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장 약한 심장'은 기본 배경에 언급된 내용인 임무 중 스테반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를 죽여 가문의 주도권을 잡았던 때를 서술하고 있으며 단편 만화인 카밀: 끊어진 고리와 이야기가 이어진다.2. 장문 배경
카밀은 무법자를 처단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무기화한 우아한 엘리트 첩보원으로, 그녀의 임무는 고도화된 필트오버와 그 하층부의 자운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뛰어난 적응력과 더불어 세부사항까지 꼼꼼히 살피는 주의력을 갖추었으며 너저분한 기술은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예법과 재력을 갖춘 집안에서 자라난 카밀은 페로스 가문의 최고 정보 요원으로서, 마치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의사처럼 가문의 어두운 문제들을 확실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법공학 증강을 통해 최고가 되기를 추구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품고 있는 칼만큼이나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카밀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카밀이 속한 가문은 외딴 계곡의 모래에 분포하는 생명체로부터 채취한 희귀한 수정을 통해 부를 쌓았다. ‘태초의 수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법 수정은 보통은 마법 능력을 타고난 이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카밀의 고모할머니인 엘리샤는 이 생물체를 찾기 위한 가문 초기의 모험 도중 팔 하나를 잃었고, 목숨까지도 잃을 뻔 했다. 페로스 가에서는 엘리샤의 이 같은 희생을 칭송했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가문의 가훈에 남아 있다. “가문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리.” 엘리샤 페로스가 발견한 생물체 브래컨은 유한한 자원이었으므로, 페로스 가는 그간 축적한 수정의 수를 늘릴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들은 화학공학과 룬 연금술에 어둠의 투자를 함으로써 힘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조달하기 쉬운 합성 마법 수정을 시장에 공급했다. 이 같은 일에는 때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소문에 따르면 자운의 하늘이 ‘잿빛 대기’라고 불릴 정도로 스모그로 가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합성 수정의 생산 때문이라고 한다. 필트오버의 블루윈드 궁에서도 가장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카밀은 당시 페로스 가문의 수장인 로드리와 젬마의 여섯 번째 자녀였다. 그러나 카밀과 그녀의 남동생 스테반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기 전 사망했다. 페로스 가의 관심은 살아 남은 두 자녀 중 첫째인 카밀에게 집중되었고, 그녀의 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카밀은 어린 나이에 귀족다운 태도와 의무감을 지니게 되었다. 발로란 최고의 학자들이 끊임없이 필트오버를 방문했으므로, 카밀은 늘 훌륭한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이오니아 남부의 지운 방언과 우르 녹서스 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발로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을 교육 받았으며, 오딘 계곡에서 아버지를 도와 발굴 작업을 하면서 고대 슈리마 어를 읽고 쓰는 법도 배웠다. 카밀은 또한 첼로비나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훌륭한 연주가이기도 했다. 필트오버의 명문가에서는 자녀들 중 나이가 어린 아이가 가문의 검과 방패라 할 수 있는 최고 정보 요원의 역할을 맡는 것이 관례이다. 최고 정보 요원으로 선택된 아이들은 가문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할 책임이 있으며, 수장을 도와 가문의 지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면서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한다. 비밀이 많은 페로스 가는 언제나 이 직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반드시 가문 최고의 인재가 최고 정보 요원이 되도록 막대한 자원을 들이곤 했다. 카밀의 동생 스테반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기에 최고 정보 요원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간주되었다. 카밀이 스테반 대신 가문의 최고 정보 요원이 되었을 때 카밀의 부모, 특히 카밀의 아버지는 그녀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카밀이 추가의 훈련과 교육을 받게 되자 스테반은 질투에 사로잡혔다. 카밀은 전투, 첩보활동, 고문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기술은 숀산 검을 이용한 검술, 심문을 통한 정보 수집, 그리고 서부 바다뱀 군도에서 쓰이는 줄 달린 갈고리를 가지고 무너진 시계탑에서 레펠 강하를 하는 것이었다. 카밀이 25세 때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는 신체를 증강시킨 한 떼의 불량배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자운의 지하세계에서 출세하기 위해 페로스 가의 비밀에 손을 뻗치려고 작정한 자들이었다. 카밀과 그녀의 아버지는 부상을 입었다. 카밀은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결국 부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카밀의 어머니 또한 집안에 드리운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수장의 직함은 카밀의 동생 스테반이 이어받게 되었다. 어리고 충동적이며 가문의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던 스테반은 이미 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페로스 가의 마법공학 증강체 연구를 두 배로 강화했다. 1년의 애도기간이 끝나자 페로스 가의 저택은 다음 번 진보의 날 기술자 선발 대회를 위해 찬란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다. 스테반은 가문의 최고 책임 연구자로 슈리마의 해변 도시 벨준 출신의 젊고 전도유망한 수정학자 하킴 나데리를 선정하고 그의 취임식을 직접 감독했다.