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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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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독 경력

1.1. 현대 호랑이 감독

1989년 레버쿠젠에서 은퇴하고 영구 귀국하여 차범근 축구교실을 여는 한편, 1991년 현대 호랑이 축구단(現 울산 HD)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마찬가지로 차범근 감독의 전임 감독이 김호였다는 것.

그는 전임인 김호 감독의 '기술축구'와는 다른 '템포축구'를 선보여 감독 부임 첫 해인 1991년에는 현대의 K리그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가 감독으로 있던 중 그의 지도 방식과 크게 마찰을 일으킨 최강희가 결국 1993 시즌을 앞두고 갑자기 은퇴하였다. 사실 이 부분은 여러 모로 논란거리가 많은데, 자세한 것은 최강희 문서 참조.

1994년까지 현대 호랑이의 감독을 맡으면서 통산 55승 50무 46패를 기록했으나, 1994년 시즌 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고재욱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1.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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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전 핑안 감독

1998년 월드컵 본선 도중 중도 해고라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남긴 후 당시 강등 위기에 몰린 선전 핑안 감독에 시즌 중 선임된다. 계약 조건은 1998년 25만달러, 1999년 50만달러로 총액 75만달러에 계약했다. #

선임 당시 중국 갑급 A리그에서 꼴찌였던 팀을 강등 직전 순위인 12위로 끌어올리며 극적인 잔류에 기여했다.

1999시즌에도 잔류에 기여했으나 재계약에 실패하고 만다. #

이후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독일로 출국해 독일에서 주로 생활하고, 축구교실과 MBC 해설위원 이외에는 축구계에서 활동하지 않으며 야인 생활을 보낸다.

1.4.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2004년 시즌을 앞두고, 수원 블루윙즈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10년만에 K-리그로 복귀하게 된다. 다만, 재임 동안의 행보들을 보면...

2004 시즌 우승
2005 시즌 10위
2006 시즌 준우승
2007 시즌 3위
2008 시즌 우승
2009 시즌 10위
2010 시즌 15위(꼴찌) (사임 직전 순위)

1.4.1. 2004 시즌

2004년 첫 부임한 그는 그 동안 김호 감독 때 구축하던 스타일을 뒤엎고 피지컬을 활용한 축구로 수원을 개조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물론 선수층에 큰 변화를 주기 보다는 기존의 선수+애제자 김대의와 공격수 마르셀을 추가하였는데 시즌 초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즌 도중 아르헨티나산 센터백 하비에르 무사를 영입한 것이 대박이 터지면서 수비적인 부분을 보강해내고 후기리그 우승.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포항 스틸러스를 만나 이운재의 선방에 힘입어 수원의 3번째 트로피를 안기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펼쳐진 친선경기였던 스페인 FC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1.4.2. 2005 시즌

2005년엔 조병국, 권집, 이종민, 조성환, 고창현 등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던 어린 선수를 대신해 김남일, 전재운, 송종국, 마토 네레틀랴크 등을 영입하면서 경험 있고 즉시 성적을 뽑아낼 수 있고 자신의 축구 색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선수들로 꾸며내면서 A3 챔피언십[1], K리그 리그컵 우승을 얻어내지만 정작 중요한 리그와 아챔에서 죽을 쒔다. 빡빡한 일정에 첼시 FC 방한경기까지 치르며 부상자들이 속출하였고 특히나 선전원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내리막 길을 걸으며 2000년 5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전재운손정탁의 트레이드 건은 지금에서도 논란거리.[2]

1.4.3. 2006 시즌

2006년 전반기 역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퇴진 압박을 받게 되었고 특히 송종국의 무리한 투입과 더불어 연이어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그 와중에 2006 독일 월드컵MBC 해설위원으로 다녀오며 수원팬들의 강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기회를 잡지 못하던 선수들을 중심으로 컵 대회에 내보내면서 성적은 더 바닥을 기었고 초유의 서포터 보이콧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서는 이관우백지훈의 영입을 통해 반전을 보여줬고 전기리그 8위에서 후기리그 우승으로 도약했으며,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성남, FA컵 결승에서는 전남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물론 당시 우승을 못하면서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없던 팬들은 퇴진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1.4.4. 2007 시즌

2007년은 에두안정환의 영입과 나드손의 리턴으로 시즌 중반으로 향할수록 강한 수원을 만들어냈다. 경기 내용면에서도 노잼 소리를 듣던 이전에 비해 다재다능한 중앙 미드필더들 중심의 아기자기한 축구가 나왔고 경기를 했다 하면 3대0, 4대0이 나와 팬들 사이에서는 수원 사점 블루윙즈라 불릴 정도였다. 다만 당시 사용하던 전술이 워낙 볼위닝에 집착하는 전술이다 보니 체력의 손실이 강했고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파리아스 매직이 발동된 포항에게 패퇴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이로서 2년 연속 무관에 이르며 팬들은 다음 시즌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남일과 안정환 등이 팀을 떠나며 다음 시즌을 불안케 했다.

