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뉴스 제 1976호 - 철도의 날 |
철도의 날 제[age(1894-06-28)]주년
대한민국의 기념일. 매년 6월 28일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철도의 의의를 높이고 철도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지정되었다. 본래는 한국 최초의 철도노선인 경인철도의 개통일인 양력 1899년 9월 18일에서 가져온 양력 9월 18일이 철도의 날 이었다. 그렇지만 2018년에 철도를 관장하는 한국 최초의 정부조직인 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1][2]이 조직된 음력 1894년 6월 28일에서 가져온 양력 6월 28일로 변경되었다.
주관부처는 국토교통부이며, 행사는 한국철도공사 사장·국가철도공단 이사장·전직 장관·기관장 등 관련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전역 인근의 철도기관 공동사옥에서 중앙 기념식을 치르고, 각 지사에서도 별도의 기념행사를 한다. 또 100만㎞ 무사고 운전을 달성한 기관사들에게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하는 등 철도 발전에 공헌한 종사원들을 대상으로 훈장·포장·표창 등을 수여한다.
이 날은 철도공무원들과 정년퇴직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철도 업무에 몸바친 순직자들의 영령을 추모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각종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1999년은 철도의 날 100주년이었기에 철도청에서 당시 전국구급 100개역을 지정해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를 만든 적이 있었다.[3] 내일로가 생기면서 인지도가 올라가 현재는 약 340개 가량의 스탬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철도 동호인이나 철도에 관련된 인물들이 아니면 거의 잊혀진 날이 되었다. 주요 언론 매체에서도 언급이 거의 없다.
2. 해외의 유사한 기념일
대만에서는 6월 9일을 '철로절'로 지정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10월 14일을 '철도의 날[4]'로 지정했다. 미국에서는 암트랙이 5월 첫주 토요일을 철도의 날(National Train Day)로 정하고 전국 철도역에서 행사를 진행한다.3. 철도의 날 변경 논란
문재인 정부는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2018년 5월 8일 국무회의를 통해 철도의 날을 기존의 9월 18일에서 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 이 설립된 6월 28일로 변경했다. # # 이와 관련해서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목적으로 80여 년 이상을 이어온 9월 18일 '철도의 날'을 갑자기 정확한 검증도 없이 6월 28일로 옮긴 것에 대해 학계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어났다.철도의 날 변경을 전후해 철도에 관심이 많아 철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다양한 책을 출판한 배은선 前 철도박물관 관장[5]을 비롯해 최연혜 前 한국철도공사 사장[6], 그 외 다양한 역사학자나 철도 전문가들의 반론과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특히, 2019년 출판된 배은선 前 철도박물관장의 저서 "기차가 온다"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있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1899년 9월 18일은 조선 최초로 철도 운영을 시작한 날로써 '국내 최초의 철도 운행일'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 바꾼 6월 28일 철도의 날은 3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그 전에 문재인 정부가 주장하는 개정 이유를 알아보면, 1894년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가 의정부 산하 공무아문에 초기적인 철도청 직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날짜가 음력으로 6월 28일이라서 일제에 의하여 건설된 1899년 경인선 개통일은 일제의 잔재 라고 보는 엉뚱한 착각 때문에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한 날짜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큰 이유가 되었는데, 여기까지만 보더라고 문제점이 넘쳐난다.
먼저 첫 번째 문제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갑오개혁'의 자주성이 우리 즉, 조선에게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갑오개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군대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해 친일파를 앞세워 조선에서 진행한 개혁을 의미하는데, 친일파와 일본군의 압박에 의해 개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개혁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설사 그 개혁을 원했던 개혁파들의 세상이 유토피아처럼 평등하고 사상과 내용이 보편타당할지라도 그 절차는 결코 정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초보적인 철도청에 과연 조선인의 관리가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결론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양력) 1896년 7월 17일 '승정원일기'에 농상공부 협판 이채연을 감독경인철도사무에 임명했으며, 1898년 7월 7일 '조선왕조실록'에 전환국장 이용익을 철도사 감독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했다 라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인이 철도청에서 관리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조선인 관리가 없는 초보적인 조직을 과연 우리는 조직으로 볼 수 있냐는 것이다.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 문제점은 백번 양보해서 위의 문제점을 모두 무시한다고 해도 날짜에 대한 것이다.
