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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윤구
崔允龜[1], 崔允 등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최창강(崔蒼岡), 최윤규(崔允奎, 崔允珪), 최운구(崔雲龜), 최현구(崔鉉九), 최윤구(崔允求), 최윤갑(崔允甲).최동경(崔東京)
출생 1885년 8월 23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사망 1942년 9월 10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1990), 건국훈장 독립장(2005)
묘소 대성산혁명열사릉
1. 개요2. 생애3. 상훈.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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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윤구는 일제강점기에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에서 대한통의부,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일제의 시설을 파괴하였으며, 동북인민혁명군과 연대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 참모장을 맡아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885년 8월 23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雲門面) 지촌리(芝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여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 한족회(韓族會)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이 연합하여 1922년 1월 결성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1922년 8월 확대 개편된 독립군 조직이다.

1929년 5월 친일파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리 제거, 악질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삼은 조선혁명군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2년 3월 만주의 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중대장으로서 봉천성 흥경현 영릉가(永陵街)[2]·흥경성(興京城)[3]·흑우(黑牛)[4]·목기(木奇)[5] 등지에서 만주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 1월 일제가 부설한 심해선(瀋海線) 철도를 파괴시키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1935년 10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제1연대장을,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사령(司令) 등을 역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연계해서 벌인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37년 4월 이후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여 귀순자들이 속출하였다. 조선혁명군의 간부 최주봉(崔錫鏞).윤일파(尹明浩)와 부하 50여 명과 투항 하게된다. 이무렵 동북항일연군 간부 정빈.윤하태등도 투항하여 항일투쟁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작면 하였다.

이러한 난관을 위해 김활석(金活石)의 휘하에 있던 조선혁명군의 잔존하는 세력 중 일부 간부들은 당시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합류하여 싸울 것을 기획했고, 다른 사람들은 이에 정통인 당을 마음대로 해산할 수 없어 합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최윤구와 박대호 등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김두칠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1938년 2월 약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1938년 12월에 화전현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살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6]

그럼에도 최윤구.박대호는 대원들과 한인독립사를 설치하여 끈질기게 항일전투를 하였다.
한인독립군이 더는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1938년 7월경 경위연대가 경위여단으로 확충될 때 갈라져 나와 제1군 교도대대 대대장 겸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2월 15일 최주봉 증 귀순자들이 인솔한 일 · 만(日滿) 연합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양정우를 추적할 때 최윤구는 교도대대를 이끌고 양정우를 엄호하다가 전사하였다,

3. 상훈.추모

현재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3동 (삼각산) 산 87-1 "국가보훈부가 설치.관리"하고있는 위령탑과 여래사 봉안소에
나라를 위해 순국한 373위 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순국선열봉안소 및 위령탑. 1958년 2월 5일 대한불교조계종 여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 순국선열 373인의 위패를 봉안하는 봉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위령탑을 세웠다. 이에 위령탑에 최윤구(崔允龜)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순국선열봉안소에 崔允龜 위패가 있다.


[1][2]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융링진(永陵鎭).[3]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라오청촌(老城村) 허투알라성(赫圖阿拉城).[4]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헤이뉴훠뤄(黑牛伙洛). 伙洛이란 산골짜기(山溝)를 뜻한다.[5]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무치진(木奇鎭).[6] 한편 김활석은 30여 년간 끊임없이 계승된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으로서의 전통과 조선혁명군의 이름을 포기할 수 없어 십수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조직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이무렵 김두칠, 정광호등과 함께 1938년 9월 6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머지 않아 조선혁명군은 와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