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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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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데뷔~1970년 마이너 대회
2.1. 1963 팬아메리칸 게임2.2. 1964 타사 다스 나소잉스2.3. 날아가 버린 월드컵 출전 기회2.4. 1968 코파 히우 브랑쿠2.5.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3.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3.1. 지역 예선
3.1.1. 사우다냐와 펠레의 갈등, 자갈루의 부임
3.2. 조별 리그3.3. 토너먼트
3.3.1. 8강전3.3.2. 4강전3.3.3. 결승전
4. 1970년~1978년 마이너 대회5.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5.1. 지역 예선

1. 개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의 국가대표팀 경력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이다.

2. 데뷔~1970년 마이너 대회

2.1. 1963 팬아메리칸 게임

만 18세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63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플루미넨시 소속으로 보여준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인정받아 클럽 1군 팀에 데뷔한 지 2개월밖에 안 된 시점에서 1963년 팬아메리카 게임의 브라질 대표팀 멤버로 발탁되었다. 아우베르투는 네 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대회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3-1의 점수로 승리를 따냈으며,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10-0의 대승을 거두었다. 3차전에서 칠레를 상대로도 3-0 승리를 거두어 다음 상대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통해 승패가 결정되게 되었는데, 2-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 차이로 금메달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당시의 팬아메리칸 게임은 A매치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현재에도 A매치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본격적으로 브라질 전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2.2. 1964 타사 다스 나소잉스

이 대회의 포르투갈어 이름은 Taça das Nações. 영어로 바꾸면 'Nations Cup'이다. 브라질에서 단 한 해만 이벤트성으로 열렸다. 영연방에서는 Little World Cup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브라질 축구협회가 개최한 대회였으며 이 대회에 참가한 국가는 국제 축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팀들이었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잉글랜드, 그리고 개최국 브라질. 포르투갈의 경우 국제 무대에서 별로 좋은 성적을 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에우제비우라는 신성이 등장한 상태였고 마리우 콜루나, 자임 그라샤 등 탑클래스의 미드필더진을 갖추고 있어 1966년 월드컵에 나온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팀이었다. 포르투갈 선수가 대부분인 SL 벤피카가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으니 이런 기대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여튼 이 대회는 나름 잔뼈 굵은 강팀들끼리 맞붙은 친선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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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잉글랜드전 선발 라인업
5월 30일의 개막식 이후 처음 열린 경기는 개최국 브라질과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경기였다. 열광적인 홈 관중을 등에 업은 브라질은 기세등등하게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쳤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출전한 바비 찰튼을 마킹했으며, 경기 내내 잘 틀어막아 별다른 활약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브라질의 공격수들은 뱅크스가 없는 잉글랜드의 골문을 유린했고, 결국 스코어 5-1로 브라질이 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는 지미 그리브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레이 윌슨, 조지 코헨 등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거의 다 출전한 상태였고, 일시적인 부상 때문에 뛰지 못한 고든 뱅크스를 제외한 주축 멤버가 전부 멀쩡히 선발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도 5-1로 박살이 나버린 잉글랜드. 축구 종가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다.

다음 경기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강했지만 브라질 수준의 전력은 당연히 아니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당연히 브라질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1년 전 코파 로카에서도 브라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는 브라질 공격수 누구도 힘을 제대로 써 주지 못했다. 그리고 에르민도 오네가에게 한 골을 실점하더니 로베르토 텔치에게 두 골을 연달아 내주었다. 물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아르헨티나의 재빠른 공격수들을 막기 힘들어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뿐만 아니라 센터백 브리투, 레프트백 히우두도 경험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르헨티나 공격수들은 이것을 잘 이용했고, 결국 브라질이 3-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홈에서 아르헨티나에게 대판 깨진 만큼 그 충격은 상당했다.

다음 일정은 포르투갈전이었다. 포르투갈은 5월 31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이슈를 만들어낸 바 있었다. 주전 공격수 주제 아우구스투 토히스가 주심의 뺨을 때리려고 시도하다가 퇴장당하는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 그것이다. 토히스는 당연히 이 대회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타겟멘의 부재에 시달리며 잉글랜드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어차피 1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만큼, 포르투갈은 경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없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을 신나게 두들겨팼다. 펠레가 10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고, 11분 후 줄리뉴 대신 오른쪽 윙어로 선발 출전한 만 19세의 자이르지뉴가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마리우 콜루나가 27분에 만회골을 넣었지만 제르송이 76분, 80분에 연달아 두 골을 넣으며 멀찍이 도망쳤다. 브라질의 4-1승리였다.