'직제가 만들어진 날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1894년 6월 28일이다. 따라서 정말로 제대로 된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그 초보적 직제 신설일을 기념일로 하고 싶으면 음력 1894년 6월 2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7월 30일로 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냥 6월 28일이라는 날짜 그 자체를 강조하고 싶었다면, 번거롭더라도 추석과 설처럼 매년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념일을 달리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이난 그냥 근본도 없는 양력 6월 28일을 철도의 날이라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인철도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건설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대부분을 미국이 만들었고 일본은 그걸 큰돈으로 구입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경인철도가 조선이 건설하고자 했던 수많은 철도의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었다. 절차가 외국의 힘을 빌린 것일 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조선의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당시 조선은 그럴 만한 돈도, 기술도 없기에 외세의 힘을 빌려야 했으며 외세가 철도를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조선에서는 완공 후 15년간의 철도 운영 권리와 철도 부지를 제공하는 현재의 '민간투자사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에서는 철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철도가 개통한 뒤 조선에서는 15년 뒤 일제가 사들였던 철도를 매입하고자 준비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10여 년 뒤인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무산되고 만다.
1899년 9월 19일 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당일 인천에서 거행된 경인철도 개업식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행사에 직접 참석하여 축사와 만세삼창을 외친 것으로 되어있다. 즉, 이러한 내용은 이 행사가 단순히 '경인철도회사'만의 행사가 아닌 대한제국의 위대한 주체적 행사였다는 점을 시사하는 바이며 대한제국은 이 사업의 발주 주체로써 직접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경인철도 부설 경위와 1899년 9월 18일 당일의 정황을 볼 때 이 모두를 일제의 한반도 침략행위로 단정하며 판단하기에는 모순이 많고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물론 계약조건이 조선 입장에서는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어떡하겠는가? 조선에서는 당장 철도를 원하지만 자체적으로 만들 돈과 기술이 없으니 계약조건이 나쁘더라도 당장 만들어 주겠다는데 바로 계약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따라서 1937년 제정되어 1944년까지 거행된 일제의 9.18 철도의 날 행사가 비록 그들의 식민통치와 수탈에 악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9월 18일을 6월 28일로 바꾼 행위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을 오히려 역행하는 행위이며, 조선인 관리도 없는 직제의 신설일을 철도 창설일로 인정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근본도 없는 양력 6월 28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기념일로써의 기본도 갖추지 못하는 날이 때문에 철도의 날을 9월 18일에서 6월 28일로 바꾼 행위는 매우 아쉬운 조치로 응당 철도인의 날이 되어야 할 철도의 날이 몇몇의 주장과 정치적인 입김 그리고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철도의 날이 바뀐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 배은선 저자의 「기차가 온다」의 207~213P를 요약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 바꾼 6월 28일 철도의 날은 3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그 전에 문재인 정부가 주장하는 개정 이유를 알아보면, 1894년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가 의정부 산하 공무아문에 초기적인 철도청 직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날짜가 음력으로 6월 28일이라서 일제에 의하여 건설된 1899년 경인선 개통일은 일제의 잔재 라고 보는 엉뚱한 착각 때문에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한 날짜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큰 이유가 되었는데, 여기까지만 보더라고 문제점이 넘쳐난다.
먼저 첫 번째 문제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갑오개혁'의 자주성이 우리 즉, 조선에게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갑오개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군대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해 친일파를 앞세워 조선에서 진행한 개혁을 의미하는데, 친일파와 일본군의 압박에 의해 개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개혁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설사 그 개혁을 원했던 개혁파들의 세상이 유토피아처럼 평등하고 사상과 내용이 보편타당할지라도 그 절차는 결코 정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초보적인 철도청에 과연 조선인의 관리가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결론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양력) 1896년 7월 17일 '승정원일기'에 농상공부 협판 이채연을 감독경인철도사무에 임명했으며, 1898년 7월 7일 '조선왕조실록'에 전환국장 이용익을 철도사 감독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했다 라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인이 철도청에서 관리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조선인 관리가 없는 초보적인 조직을 과연 우리는 조직으로 볼 수 있냐는 것이다.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 문제점은 백번 양보해서 위의 문제점을 모두 무시한다고 해도 날짜에 대한 것이다.
