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6 23:17:26

창원 유씨


1. 개요2. 유(兪)씨의 유래3. 기계유씨의 유래4. 기계유씨의 분관5. 창원유씨의 유래6. 창원유씨의 시조
6.1. 직제학공파6.2. 판서공파
7. 창원유씨의 발자취

1. 개요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경상남도 창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서 9세기 전반에 신라에서 아찬을 지낸 유삼재를 시조로 삼고 있는 기계유씨(杞溪兪氏)에서 파생되었다. 기계유씨 13세 유숙손(兪叔孫)을 입향조(入鄕祖)로 삼고 있으나, 그 이하 3대의 세계(世系)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동성동본이면서도 단일세계를 구성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직제공파와 판서공파 두 계통이 각각 기계유씨 6세를 1세로 삼아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즉, 조선 초기 5세 때부터 수원군에 세거해온 직제공파는 고려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유섭(兪涉)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6세 때부터 천안군에 세거해온 판서공파는 고려 판도사 판서를 지낸 유연(兪演)을 시조로 삼고 있다.

2. 유(兪)씨의 유래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받아들인 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건국 초기인 1세기 무렵부터,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부터,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은 후대에 거의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부터 한자 성이 보급되어 갔다.
신라는 7세기 초 왕실을 시작으로 7세기 후반부터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 계층은 점차 성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서 왕족(성골 및 진골) 다음의 신분인 6두품 귀족이었던 유삼재가 임금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기계유씨의 유래

유(兪)씨의 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통일신라시대이지만, 본관이 처음으로 정해진 것은 고려 초기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940년경 전국의 군현 명칭을 바꾸고 통일에 기여한 공신과 지방 호족에게 성을 내려주는 한편, 각 군현의 지배층(향리, 호장 등)에게 성을 정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유이민을 정착시켜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효과적인 징세·조역(調役)을 위해서 본관제도를 실시했다. 그에 따라서 당시 유삼재의 4세손인 호장(戶長) 유의신(兪義臣)이 세거하고 있던 기계현(杞溪縣)의 지명이 출신지역을 나타내는 본관으로 정해져서 기계유씨의 본관이 유래되었다.

4. 기계유씨의 분관

기계유씨의 본관이 처음 정해지고 나서 그 후손 가운데 일부가 여러 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거주지를 본관으로 편호(編戶, 호적을 편성하는 것)함에 따라 분관(分貫, 본관이 나누어지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후손의 일파가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별본기계유씨세계」및「기계유씨세계초」 상에는 10세 때 천녕을 필두로 13세 때 장사, 15세 때 무안 및 강진, 16세 때 창원이 각각 분관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다만 창원은 16세가 아니라 13세 때 분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유(兪)씨의 본관 수는 2000년도 기준으로 32개이나, 탐진(耽津) 유씨가 2017년 기계 유씨의 세계로 편입했기 때문에 31개가 현존한다. 그 가운데 유래를 알 수 있는 것은 탐진을 제외하면 기계, 강진(康津), 고령(高靈), 무안(務安), 인동(仁同), 장사(長沙), 창원(昌原), 천녕(川寧) 등 8개뿐이다. 다음 표는 2000년 기준 유(兪)씨 본관별 인구 현황이다. 2000년 기준으로 인구 순위는 전국 286 성씨 중 40위이다.

1) 기계 113,430명 63.6% 2) 경주 9,502명 5.3% 3) 고흥 9,131명 5.1 4) 창원 8,007명 4.5%
5) 진주 7,789명 4.4% 6) 무안 6,629명 3.7%
2000년도 기준 유(兪)씨 본관별 인구 현황
번호 본관 가구(호) 인구(명) 비율(%) 번호 본관 가구(호) 인구(명) 비율(%)
계 54,953 178,209 100.0 18 김해 216 666 0.4
1 기계 34,984 113,430 63.6 19 천녕 188 658 0.4
2 경주 2,905 9,502 5.3 20 안성 191 616 0.3
3 고흥 2,836 9,131 5.1 21 단양 171 565 0.3
4 창원 2,442 8,007 4.5 22 달성 180 545 0.3
5 진주 2,477 7,789 4.4 23 금산 147 471 0.3
6 무안 2,092 6,629 3.7 24 광주 149 467 0.3
7 강원 1,501 4,871 2.7 25 남원 144 461 0.3
8 풍산 737 2,292 1.3 26 청주 128 438 0.2
9 강진 467 1,589 0.9 27 해주 123 428 0.2
10 인동 452 1,514 0.8 28 장사 107 349 0.2
11 파평 438 1,508 0.8 29 상주 105 344 0.2
12 강화 372 1,117 0.6 30 예산 93 341 0.2
13 하회 307 1,128 0.6 31 탐진 32 83 -
14 부안 241 795 0.4 32 사천 2 5 -
15 공주 233 758 0.4 기타 7 41 -
16 고령 238 735 0.4 미상 31 173 0.1
17 밀양 216 701 0.4

5. 창원유씨의 유래

6. 창원유씨의 시조

6.1. 직제학공파

6.2. 판서공파

유언겸
풍세면 남관리 공수골에는 효자 유언겸이 살았습니다. 한 겨울 어느 날, 유언겸의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했습니다. 유언겸은 냇가로 뛰어가서 무릎을 꿇고 얼음을 깨려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온기에 얼음이 녹고,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유언겸은 잉어를 잡아 어머니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 후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배를 먹고 싶어했습니다. 유언겸은 호랑이를 찾아 나서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등에 올라타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유언겸을 태우고 집으로 가면서 하나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배나무가 있었고, 겨울이라도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 위에는 까치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보니 까치집 안에는 커다란 배가 있었습니다. 유언겸이 배를 가져다 내려오자 호랑이가 다시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유언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비의 본심을 지키며 학문의 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진 행적은 이웃들 사이에 자자하였습니다. 모친을 잃고 나서도 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들른 적이 없었으며, 여막에서 물을 길어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막 부엌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솟아나와 식수와 용수를 보충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웃 사람들 사이에서 효성이 감동시킨 일로 여겨져 유언겸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도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유언겸은 이들의 접근에도 개의하지 않고 평소대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들은 적의를 나타내지 않고 여막 앞에 앉아 살았습니다. 그 이후 호랑이들은 여막 주변의 가축을 해치지 않고 먼 곳에서 산림에서 사냥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축처럼 여막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유언겸이 조석을 드릴 때 호랑이들도 함께 엎드려 조아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 때 도적이 여막에 들어와 곡식을 약탈하려 했지만 호랑이가 포효하여 도적은 기겁하고 도망쳤습니다. 또한 전염병을 앓는 중인 사람이 여막 가까이 왔을 때도 호랑이가 쫓아보내어 유언겸을 보호했습니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 때 음식 냄새가 역귀를 불러들인다고 여겨져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유언겸은 그대로 제사를 지내자 마을 사람들이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들이 마을로 내려가 동네를 포효하며 돌아다닌 후 이상하게도 모든 병자가 나아지고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확인한 마을 원님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습니다.

7. 창원유씨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