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20:20:12

카를 울리츠카


파일:스크린샷 2024-12-22 151743.png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실레시아 출신의 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의 정치인이다

2. 생애

카를 울리츠카는 고지 실렌시아의 레오브슈터 지역에서 태어났다. 1893년에 그는 라티보르 에서 아비투르 시험에 합격한 그는 브레슬라우 대학교와 그라츠 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고, 1896년 브레슬라우에서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뒤 1897년 6월 21일 크로이츠 교회에서 서품식을 치뤘다. 공부하는동안 그는 비 가톨릭 학생 협회 코히브 캐롤리나 그라츠의 회원이 되었다. 울리츠카는 고지 실레지아의 크로이츠부르크 에서 가톨릭 디아스포라 에서 첫 번째 사목적 경험을 했고, 그곳에서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목사로 일했다. 1901년 9월 그는 당시 브레슬라우 교구 소속이었던 베를린 근처 베르나우의 교구 행정관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1907~1908년 베르나우의 성심 교회 건축과 1908/09년 당시 베르나우 본당에 속해 있던 비젠탈의 성 마리아 교회 건축에 공헌을 했다.

1910년에 울리츠카는 고향인 고지 실레지아로 돌아와 라티보르에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목사가 됐고 가톨릭 중앙당을 위해 라티보르의 지역 정치에 참여했다. 1911년에 그는 독일 천주교의 쾰른 방향을 거부하고 한스 오퍼스도르프에 대한 실레지아 인민일보의 공격을 비판하는 고지 실레지아 성직자들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울리츠카는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 에서 고지 실레지아의 의원이 됐고, 그 후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의회의 중앙 대표가 됐다. 처음에는 연방 국가로서 독립된 고지 실레지아를 옹호했다. 독일 제국의. 그러나 새로 획득한 폴란드가 고지 실레지아 전체를 통합하기를 원했을 때 그는 현상 유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고지 슐레지엔에서 일어난 세 번의 폴란드 봉기와 동부 고지 슐레지엔의 분리로 이어진 투표에서 [1] 울리츠카는 친독 운동의 핵심 대표자였고 코르판티의 라이벌이였지만 코르판티와는 달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했다. 고지 실레지아 보궐선거 이후, 그는 11월 19일부터 1922년 12월 18일 사임할 때까지 프로이센 주 의회 의원을 지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1933년 3월 9일 글라이비츠 에서 열린 마지막 주요 센터 행사 이후 SA 그룹에 의해 홀 밖으로 쫓겨난 후 학대를 받으면서 잠시 끝이났다. 그럼에도 울리츠카는 1933년 3월 24일, 교회의 자유 보존에 대한 우려때문에 히틀러의 수권법을 수락하였다.

1939년 울리츠카는 폴란드어 사용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실레지아에서 추방되었고 베를린-카를쇼스트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병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일환으로 울리츠카는 1944년 10월 28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11월 21일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그는 카를 라이스너 서품식[2]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다하우에서 해방된 후, 그는 베를린을 거쳐 라티보르로 돌아왔으나 폴란드 측의 살해 위협을 받고 1945년 8월 12일 다시 도망쳐야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성 안토니우스 병원에서 일을 재개했으나 소련 군정에의해 건물을 비워야 했다. 그는 임시로 구비된 예배당에서 병원 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제공했고, 성 프란치스코 예배당이 파괴되자 에르하르트 골리쉬 목사와 함께 프리드리히스하겐의 가톨릭 주민들을 위한 예배도 진행했다. 울리츠카는 새로 설립된 기민당에 가입 하고 고국에서 쫓겨난 동포들을 지원하면서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1953년 10월 12일 카를 울리츠카는 베를린-프리드리히스하겐에서 사망했고 베를린-카를쇼스트에 있는 개신교인 칼쇼스터와 신 프리드리히스펠더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고지 슐레지엔에서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봉기 이후 고지 슐레지엔의 독립 지방을 설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1] 자세한 내용은 슐레지엔 문서에 서술되있다.[2]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유일한 서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