브라질은 3전 2승 0무 1패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3전 전승을 기록했고, 승점 2점이 밀려 아르헨티나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그래도 이 대회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송, 자이르지뉴 등 1940년대생의 선수들을 중점적으로 기용하며 세대 교체를 시도했고 그 선수들이 어느 정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대회 이후에는 산투스의 일정이 많았던 데다가 아우베르투의 동포지션 경쟁자 자우마 산투스도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한동안 A매치에 소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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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브라질의 헝가리전 선발 라인업
그래서 아우베르투는 1965년 11월이 되어서야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는데, 이 때 헝가리와의 A매치에 출전하여 3-2 승리를 이끌어냈다.

2.3. 날아가 버린 월드컵 출전 기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다음 A매치 출전은 1966년에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클럽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국가대표팀 감독인 비센치 페올라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1964년 후반부터 다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페올라 감독은 1966년 5월 14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대표팀으로 불러냈고, 좋은 전술을 보여주며 3-1승리를 챙겼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5월 19일에 열린 칠레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의 1-0 승리를 이끌었고, 6월 4일에 열린 페루와의 경기에도 4-0 대승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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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브라질의 페루전 선발 라인업
출전한 경기마다 매우 좋은 활약을 펼친 아우베르투는 대회 명단에 자신이 당연히 포함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자우마 산투스는 30대 후반의 고령이 되었으니 이번 월드컵을 기점으로 20대 초반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세대교체를 해 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비센치 페올라는 월드컵 기간이 다가올수록 신예 아우베르투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선수였던 자우마 산투스를 중점적으로 기용했다. 그리고 끝내 22명의 '셀레상'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자우마 산투스가 고령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를 한번 더 신뢰해 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당시 월드컵 대표팀 선수 22명 중 산투스 FC의 선수가 이미 6명이나 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까지 데려갈 경우 대표팀에 산투스 선수 7명이 포함되는 꼴이었다. 이렇게 될 경우 대표팀 선수를 배출하지 못한 다른 구단들로부터 산투스 FC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브라질 축구협회 측에서 고루고루 선발하라고 미리 권고했고, 그래서 아우베르투가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여튼 다시 한 번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된 자우마 산투스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결국 노쇠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여주며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실패를 경험하고 말았으며, 베테랑 위주로 기용했다가 기동력을 앞세운 상대 공격진에게 많은 실점을 내주며 패배를 겪은 페올라 감독은 월드컵 종료 직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경질되었다. 젊은 피로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주고 싶었던 아우베르투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안타까움을 감추치 못하며 이 때의 일에 대하여 회상하기도 했다.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2.4. 1968 코파 히우 브랑쿠

이 대회는 1931년부터 1976년까지 비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브라질과 우루과이 간의 친선 컵대회이다. 브라질 국가대표팀 자체가 1966년의 충격적인 조별리그 탈락 이후 친선전을 잘 치르지 않았고, 그래서 아우베르투는 1968년이 되어서야 다시 국가대표팀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68년 코파 히우 브랑쿠는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열렸고, 39세가 된 자우마 산투스도 대표팀에 포함된 상태로 대회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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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고별전을 치른 자우마 산투스와 교체되어 들어가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6월 9일에 열린 첫 경기에서 선발 명단에 오른 것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아닌 자우마 산투스였다. 그러나 이는 자우마 산투스의 국가대표팀 은퇴를 기념해 주기 위한 특별한 경기였고, 그래서 자우마 산투스가 먼저 투입되었던 것이다. 자우마 산투스는 몇십 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비다가 후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교체되며 상징적인 세대교체를 마무리지었다.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토스탕과 사지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코파 로카 2차전 역시 3일 후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열렸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주장이 되었다. 23세에 브라질 국가대표팀 공식 주장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여튼 브라질은 또 우루과이를 두들겨 패며 4-0 승리를 거두었다. 우승이었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아우베르투는 브라질의 주장으로서 6월동안 5경기의 A매치에 출전하며 서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포르투갈을 상대로 3승 2패의 성적을 올렸다. 상대들이 워낙 강팀이긴 했지만, 브라질 국민들과 갓 주장이 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기준으로 봤을 때 만족스러운 성과는 분명 아니었다. 브라질의 좋지 않은 성적, 그리고 주장직의 무게 때문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클럽에서 펠레에게 지속적으로 국가대표팀에 돌아와 팀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펠레는 계속해서 복귀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1968년 7월에는 멕시코와의 친선 2연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했고, 그 이후 페루와의 친선 2연전에서는 2연승을 기록했다. 어느덧 7월 중순이 되었고, 다음 월드컵 지역예선에 원활하게 합류하기 위해서는 펠레가 빨리 대표팀에 돌아와 적응해야 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계속해서 펠레를 설득했다.