1.4.5. 2008 시즌

아마 차범근에게 지도자로서 최고의 한해라면 역시 2008년 시즌을 꼽을 것이다. 당시 수원은 김호 감독 시절 가지고 있던 8연승 기록을 갈아치웠고 99년과 2006년에 경신한 13경기 팀 무패최다기록을 18경기로 갈아버렸을 정도로 승승장구 하였다. 물론 시즌 중반 힘이 꺾이며 나락으로 떨어지자 당시 차범근 감독은 홍순학, 배기종 등 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하던 선수들을 중용하며 난관을 돌파하였다. 정규리그를 2경기 남겨둔 시점에서 슈퍼매치에서 패하며 FC 서울에게 리그 선두를 내주었으나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서울이 부산에 덜미를 잡힌 틈을 놓치지 않고 정규리그 1위를 쟁취하였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리그 컵까지 해서 두개의 트로피를 얻어내는 성과를 보여준다.

아마 그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서 이때가 가장 최고조의 순간이 아닌가 싶은데 그 이후 그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4.6. 2009 시즌

2009년 ACL 가시마 앤틀러스를 상대로 특유의 선 굵은 축구로 4-1로 발라 버리자 까방권을 획득하나 싶었으나 얼마안가 원정에서 3-0으로 캐박살났고 조2위로 16강에는 진출했으나 이번엔 나고야 그램퍼스에게 패해 탈락했다. K리그 올스타와 J리그 올스타 팀이 맞붙은 조모 컵에서 K리그 올스타를 이끌었고 J리그 올스타를 지휘한 가시마 감독 올리베이라와 3번째로 맞붙었으나 그야말로 볼 점유율, 패스웍, 전술 등 모든 부분에서 완패하며 4-1로 깨지자 K리그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었다.

2007년 K리그 신인왕에 오른 하태균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활약이 없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서동현은 2008년 대활약을 펼치며 각성 하는 듯 했으나 2009년 완전히 버로우해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울산에서 데려온 이상호는 2009 시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감이 있었으며, 그나마 2008년 시즌이 끝나고 신영록은 해외로 떠났다. 그런데 매년 드래프트 때면 선수는 참 괜찮게 잘 뽑으니 실로 미스테리.

혹자는 감독 하지 말고 유소년 축구단 단장을 하면 훨씬 많은 업적을 남길 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주최하는 차범근 축구 상에 선정된 유망주들의 면면을 보자면 박지성, 이동국, 기성용, 김두현 등.

성실하게 자기일 열심히 하는 선수들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에고가 강하거나 불성실한 선수들과는 마찰을 빚는 일이 자주 있었다. 최강희, 홍명보, 최영일, 나드손 등이 그 예. 다만 단순히 수원과 안 좋게 헤어졌다고 끼워 넣는 경우가 있는데 조재진조성환은 두터운 스쿼드에 밀려 기회를 많이 부여받지 못한 상황 속에 팬들의 노골적인 야유까지 곁들여져 수원 구단 자체를 싫어하게 된 케이스[3]고 리그에서 부진했던 안정환이나 항명파동 일으켰던 이천수는 순전히 본인 탓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매년 1개 이상의 우승컵은 가져오고 있어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던 2009년에도 FA컵의 우승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1.4.7. 2010 시즌

2009 시즌의 불명예를 만회하겠다며 야심차게 선수 영입을 했지만 결과는 그야말로...야심차게 뽑은 브라질 용병은 3명 다 시망급이고, 이 분 말고... 제주 유나이티드에다가 배기종과 박현범을 조공하고 강민수와 이동식을 받아왔다. 국가대표 팀에서는 유독 부진해서 욕을 엄청 쳐 먹지만 강민수는 리그에서는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주전을 먹는 선수이고, 그럭저럭 활약을 하였지만 이동식은 아름다운 2군행. 문제는 박현범으로 제주에서 포텐셜이 터졌다. 그나마 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염기훈유리몸.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운재의 부진까지 겹치면서[4] 결국 10라운드에 리그 15위, 즉 꼴찌를 기록한다.

