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72f34><colcolor=#fff> 최인규 崔寅奎 | |
출생 | 1911년 12월 10일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영변군 (現 북한 평안북도 녕변군) | |
사망 | 1950년[1] 이후 |
북한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김신재(1919~1998, 1936 결혼) |
직업 | 영화감독, 각본가, 편집자 |
활동시기 | 1937년 – 1950년 |
데뷔 | 1939년 영화 '국경' 1939년 영화 '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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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2. 상세
1911년 12월 10일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1924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운전 조수 일을 하면 교토촬영소에 입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귀국했다. 자동차 강습 등의 일을 하다가 1935년 신의주에서 고려영화사를 설립했다.1937년 경성으로 와 녹음 기사로 일하다 1939년 <국경>으로 입봉했다. <국경>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수업료>, <집 없는 천사>, <태양의 아이들>, 등 일제 말기에 어린이나 청소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다.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할 당시 그에 편승한 '친일' 영화들을 여러 편 제작한 불명예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영화가 가미카제 특수부대의 미화와 내선일체를 강조한 '사랑의 맹서'(1945년 작)인데, 한 때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집없는 천사>(1941)라는 영화는 다이쇼 말기 발령된 조선감화령 등으로 대변되는 조선총독부의 조선내 부랑아/고아 관련 정책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 때 행적에 대해 후회하는 의미의 영화를 찍었는데, 대표작으로 1946년 제작한 <자유만세>가 있다. <자유만세>는 해방 후 제작된 첫 번째 극영화다.
한편, 그의 부인 김신재는 1983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미국에서 1998년 사망하였다.
여배우 복혜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그의 밑에서 연출부로 일했었던 신상옥, 정창화, 홍성기 감독은 최인규에게 욕을 얻어 먹고 구타를 당하는게 일이었으며[2], 최인규가 여배우들의 뺨을 때리는 일도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최인규는 그의 부인 김신재에게 까지 폭력을 사용하였는데, 한 번은 김신재를 2층에서 떠밀어 추락 시키는 바람에 김신재의 창자가 파열 되기 까지 했었다고 한다.
한편으론 기계를 매우 잘 다뤘고, 촬영 장비들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신상옥의 회고에 의하면 촬영을 위해 미군 부대에서 빌린 카메라를 촬영이 끝난 후 바로 돌려주지 않고, 카메라를 분해하여 뜯어본 후 그대로 다시 조립해서 카메라의 구조를 파악한 후 반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흠좀무한 일화가 많은데, 신혼여행을 가던 도중 타고난 자동차가 고장이 나자 본인이 직접 수리하여 고쳐 타고 갔다는[3] 일화가 있고, 심지어는 영화를 편집하는데, 필름에 자신의 지문과 땀선이 남는다고 병원에 가서 손의 지문과 땀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3. 출연작품
3.1. 영화
- 1949년작 파시
- 1948년작 희망의 마을
- 1948년작 독립전야
- 1948년작 국민투표
- 1948년작 죄없는 죄인
- 1946년작 자유만세
- 1945년작 사랑의 맹서
- 1944년작 태양의 아이들
- 1943년작 망루의 결사대
- 1941년작 복지만리
- 1941년작 집없는 천사
- 1940년작 수업료
- 1939년작 국경
- 1939년작 무정
4. 납북
-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구속된 적이 있다. 6.25 전쟁때 납북당해 그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기사
5. 관련 문서
[1] 납북 탈출 도중 살해 당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기억이 잊혀간고 한다.[2] 정창화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슷한 증언을 한다.[3] 물론 그는 자동차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