2.5.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그리고 7월 25일, 파라과이와의 친선 컵대회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를 기점으로 펠레가 마침내 셀레상의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되었다. 펠레의 국가대표팀 복귀에는 클럽에서 펠레를 지속적으로 설득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공도 컸다. 브라질 팀은 비행기를 타고 파라과이로 이동하여 경기를 진행했으며, 돌아온 펠레와 함께 4-0 승리를 거두며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2차전에서는 1-0 패배를 기록했으나 득실차에서 앞서 우승을 거두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았다.

3.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이후 8번의 A매치에 출전하여 5승 2무 1패의 성적을 이끌어냈고, 1968년 FIFA XI와의 경기에서도 브라질의 주장직을 수행하며 2-1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페올라 감독의 경질 이후 대표팀에 복귀하여 2년 동안 팀을 지도했던 아이모레 모레이라 감독이 잦은 친선 경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1968년 말에 주앙 아벨란제에 의해 경질되었으며, 아우베르투는 새로운 감독 주앙 사우다냐와 함께 다가오는 8월에 열릴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지역 예선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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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훈련을 위해 국가대표팀 저지를 입고 있는 카피탕
그러나 브라질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69년 4월 마라카낭에서 열린 페루와의 경기가 사우다냐의 브라질 감독 데뷔전이었는데, 브라질의 제르송과 페루의 데 라 토레가 큰 충돌을 일으키며 양 팀 간의 패싸움이 펼쳐졌던 것이다.
제르송의 충돌로 인해 발발한 페루와의 패싸움
열한 명의 젊은 숙녀가 아니라 열한 명의 포식자들을 데려왔구먼.#
주앙 사우다냐
그래도 다행히 경기에서는 2-1로 이겼고, 2일 후 진행된 2차전에서도 3-2 승리를 거두었다. 또 6월에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도 2-1 승리를 거두는 등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3.1. 지역 예선

1969년 8월이 되어 월드컵 지역 예선이 열렸다. 브라질의 첫 번째 경기 상대는 콜롬비아였다. 이 경기는 보고타에서 열렸다. 콜롬비아 홈 관중들은 1966년의 실패를 겪은 브라질 대표팀이 한번 더 져 주기를 바랐지만, 토스탕이 전반 막판에 혼자 두 골을 넣어버리며 콜롬비아를 침묵시켰다. 2-0 승리였다.

두 번째 경기 상대는 베네수엘라였다. 카라카스에서 열린 원정 경기였다. '부왕' 토스탕이 경기 60분에 한 골을 터뜨렸고, 펠레가 11분 후 골을 터뜨렸다. 토스탕은 펠레의 골에 대답하듯이 1분만에 한 골을 추가했다. 그리고 2분 후에 한 골을 더 넣으며 해트트릭을 작렬했다. 펠레도 지지 않고 1분만에 한 골을 추가하며 멀티골을 작렬했다. 5-0 승리였다.
세 번째 경기 상대는 파라과이였다. 사람들은 나름 빅 매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아순시온에서 열린 경기, 즉 파라과이의 홈이었기에 브라질 대표팀이 더 불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질은 발렝칭 멘도사, 자이르지뉴, 에두의 골로 3-0 승리를 챙겼다.