'직제가 만들어진 날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1894년 6월 28일이다. 따라서 정말로 제대로 된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그 초보적 직제 신설일을 기념일로 하고 싶으면 음력 1894년 6월 2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7월 30일로 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냥 6월 28일이라는 날짜 그 자체를 강조하고 싶었다면, 번거롭더라도 추석과 설처럼 매년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념일을 달리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이난 그냥 근본도 없는 양력 6월 28일을 철도의 날이라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인철도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건설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대부분을 미국이 만들었고 일본은 그걸 큰돈으로 구입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경인철도가 조선이 건설하고자 했던 수많은 철도의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었다. 절차가 외국의 힘을 빌린 것일 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조선의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당시 조선은 그럴 만한 돈도, 기술도 없기에 외세의 힘을 빌려야 했으며 외세가 철도를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조선에서는 완공 후 15년간의 철도 운영 권리와 철도 부지를 제공하는 현재의 '민간투자사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에서는 철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철도가 개통한 뒤 조선에서는 15년 뒤 일제가 사들였던 철도를 매입하고자 준비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10여 년 뒤인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무산되고 만다.
1899년 9월 19일 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당일 인천에서 거행된 경인철도 개업식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행사에 직접 참석하여 축사와 만세삼창을 외친 것으로 되어있다. 즉, 이러한 내용은 이 행사가 단순히 '경인철도회사'만의 행사가 아닌 대한제국의 위대한 주체적 행사였다는 점을 시사하는 바이며 대한제국은 이 사업의 발주 주체로써 직접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경인철도 부설 경위와 1899년 9월 18일 당일의 정황을 볼 때 이 모두를 일제의 한반도 침략행위로 단정하며 판단하기에는 모순이 많고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물론 계약조건이 조선 입장에서는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어떡하겠는가? 조선에서는 당장 철도를 원하지만 자체적으로 만들 돈과 기술이 없으니 계약조건이 나쁘더라도 당장 만들어 주겠다는데 바로 계약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따라서 1937년 제정되어 1944년까지 거행된 일제의 9.18 철도의 날 행사가 비록 그들의 식민통치와 수탈에 악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9월 18일을 6월 28일로 바꾼 행위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을 오히려 역행하는 행위이며, 조선인 관리도 없는 직제의 신설일을 철도 창설일로 인정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근본도 없는 양력 6월 28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기념일로써의 기본도 갖추지 못하는 날이 때문에 철도의 날을 9월 18일에서 6월 28일로 바꾼 행위는 매우 아쉬운 조치로 응당 철도인의 날이 되어야 할 철도의 날이 몇몇의 주장과 정치적인 입김 그리고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철도의 날이 바뀐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 배은선 저자의 「기차가 온다」의 207~213P를 요약 재구성하였습니다
참고로, 논란의 요인을 제공한 경인선은 대한제국이 미국인 제임스 모스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했다가, 자금난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 공사를 이어나간 끝에 개통시켰다. 당시 미국 철도는 표준궤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철도규격이 표준궤로 정해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인선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기타
- 경인선 개통 4년 전이자 청일전쟁 중이던 1895년, 일본군이 평양~남포 간을 잇는 경편철도를 건설한 적이 있다. 물론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부설한 임시철도였기에, 최초의 철도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표준궤로 개궤하여 평남선으로 사용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현재의 국토교통부 철도국 또는 국가철도공단으로 볼 수 있다.[2] 국가철도공단은 조직의 기원을 1894년 6월 28일 철도국 설립일로 보고있다.[3] 정확히는 철도박물관까지 합쳐 101개가 제작되었다.[4] 1872년 10월 14일에 일본 최초의 철도인 신바시역(지금은 폐지된 시오도메조차장)과 요코하마역(지금의 사쿠라기쵸역)을 이은 노선(지금의 도카이도 본선의 일부)이 개통했고, 1921년 10월 14일 철도개업 50주년을 기념해 도쿄역 마루노우치 북뽁 입구에 철도박물관(초대)이 개관한 것을 기념해, 이듬해인 1922년 철도성이 '철도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제정했다.[5] 논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송탄역 역장이었다. 이후 2022년 2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철도박물관장을 지냈다.[6] 정계 입문 전에 철도청 차장과 한국철도대학 총장, 한국철도공사 사장 등을 역임해 철도를 업으로 삼았다는 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