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35년 7월 5일~([age(1935-07-05)]세). 태국의 군인·정치인. 前 방콕 시장.2. 생애
방콕 옆에 있는 톤부리의 화교 마을인 삼레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다가 출라촘클라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정보 병과를 택해[4] 1962년에 육군 정보부에서 근무하고, 1970년 미국에 유학을 가 육군 행정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잠롱은 1970년대, 태국육군사관학교(출라촘클라오) 7기 졸업생이 주축이 된 소장 사조직 청년 투르크(Young Turks, กลุ่มยังเติร์ก)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극우 단체 '빌리지 스카우트'의 집회와 시위에 신상을 숨긴 채 참여하는 등 우익 활동도 벌였다. 1976년 10월, 청년 투르크의 부대들이 방콕에 주둔함으로써, 10월 6일 쿠데타가 성공했다. 이들은 경찰과 국경수비대 그리고 극우 단체들과 달리 그날 오전 탐마삿 학살(훅뚤라)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군사 쿠데타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여 귀중한 정치적 경험을 얻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1976년과 77년 쿠데타의 수혜자였으며 이후 태국 정치의 실권을 잡고 통제하고 있었다. 그 일원이었던 잠롱은 1977년에 육군 중령으로 크리앙삭 수상의 비서를 지냈고 1978년에 상원 의원을 지내다가 1979년에는 쁘렘 띤나술라논[5] 수상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1981년 4월, 청년 투르크는 다시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만우절 쿠데타), 쁘렘의 비서실장이었던 잠롱은 그 무렵 구성원들과의 불화로 조직을 떠났다. 왕실이 쁘렘에 대해 공개적인 지지를 천명하고 쿠데타 시도가 실패하자 청년 투르크의 권세는 크게 무너졌다. 하지만 잠롱은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잠롱은 하원이 불가피한 낙태권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쁘렘과 갈등을 빚는다. 그는 쁘렘이 이 법안을 자유 낙태로 보는 데 반대하면서 비서실장을 사임하고 상원에 로비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1983년 잠롱은 육군 총사령관의 반동적인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군 내부에서 민주주의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적으로 아싸에 불과했지만 그의 청렴성에 대한 대중의 믿음과 방콕 도시국(BMA)의 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그를 급속도로 부상시켰다.
이제 잠롱은 군 내부자에서 군 외부의 관계자로 위상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5년 초대 방콕 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10월 1일에 입후보가 이루어졌으나 잠롱은 그날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하고 이 높은 계급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틀 뒤에야 육군에 사표를 제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오늘날까지 그가 '잠롱 소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그는 군 계급의 가치를 잘 알고 그것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전략을 통해 군 내부의 유권자 뿐만 아니라 수많은 참전용사들 그리고 60만 명에 달하는 가장 큰 3개 군인 '대중단체'의 회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비로소 초대 방콕 민선 시장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월급을 자신이 쓰지 않고 전부 자선 단체에 기부하였고, 비가 오면 물난리를 겪는 방콕의 하수도, 도로 정비를 하고 24시간 이내에 침수를 막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건강과 일자리를 위해 힘썼고, 시장과 채식 가게[6]를 차리고 부정 부패를 없앴다.
검은 10월 사건 당시 프랑스 뉴스의 보도 |
민주화가 된 뒤 8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고, 1994년에 태국 연립 정부의 부총리에 오르고 1996년부터 팔랑탐 당 당수직에 복귀해 국민들을 위해 힘 쓰던 중 3번째 방콕 시장에 도전했다가 낙선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래도 정계 은퇴 이후에도 탁신 친나왓을 지원해서 총리로 만들어주는데 공헌했다.[8]
3. 기타
청백리의 대명사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방콕 시장 시절, 거리를 깨끗이 하고 부정부패를 쓸어내어 태국어로는 '나이시안', 영어로는 '미스터 클린(Mr. Clean)'으로 불리었다.한국에서는 1990년 4월에 MBC가 방콕 현지에서 촬영해 제작한 '인간시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태국의 청백리 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그 해 10월 경실련과 시사저널의 공동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강영훈,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고건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과 면담하고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후 1995년까지 경실련 등 NGO의 초청과 명예 학위 수여식 등으로 거의 매년 한국을 찾았는데, 특히 태국 농업 기술 발전을 위해 강원도 원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해 유기농 농법을 비롯한 농업 기술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잠롱과 그의 의형제인 한국인 김영성이 쓴 수필과 시를 모은 책인 '잠롱과 짬렁'이 1994년에 국내에 출판된 바가 있다.
[1] 국립국어원의 태국어 표기 세칙에 의하면 '짬롱 시므앙' 또는 '참롱 시므앙'으로 표기된다.[2] 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타이 족부터가 월계(越系) 민족인만큼, 귀족 혈통이라면 알음알음 한식(漢式) 성명을 짓고 다닌다. 대표적인 사례가 치우다신(丘達新).[3] 물론 잠롱의 경우는 귀족 혈통이라서가 아니라, 화교 아버지와 중국 이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순수 중국계 혈통이기에 원래부터 중국어 이름이 있다.[4] 일선의 야전 장교와 달리, 해외 유학도 갈 수 있고 뭔가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 선택했다고 한다.[5] 쁘렘은 2019년 만 99세로 죽을 때까지 추밀원장과 섭정 등을 지내면서 태국 정치의 막후 실세로 군림했다.[6] 그는 70년대 후반부터 독실한 불교 신자로,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살아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7]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쁘렘의 후임자로 지목되어 민주적인 절차로 집권한 첫 총리였다.[8] 참고로 90년대 중반에 탁신을 천거해서 정계로 영입시킨 사람도 바로 잠롱이고 2001년 총선때 선거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에 갈라져서 현재는 탁신과는 원수지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