네 번째 경기는 다시 콜롬비아와의 경기였다. 각 팀과의 2차전은 모두 '성지' 마라카낭에서 열렸다. 먼저 토스탕이 15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콜롬비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3분 만에 동점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은 다소 당황했다. 그래서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후반전 시작 3분만에 에두가 골을 추가하며 브라질이 앞서기 시작했다. 12분 후, 펠레가 감각적인 득점을 올리며 점수를 3-1로 만들어 차이를 벌려놓았다. 콜롬비아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기 86분과 88분, 자이르지뉴와 히벨리누가 각 한 골씩을 터뜨리며 6-1이 되었다. 브라질의 긴장이 풀리며 수비가 느슨해졌고, 콜롬비아의 호르헤 가예고가 1분만에 이 틈을 파고들어 만회골을 기록했다. 최종 스코어 6-2. 또 압도적인 승리였다.

1969년 8월 24일에 열린 베네수엘라와의 2차전. 베네수엘라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고 선수들의 의욕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브라질이 봐 줄 리는 없었다. 자비 없는 선수였던 펠레와 토스탕은 전방에서 엄청난 콤비플레이를 펼쳤다. 토스탕은 7분 만에 펠레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넣었다. 전반 21분, 토스탕은 슈팅을 놓친 골키퍼에게 다가가 간단하게 추가 득점을 뽑아냈다. 3분 후, 제르송의 패스가 토스탕에게 전달되었고 토스탕은 두 명을 간단히 제치며 오른발로 살며시 밀어넣어 득점을 기록했다. 전반 24분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선수 중 아무도 토스탕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경기 30분, 자이르지뉴가 골문 앞에서 에두의 크로스를 대기하다가 골키퍼에게 차단되어 튀어나온 공을 오른발로 강력하게 마무리지으며 브라질의 4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4분 후 펠레는 토스탕을 향해 천재적인 로빙 패스를 제공했다. 베네수엘라는 토스탕을 막고자 했으나 파울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연히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PK 전담 키커였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공격수 중 맏형인 펠레에게 PK 찬스를 주었다. 펠레는 왼쪽으로 간결하게 슈팅을 날렸다. 골. 전반이 끝나기 전, 스코어 5-0이 되었다. 경기 70분 펠레가 한 골을 더 추가하며 6-0의 스코어로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었다.

브라질은 5전 전승으로 승점 10점을 쌓았다. 그러나 월드컵 진출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승점 8점을 기록한 파라과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라과이가 9-0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득실차에서 브라질을 역전하게 되고 브라질의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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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전 직전의 브라질 팀
뭐 당연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홈에서 상당히 고군분투하며 0-0 스코어를 계속해서 지켜내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어차피 월드컵 진출하는 거 이왕이면 예선 전승을 기록하고 진출하는 게 깔끔할 거야!'라는 마인드로 계속해서 공격적인 전술을 유지했다. 경기에 임하는 태도는 양측 모두 훌륭했다. 브라질은 펠레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이뤄냈다.

지역 예선 6경기에서 브라질은 6전 전승, 23득점 2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3.1.1. 사우다냐와 펠레의 갈등, 자갈루의 부임

그러나, 1970년 초에 사우다냐가 갑자기 펠레의 시력을 언급하면서 펠레를 디스하기 시작했고, 이전에 사우다냐가 친선 경기에서 산투스 FC의 선수들을 중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펠레도 지지 않고 맞서면서 둘의 관계가 제대로 틀어졌다. 화기애애했던 브라질 대표팀에는 순식간에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산투스 FC의 선수였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동료 펠레를 감싸며 그가 국가대표팀에서 또 탈퇴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도왔다. 펠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아우베르투의 만류 덕에 남았고, 선수단 전체를 등지게 된 사우다냐 감독은 3월 8일 아르헨티나와의 친선전 이후 경질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펠레와 두 차례의 월드컵 우승을 함께했던 마리우 자갈루가 앉았다. 자갈루는 3월 22일 칠레와의 친선 2연전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가졌고, 첫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두며 순조롭게 데뷔전을 끝마쳤다.
칠레와의 패싸움
그러나 4일 후에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는 상당히 고전했으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동점골과 히벨리누의 역전골로 2-1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경기 중 호베르투 미란다가 칠레 골키퍼 레오폴도 바예호스를 걷어차 패싸움을 일으키며 1년 전 페루전에서 들었던 '포식자들'이라는 비아냥을 또 들어야 했다.

