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HLKZ-TV의 드라마이자 한국 최초의 TV 드라마.2. 제작 및 의의
TV 수상기 보급 못지 않게 HLKZ-TV의 골머리를 썩힌 것은 프로그램 제작 여건이었다. 방송 장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을 리 만무했고, 스튜디오 역시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약 40여 평에 불과했던 당시 스튜디오에서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프로그램 제작 인력 역시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비록 일제강점기 때였지만, 라디오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축적돼 있었지만, TV는 라디오 제작 문법과는 달라 라디오 제작 인력이 TV 제작에 투입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 역시 일천하긴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방송 제작을 위한 지침서도 미국에서 가져 온 몇 권이 전부였다. 최창봉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우리나라엔 TV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를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어요. 동료들과 '텔레비전 프로덕션'이라는 외국책을 공동으로 번역해가면서 연출이 뭔지 공부하던 시기였죠."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매일 2시간씩(7시~9시) 생방송을 내보냈다는 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TV 드라마 제작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드라마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을 둘러싸고 방송국 내에서부터 찬반이 갈리는 등 적잖은 내홍을 겪어야 했다. 드라마 제작이 가져 올 적잖은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처지에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KBS 제작위원 이기하는 "드라마만은 시간이 흘러가도 편성에서 빠져 있어 항상 마음이 불편하였다. 편성할 때마다 애원도, 싸움도, 그리고 아양도 부려봤지만 매번 허사였다. 그럴수록 방송직원들의 대다수는 꼭 드라마를 방송해야 한다고 우겨왔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방송하기에 어려움이 많으니 뒷날로 하자는 대답 뿐이어서 드라마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려니 생각하며 지나갔다. 하긴 좁은 스튜디오 안에 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낼 재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출자 자신이 드라마를 연출한 능력 또한 없던 터이기도 했다. 그저 연극하던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적 특성에 맞춰 카메라에 담아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거리에 걸린 몇 대의 수상기, 그 조그마한 통 속에서 사람이 나와 떠드는 것 자체가 구경거리일 수밖에 더 있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컸던 것이었는지 이로부터 몇 개월 후, 드라마 제작에 시동이 걸렸고, 한국 최초의 TV 드라마 <천국의 문>이 선을 보였다. 이 세상에서 도둑질을 하던 사람들이 죽어 저 세상에서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주요 줄거리로, 출연자가 달랑 2명에 불과한 15분짜리 드라마였다. 이가하는 <천국의 문>이 생방송으로 방영되던 날의 풍경과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 평가
방송 날이 왔다. 그 날은 다른 프로그램은 눈밖이다. 스탭 전부가 열심히 자기 일을 찾아 연출자의 지시에 따랐다. 세트는 조각지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 마련했고 카메라는 종일의 연습과 리허설을 보며 자기가 찾아야 할 그림을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블로킹 선을 그었다. 마이크는 카메라를 피해 움직일 장소를 찾았다. (…) 나는 귀로 연출자의 제시를 받고, 방송을 진행하며 양 다리에 카메라 케이블을 감아 카메라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케이블을 당겨 주어야 하는 1인 3역의 작업을 해야 했다. 모니터는 볼 수도 없었고 볼륨을 조절할 수도 없었다. 큐사인을 받으면 시작이 됐는데도 방송이 끝난 시간은 기억에 없다. 사람들이 눈 앞에 스쳐가는데, 어떤 이는 흥분했고 어떤 이는 웃음을 담았다.
오명환은 <천국의 문>이 선택된 것은 그나마 내용이 한국 정서에 들어 맞았고 등장인물과 장면이 적어서 연출상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성을 지닌 작품 때문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두 주인공의 천국 장면 등장장면에서 구름장면을 넣어 그 당시 기준으로는 첨단의 효과를 냈는데 이것이 TV 드라마의 최초의 특수효과(트릭)장면으로 기록된다. 최창봉은 연출계획을 짜는 데 무려 두 달 남짓 걸렸다고 한다. 대본을 계속 고치는 과정에서 종이를 이리저리 오려붙이기를 수십 번 계속하였는데 오늘날 연출가들의 최종 콘티를 둘러싼 고독한 연출작업의 첫 표본이 되었다.
1956년 9월엔 <사형수>란 드라마도 방영됐다. 하지만 당시 드라마 제작 환경을 말해주듯 드라마 제작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으며 <사형수>역시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TV드라마는 연극 작품을 TV카메라로 중계했다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실제로 <사형수>는 동인제 극단 ‘제작극회’가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TV카메라와 콘티만 곁들여 전파를 탔다. 세트도 사형수가 갇혀 있는 감방 하나면 족했다. 의상도 별게 없다. 감옥의 간수는 방송국 수위의 근무복을 빌려 입었고 신부는 양복에 흰 목띠만 두르면 그만이었다. 주인공인 죄수도 잠옷에 죄수번호를 그려 출연했다. 에어컨 장치는 당연히 꿈도 못 꿔[1] 스태프들은 섭씨 40℃를 오르내리는 스튜디오에서 백열전구 조명과 싸웠고 TV 카메라의 과열을 막기 위해 스튜디오 한 구석에 얼음덩이를 갖다 놓기도 했다.
1956년 9월엔 <사형수>란 드라마도 방영됐다. 하지만 당시 드라마 제작 환경을 말해주듯 드라마 제작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으며 <사형수>역시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TV드라마는 연극 작품을 TV카메라로 중계했다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실제로 <사형수>는 동인제 극단 ‘제작극회’가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TV카메라와 콘티만 곁들여 전파를 탔다. 세트도 사형수가 갇혀 있는 감방 하나면 족했다. 의상도 별게 없다. 감옥의 간수는 방송국 수위의 근무복을 빌려 입었고 신부는 양복에 흰 목띠만 두르면 그만이었다. 주인공인 죄수도 잠옷에 죄수번호를 그려 출연했다. 에어컨 장치는 당연히 꿈도 못 꿔[1] 스태프들은 섭씨 40℃를 오르내리는 스튜디오에서 백열전구 조명과 싸웠고 TV 카메라의 과열을 막기 위해 스튜디오 한 구석에 얼음덩이를 갖다 놓기도 했다.
어렵사리 TV 드라마의 시대를 열긴 했지만, HLKZ-TV는 더 이상 TV 드라마를 제작하지 못했는데, 이는 1959년 2월 2일, 방송국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4. 기타
- 후일담으로, 그 때 드라마 촬영은 앞서 얘기했듯 연극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즉 드라마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다보니 요즘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들었다고 한다. 작은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한 탤런트는 NG를 내고 그 여파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집으로 도망가버려서 현장에서 갑자기 대역을 찾느라 난리가 난 적도 있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갑자기 대타를 찾는 것처럼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대사뿐만 아니라 소품에 대한 관리도 철저해야 했다. 한 탤런트는 드라마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사고를 친 일도 있다. 전화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전화벨이 울리자 당황하면서 손가락으로 전화기 모양을 흉내 내 촬영했던 것이다. 그 드라마는 특히 정부에서 반공 드라마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던 작품이라 NG를 낸 탤런트가 나중에 큰 곤욕을 치렀다는 후문도 있다.
[1] 1950년대 후반 기준으로 에어컨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치품이었다. 아니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사치품 취급이었다. 참고로 선풍기가 대중화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고, 에어컨이 대중화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2] 이순재는 방송 데뷔 전에도 이미 1956년에 연극으로 데뷔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