혹자는 차범근이 잘못한 게 아니라 허정무 아들 강민수 탓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

또, 2010년 5월엔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자회견의 발언도 곧잘 까임 대상에 오르고 있다. 관련 내용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항목을 참조. 사람이 낙천적인건지 어떤 건지, 졸전을 펼치고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언을 하거나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지 못했다는 등의 발언도 자주해서 '자신의 전술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항상 선수 탓만 한다.'고 까이기도 한다. 물론 감독의 특이한 언행이나 언플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성적이 나쁘고 경기내용마저 신통치 않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2010년의 차범근의 상황은 선수 시절 명성을 감독하면서 다 깎아먹을 기세. 차범근이 감독직에서 부진하는 이유는 자기 스펙에 맞춰 작전을 짜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6]

1.4.8. 자진 사퇴

2010년 5월 20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후임 감독 선정을 위해 6월 6일 전북전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한 후 사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6월 6일에 수원의 패배를 지켜보며 쓸쓸히 사임하고 윤성효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

감독직을 넘긴 직후 2010 남아공 월드컵 SBS 해설위원을 하러 남아공으로 출국했다...

2. 기록

2.1. 울산 현대 호랑이

  • K리그 준우승 1회 : 1991
  • 아디다스 컵 준우승 1회 : 1993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2회 : 2004, 2008
  • K리그 준우승 1회 : 2006
  • FA컵 우승 1회 : 2009
  • FA컵 준우승 1회 : 2006
  • 리그컵 우승 2회 : 2005, 2008
  • 슈퍼컵 우승 1회 : 2005
  • A3 챔피언스컵 우승 1회 : 2005
  • 팬퍼시픽 챔피언십 우승 1회 : 2009

2.3. 주요 개인 수상

  • 프로축구 감독상 : 1994
  • AFC 선정 올해의 아시아 최우수 감독 : 1997
  • K리그 감독상 : 2004, 2008
  • 윈저어워즈 한국 축구 대상 감독상 : 2008
  • 축구인의 날 프로부분 최우수지도자상 : 2009
  • 하나은행 FA컵 최우수감독상 : 2009
  • 아시아 축구연맹 황금공로상 : 2010
  • 제1회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 스포츠부분 : 2011

2.3.1.

파일:K리그 클래식(2013~2017) 로고(가로형).svg 올해의 감독상
2003년 2004년 2005년
차경복
(성남 일화 천마)
<colbgcolor=#ffffa1,#5d5e00>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장외룡
(인천 유나이티드)
2007년 2008년 2009년
세르지오 파리아스
(포항 스틸러스)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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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중일 챔피언끼리 맞붙었던 대회[2] 수원이 전재운을 얻기 위해 내준 카드가 이종민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이종민으로 손정탁을 얻어온 셈...[3]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이 선수들이 수원을 나간 뒤 포텐이 터져서 수원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이다. 반면 수원은 하단에도 언급하다시피 세대교체에 큰 문제를 드러냈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차범근이 이들을 안고 갈 수 있었다면...[4] 2006년 이운재가 슬럼프에 빠졌을 땐 대신 골키퍼 장갑을 낄 박호진이라도 있었지만 2010 시즌엔 박호진마저 부상 여파로 제 기량이 아니었고, 결국 생초짜 신인인 하강진이 주전으로 골문을 지켜야 했다.[5] 이는 편견에 가까운 농담으로 하는 소리고, 현재 수원 수비진에 강민수 마저 없었다면 더 대책이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 곽희주와 리웨이펑을 위시한 기존 수원 수비진들의 기량 하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6] 모든 종목 막론하고 스타 선수 출신 감독들은 정작 감독으로는 말아먹는 경우가 사실 이 외에도 허다하다. 대표적으로 축구 부분에서는 로이 킨, 홍명보, 둥명보, 티에리 앙리 등이 있고, 최악의 사례는 역시 디에고 마라도나. 그 외에도 야구에서는 김한수 등이 대표적이다. 선수와 감독으로 둘다 잘했던 안첼로티, 지네딘 지단 등이 정말 예외적인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