브라질 대표팀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파라과이와 불가리아를 상대로 홈에서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였으며, 언론들은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쳤다. 팀의 카피탕인 아우베르투는 이렇게 팀이 망해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우베르투는 팀의 고참인 펠레, 제르송과 함께 진정한 리더가 되었다. 아우베르투, 제르송과 펠레는 4월 28일 저녁 펠레의 숙소에 모여 몇 시간동안 회의를 진행했고, 브라질을 떠나 멕시코로 가기 전 갖는 마지막 A매치인 다음날 경기에서 어떤 전술로 경기에 임할 것인지 논의했다. 그들이 짠 전술은 아래와 같았다.
토스탕은 인사이드 레프트처럼 뛴다.
펠레는 토스탕보다 약간 앞선 위치의 중앙에서 뛴다.
히벨리누는 양쪽 윙어 위치에서 모두 뛰면서 중앙을 열심히 커버한다.
클로도아우두는 미드필드의 뒷공간을 배회한다.
클럽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인 윌송 피아자는 월드컵 동안 센터백으로 뛴다. #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9일, 그들은 히벨리누, 토스탕, 클로도아우두 등의 선수들에게 자신들이 짠 계획을 전달했고, 감독 자갈루에게도 전달했다. 자갈루는 이들의 플랜에 동의했으며, 팀닥터인 마리우 아메리쿠와 함께 이 전술의 효과를 지켜보겠다고 전했다. 팀원 모두가 계획대로 경기에 임했다. 팀의 리더인 아우베르투와 펠레, 제르송이 준비한 단기 처방이 잘 통하면서 브라질은 오랜만에 1-0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칠레전 패싸움으로부터 이어진 좋지 않은 흐름을 어느 정도 끊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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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브라질을 구한 성삼위일체의 일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두 달 후 펼쳐진 본선에서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다.

3.2. 조별 리그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이보 빅토르, 라디슬라프 쿠나 등의 쟁쟁한 스타들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이 경기에서 아우베르투는 매우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었고,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팀을 이끌었다. 아우베르투를 비롯한 수비진이 든든하게 후방을 지키자 제르송, 히벨리누, 펠레, 자이르지뉴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네 골을 합작해내며 4-1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 경기는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였다. 양 팀은 이 시기 세계 최고의 국가대표팀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 매치업을 보고 'Early Clash'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양 팀의 주장인 아우베르투와 무어는 악수를 나누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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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주장과 잉글랜드의 주장
뚜껑을 열어 봤더니, 역시 세간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이 경기는 엄청난 명경기였다. 고든 뱅크스의 선방, 바비 무어의 태클 등 뭐 하나 빼놓을 장면이 없는 경기였으며, 두 팀이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아우베르투 역시 주장의 클래스를 입증해 보이며 매우 좋은 활약을 펼쳤다. 프랜시스 리가 브라질 골키퍼 펠릭스를 상대로 부상 위험이 큰 저돌적인 플레이를 하며 충돌을 일으키자, 아우베르투가 프랜시스 리에게 다가가 매우 크게 질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vs 잉글랜드
경기는 용호상박이었다. 제프 허스트앨런 볼 등 잉글랜드의 선수들이 수많은 찬스를 잡았고, 펠릭스가 막아내거나 골대를 벗어났으며, 브라질이 반격해 오면 바비 무어가 미친 듯한 태클 실력으로 그것들을 막아냈다. 경기 내내 팽팽했던 이 승부의 결과는 브라질의 1-0 진땀승이었고, 대회 최대의 난적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브라질 팀은 사기가 매우 높아졌다.

이어진 루마니아전에서도 카피탕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아우베르투는 상대 선수들을 틀어막는 것은 물론이요 전술 외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브라질의 공격을 이끄는 네 명의 에이스들을 보호하는 임무가 그것이었다. 피지컬을 이용한 수비를 선호하는 유럽 선수들이 브라질 공격수들을 심하게 견제하다가 혹 부상을 입히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경기를 뛰는 모습이 내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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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아우베르투
아니나 다를까 파울을 당해 쓰러진 자이르지뉴에게 루마니아 수비수 이온 두미트루가 공을 일부러 차 맞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펠레와 자이르지뉴의 맹활약을 통해 브라질은 또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브라질은 3전 3승 승점 6점으로 조 1위에 오르며 8강 진출에 성공했다.

