 경위에서 언급된다. 대황제(손권) 때 오서를 편찬하기 시작하다가 이후 소제(손휴) 때 주소를 포함해 위소, 설영, 양광 및 신하 다섯 명을 더 파견해 과거의 일을 찾아 구하도록 해 그들이 함께 산정한 것이 본말을 갖췄지만 주소가 양광과 함께 먼저 죽었다는 얘기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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