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0 09:55:59

줄리오 로마노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줄리오 로마노
Giulio Romano
파일:Tiziano_ritratto_di_giulio_romano.jpg
출생 1499년[1]
로마
사망 1546년 11월 1일
만토바 공국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직업 화가, 건축가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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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라파엘로의 제자이다.

2. 상세

본명은 줄리오 피피(Giulio Pippi).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2]와 함께 라파엘로의 수제자로 여겨지는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이 둘은 라파엘로가 유언장에서 자신의 사후 후속 처리인으로 직접 지명했다.

라파엘로 사후 공방을 물려받았고 티치아노가 그를 그린 초상화도 전한다. 위의 프로필이 바로 그 그림이다. 라파엘로의 '친구와의 자화상'의 유력한 모델 후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라파엘로 사후 스승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페니, 라파엘리노 델 콜레와 함께 바티칸의 '라파엘로의 방' 4곳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빼어난 드로잉은 오랜 기간 동안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었으며 그의 그림들을 라파엘로와도 작업했던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판화로 제작하여 전 유럽으로 이탈리아 스타일이 뻗쳐나가는데 큰 공헌을 한다.

라파엘로 사후 스승의 친구인 발다사레 카스틸레오네를 통해 만토바 후작(훗날 공작이 된다) 페데리코 2세 곤차가를 소개받았다. 새로운 로마를 만들 야망에 불타던 페데리코 곤차가는 1521년 12월 만토바 대사였던 카스틸리오네에게 편지를 써서 '라파엘로의 두 후예들(quelli dui garzoni di Raphael da Urbino)'을 잘 대접할 테니 우리 궁정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고 했다. 두 후예는 다름 아닌 로마노와 파토레이다. 1524년 8월이 되어서야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업이 끝났고 10월에 로마노는 만토바로 출발했다.[3]
파일:Palazzo_Te_Mantova_4.jpg
팔라초 델 테
파일:Ceiling_of_the_Room_of_the_giants_in_Palazzo_Te,_Mantua.jpg
'거인의 방'의 천장화

만토바에 있는 '팔라초 델 테'(테 궁전)라는 걸작 건축물을 남겼으며, 건물 안의 방(거인의 방, 프시케의 방 등)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로마노의 작품들이다. 여기에 티치아노의 로마노 초상화가 있다. 이 작업 이후에도 곤차가 가문의 별장인 마르미롤로 성(Castello di Marmirolo)의 개조와 신축 및 장식 작업을 주관하게 된다. 페데리코가 로마노를 데려온 이유 중 하나가 라파엘로의 '빌라 마다마' 작업에도 참여해보았기 때문이다.[4]

페데리코 공은 이후에도 로마노를 매우 아껴주었다. 안토니오 산 갈로가 성 베드도 대성당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자 평의원들은 로마노를 적임자로 물망에 올리고 로마노도 가려고 시도했으나 가족들의 반대와 로마노를 총애하던 페데리코 2세 곤자가의 동생이자 페데리코 공 사후 자녀들이 크기 전까지 섭정하고 있던 만토바 추기경이 그를 아껴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 결정적으로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인해 가지 못했으며 곧 사망하였다.

아들 하나가 있었고 존경하는 스승을 따라 라파엘로라고 이름 지어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일찍 죽었다. 로마노도 라파엘로처럼 많은 제자를 두었다.
[1] 1492년 생이라는 설도 있다.[2] '파토레'라고도 불린다.[3] 나중에야 오게 된 파토레는 이미 로마노가 자리를 다 잡은 뒤여서 그와 달리 큰 환대를 받지 못했다.[4] 참조: 구지훈, 페데리코 곤차가 2세와 줄리오 로마노가 꿈꿨던 '새로운 로마'로서의 만토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