3.3. 토너먼트

3.3.1. 8강전

아우베르투는 페루와의 경기에서도 어김없이 주장직을 수행하며 팀을 이끌었다. 직접 오버래핑하여 세 차례의 슈팅을 시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며, 시종일관 무시무시한 기세로 페루의 공격수들을 몰아붙였다. 수비적인 면에서도 무결점의 기량을 자랑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이 경기에서 2회의 태클과 4회의 인터셉트, 그리고 3회의 안정적인 클리어링을 기록했다. 아우베르투를 비롯한 수비진들에 의해 기세가 번번이 꺾인 페루는 테오필로 쿠비야스라는 괴물 신인이 있었음에도 역전에 실패하며 브라질에게 4-2 패배를 내주었다. 브라질은 순조롭게 4강까지 진출했다.

3.3.2. 4강전

아우베르투는 4강에서도 역시 주장직을 수행했으며, 대회 내내 엄청난 수비력을 보여준 우루과이를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크게 기여하며 20년 전 벌어진 '마라카낭의 비극'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하였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이 경기에서 슈팅 두 개를 시도했으며, 인터셉트를 2회 성공시켰고 세 번의 위험한 찬스에서 안정적으로 공을 걷어냈다.

3.3.3. 결승전

이 경기는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만나는 대결인 동시에, 양 팀이 2번씩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였기 때문에 줄리메 컵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1] 자친토 파케티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포스는 엄청났다. 공격진에는 로베르토 보닌세냐루이지 리바, 그리고 산드로 마촐라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정말 화려했다. 주장 파케티, 센터백 로베르토 로사토, 피에르루이지 체라, 라이트백 타르시치오 부르그니치. 그리고 골키퍼 자리에는 디노 조프를 밀어내고 올라온 엔리코 알베르토시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미 조별 리그 세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올라오며 그 수비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바 있었다.

브라질은 이에 맞서 최고의 정예 멤버들을 출전시켰다. 아래의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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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라인업[2]
루디 글뢰크네르 심판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고, 보닌세냐가 첫 터치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2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루이지 리바가 별명처럼 번개 같은 슈팅으로 브라질의 골문을 위협했다. 아주 위협적인 슈팅이었고, 펠릭스가 이 공을 간신히 쳐내며 실점을 모면했다. 이후 다시 기세를 잡은 브라질은 1분이 흐를 때마다 찬스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경기 6분에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펠레를 겨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알베르토시가 중간에 공을 쳐내며 찬스가 또 무산되었다.

전반전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치고 받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경기 17분경에는 펠레가 감각적인 헤더 슈팅으로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경기 36분, 4강전의 영웅이었던 클로도아우두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백힐 패스를 시도했는데, 곧바로 보닌세냐에게 인터셉트를 당했다. 순식간에 위기에 몰린 브라질. 여기에 보닌세냐를 막으러 온 브리투와 각을 좁히러 나온 펠릭스가 부딪히며 쓰러지며 완전한 오픈 찬스가 되었다. 그리고 보닌세냐가 빠르게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1 동점이 되었다.

다시 시작된 후반전. 후반전이 시작한 지 1분만에 브라질은 초대형 찬스를 잡았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엄청난 스피드로 침투하며 이탈리아 수비진을 전부 뚫어버리는 빨랫줄 같은 땅볼 크로스를 날린 것이었다. 크로스는 침투하던 펠레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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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금같은 패스, 아쉬운 마무리
그러나 펠레가 골대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며 이상한 슈팅을 날리고 말았다. 아쉬운 장면이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계속해서 브라질 선수들에게 거친 파울을 시도했고, 히벨리누와 펠레 등 브라질의 공격을 이끌어가던 에이스들은 몇 번이고 경기장에 드러누웠다. 캡틴 아우베르투는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 나름대로 거친 태클을 시도하며 성난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브라질도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아우베르투는 경기 63분, 6분 전 히벨리누에게 백태클을 걸었던 마리오 베르티니가 공을 잡고 역습을 시도하자 재빨리 뒤쫓아가 공부터 건드린 후 다소 깊은 슬라이딩으로 베르티니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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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깊은 태클
베르티니는 걸려 넘어졌고, 아우베르투는 사과했다. 글뢰크네르 주심은 이탈리아의 역습을 저지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 옐로카드를 주었다. 공을 먼저 건드렸으나, 역습 상황을 저지했으며 태클 자체가 너무 깊게 들어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로부터 3분 후, 제르송이 페널티 박스 바깥쪽에서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시도했고 이것이 골대로 빨려들어가며 점수는 2:1이 되었다. 공격진의 리더인 펠레가 한 골, 중원의 리더인 제르송이 각각 한 골씩 득점하며 승리를 향해 한걸음 나아간 것이다.

2분 후, 제르송이 펠레를 향해 엄청난 롱패스를 날렸다. 펠레는 머리에 공을 살짝 맞혀 가운데로 침투하는 자이르지뉴 앞에 떨어뜨렸다. 자이르지뉴는 엉겁결에 다리에 공을 맞히고 말았다. 그런데 골키퍼 알베르토시가 강한 슈팅을 예상하고 미리 엎드리는 바람에 이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고, 공이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파케티는 이미 늦었다. 브라질의 세 번째 득점, 자이르지뉴의 전 경기 득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아우베르투는 매우 기뻐했다.

경기는 20분가량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전부는 '브라질 타임'이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며 부담을 덜어낸 히벨리누는 본인의 최고 장점인 다양한 개인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이탈리아를 괴롭게 만들었고 불안했던 브리투의 수비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자이르지뉴는 아예 양 쪽 사이드라인 모두에서 움직이며 파케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토스탕은 한결같았다. 펠레는 12년 전에 스웨덴에서 그랬듯이, 그림을 그리듯 편하게 축구를 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자신들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다.

클로두아우두는 네 명을 연속으로 제쳤고, 히벨리누는 자이르지뉴에게 정확하게 패스했다. 자이르지뉴는 스피드로 수비수들을 제치고 펠레에게 공을 전달했다. 자이르지뉴가 파케티를 유인하여 생긴 이탈리아 진영 왼쪽의 빈 공간으로 카피탕이 빠르게 침투했고, 펠레는 여유롭게 공을 받으며 우측면으로 침투하는 카피탕을 확인했다. 그리고 오른발로 아주 적절한 패스를 전달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스피드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가며 강력한 오른발 아웃프런트 슈팅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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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팩트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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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 후 기뻐하는 카피탕
우리는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그 골이 얼마나 아름다운 골이었는지 깨달았다.#
실로 아름다운 골이었다.[3][4] 멋진 팀 플레이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그 어떤 골보다도 아름다웠던 이 골은 2014년 FIFA에 의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서 득점한 모든 골 중 최고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우베르투의 득점 이후 이탈리아는 반쯤 포기한 채로 남은 시간을 보냈으며, 결국 주심이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종료되었다. 최종 스코어 4-1. 브라질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캡틴 아우베르투는 마지막 골을 직접 득점하며 브라질의 위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필드에서의 세레모니 이후 브라질 선수 중 가장 먼저 단상에 올라 쥘리메컵을 맛깔나게 들어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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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쥘리메컵을 들어올리는 카피탕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파라이소 공항에서 국민들의 열띤 환호를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귀국하였다. 아우베르투는 트로피를 손에 쥐고 감독 자갈루와 함께 우승 퍼레이드를 이끌었으며, 버스를 타고 히우지자네이루까지 순회하며 퍼레이드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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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Capitão do Tri

4. 1970년~1978년 마이너 대회

아우베르투는 1970년 9월 30일 멕시코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2-1 승리를 이끌며 좋은 흐름을 이어갔고, 10월 4일에는 칠레와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5-1 대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한동안 A매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브라질이 다른 국가와의 친선경기를 많이 잡아놓은 1971년 7월 직전에 전국 리그에서 부상을 당했고, 후배 제마리아가 아우베르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72년 4월 26일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그 한 경기가 전부였고, 이후 또 부상을 당해 제마리아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래서 당해 6월과 7월 사이에 열렸던 이벤트성 국제대회인 브라질 독립컵에서도 아우베르투 대신 제마리아가 주전 라이트백으로 활약했다.

1973년에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고질적인 부상에서 회복하여 간만에 주립 리그와 전국 리그에서 모두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기에 브라질 국가대표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제마리아를 계속 기용하였다. 공식전은 아니었지만, 아우베르투는 1973년 12월 19일에 있었던 가린샤의 은퇴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제마리아에게 선발 출전 기회를 내준 탓에 당연히 1974년 월드컵에서도 뛰지 못했으며, 이 대회에서도 제마리아가 아우베르투 대신 라이트백 포지션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제마리아는 4년 전의 아우베르투와는 클래스 차이가 좀 있는 선수였고, 기세등등했던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4강에 그치며 우승을 놓쳤다. 제마리아는 이후 한동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이후 여러 선수들이 브라질의 라이트백을 책임질 선수로 거론되었으나 그 중 누구도 몇 년 전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만큼 일관성 있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 수뇌부는 답답해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이 시기에 국가대표팀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었으나, 친정팀 플루미넨시에 복귀하여 2년 연속으로 주립 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증명하며 폼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었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그제서야 다시 아우베르투에게 눈길을 주었고, 결국 아우베르투는 1976년 6월에 있었던 FIFA 올스타팀과의 경기(A매치는 아니었음)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나타나며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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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2월 소련전에 출전한 32세의 카피탕
그 해 12월에는 소련과의 A매치가 있었는데, 아우베르투는 이 경기에서 또 모습을 드러내며 브라질의 승리를 이끌었다.

아우베르투가 이렇게 A매치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자, 1970년의 영광을 이끈 카피탕을 다음 월드컵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브라질 국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5.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5.1. 지역 예선

사람들의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지역 예선에서 브라질이 콜롬비아 원정에서 0-0 무승부밖에 거두지 못하자, 대표팀 감독 클라우지우 코치뉴는 32세의 노장이 된 카피탕을 대표팀에 불러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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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8일, 카피탕의 국가대표팀 복귀를 환영하는 셀레상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77년 3월 9일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진행된 콜롬비아와의 예선전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복귀하였다. 카피탕 복귀의 효과는 단번에 나타났다. 브라질은 기세가 한껏 오른 모습을 보여주며 6-0 대승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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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6-0 승리를 거둔 팀
그리고 카피탕은 파라과이 원정에서 진행된 그 다음 예선전에서도 브라질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브라질의 당락을 결정한 마지막 예선전에서는 파라과이를 홈으로 불러들여 좋은 수비를 펼치며 1-1 무승부로 귀중한 승점 1점을 벌어들여 브라질의 본선 진출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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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상의 주장 완장을 차고 뛴 마지막 경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국가대표팀에 계속 남아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본선에서도 선발 멤버로 활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캄페오나투 카리오카가 종료된 이후 뉴욕 코스모스측에서 CR 플라멩구 측에 아우베르투를 영입하겠다고 제안을 보냈다. 플라멩구는 카피탕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산투스 시절의 동료 펠레&히우두와의 재회와 1978년 월드컵 출전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펠레&히우두와의 재회를 선택했고, 해외 선수를 국가대표팀에 잘 선발하지 않았던 당시의 풍조 때문에 아우베르투는 1978년 월드컵 본선에서 셀레상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아우베르투는 1964년부터 1977년까지 셀레상 유니폼을 입고 A매치 53경기[5]에 출전하여 8골을 넣었으며, 한 차례의 FIFA 월드컵 우승을 팀 캡틴으로서 달성해냈다.

[1]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칙이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한 사기 유닛 때문에 너무도 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뭐, 그 예측이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닌게 월드컵이 시작된지 80년이 넘었지만 현재 월드컵에서 3번 이상 우승한 나라는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아르헨티나 이 4개국 밖에 없다.[2] 윗줄 왼쪽부터 카피탕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리투, 피아자, 펠릭스, 클로도아우두, 에베라우두이고, 아랫줄 왼쪽부터 자이르지뉴, 제르송, 토스탕, 펠레, 히벨리누이다.[3] 아우베르투의 이 골은 마라도나의 오관돌파 골과 함께 역대 월드컵 베스트 골 TOP1을 다툰다.[4] 자세히 보면 수비수의 다리를 통과한 알까기 골이다.[5] 1968년에 열린 FIFA 올스타팀과의 경기를 제외하면 52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