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에 충격을 받은 카밀은 하킴에게 자신을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법공학 증강체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카밀을 만난 그 순간 그녀에게 매료된 하킴은 카밀을 부모의 죽음에서 비롯된 어둠에서 건져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리고 슈리마의 사막에 대해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몇 개월 간의 친밀한 시간이 흘러간 후 카밀은 자신도 하킴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카밀이 증강 수술을 받을 날이 다가옴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 점점 더 신중함을 잃어갔다. 수술을 하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킴은 페로스 가의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될 것이고, 카밀은 최고 정보 요원으로서의 의무에 다시 충실히 임해야 할 것이었다. 하킴이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한 것은 카밀의 심장을 바꾸는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깊이 잘라서 그녀의 인간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수술을 며칠 앞두고 하킴의 걱정이 폭발했다. 그는 카밀에게 청혼하면서 수술 대신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했다. 그는 미래를 그려보였다. 태양이 타오르는 벨준의 사막을 돌아다니면서 고대 슈리마의 폐허를 발굴하고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미래, 카밀이 가문에 지고 있는 책무에서 멀리 벗어난 미래였다. 난생 처음으로 카밀의 마음은 갈등에 빠졌다. 수장으로서의 스테반은 카밀의 능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스테반이 이 비밀 청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최고 정보 요원이 자취를 감추기 일보 직전이며 그에 따라 페로스 가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약화될 위험에 처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스테반은 카밀이 아버지에게 했던 의무의 맹세를 상기시킬 계획을 세웠다. 카밀이 하킴이 함께 있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자신이 공격을 받은 것처럼 꾸민 것이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최고 정보 요원의 직책을 거부당했던 스테반은 바로 그 약함을 이용해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카밀 앞에 나타났고,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던 그녀의 어두운 기억을 휘저어 놓았다. 카밀은 최고 정보 요원의 주의력이 흩어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똑똑히 보았고, 그 증거를 부인할 수가 없었다. 하킴은 카밀을 간곡히 설득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밀의 의무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고, 그녀가 보다 잘 준비되었더라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고 동생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카밀은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며 하킴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하킴은 여전히 카밀을 사랑했으며 수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연인이 수술대 위에서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스스로 카밀의 심장을 교체했다. 그녀의 기계 심장이 잘 뛰는 것을 확인한 하킴은 최고 책임 연구자의 자리를 사임했다. 카밀이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와 하킴이 함께 일했던 실험실은 텅 빈 채 버려져 있었다. 카밀은 그녀의 임무에 매진했다. 그녀는 칼로 된 다리와 갈고리가 달린 허리 등으로 신체를 계속 증강해 나갔다. 각각의 증강체를 추가하는 것은 매번 기술의 한계를 시험할 뿐만 아니라 카밀을 한계에 밀어붙이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카밀이 인간으로서 남은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했다. 페로스 가가 권력과 부를 축적할수록 카밀이 동생을 위해 수행하는 임무도 더 어둡고 위험해졌다. 젊음의 기운을 계속 불어넣는 마법공학 심장 덕분에 시간이 흘러도 카밀은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녀에게 하킴 나데리는 곧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 시간은 스테반에게는 잔인했다. 그의 신체는 점점 더 약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가문의 수장이라는 이름을 부여잡은 손만은 약해지지 않았다. 최근의 임무에서 카밀은 한 순진한 필트오버 인이 악당에게 속아서 약혼식을 올릴 뻔한 현장을 발각해 냈는데, 이와 함께 밝혀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스테반이 저지르고 있었던 반역 행위가 드러났다. 하킴을 몰아냈던 스테반의 거짓말이 이제는 카밀과 페로스 가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카밀은 스테반의 욕심을 한눈에 꿰뚫어보았다. 그는 이기적이었으며 더 이상 가문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동생에게 느끼고 있던 마지막 동정심을 버리고 페로스 가의 통제권을 손에 쥐었다. 카밀은 이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조카의 딸[1]을 가문의 수장으로 세워 페로스 가의 공무를 관장하고 있다. 덕분에 그녀는 가문의 성공을 보장하는 보다 비밀스런 작전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문제의 해결사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카밀은 인간을 벗어난 자신의 변화와 이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였다. 카밀의 혈관에 마법 수정의 에너지가 흐르는 한 그녀는 안이하게 앉아 있었던 적이 없으며, 산업 첩보전, 잘 우려낸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긴 산책에서 삶의 활력을 얻는다. |
3. 회색의 숙녀와 차 한잔
내게 처음 들린 소리는 날카로운 금속이 바위에 긁히는 소리였다. 시야는 흐려졌고 주위가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이 소리가 젖은 돌에 칼날이 미끄러질 때 나는 소리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내 석공이 절벽에서 돌을 잘라낼 때 나는 그 거친 소리였다. 신경을 긁는 소리. 머리 속의 안개가 걷히고, 나는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마구 잡아당겼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난 죽었구나. 내 앞에서는 끽끽대는 소리, 무거운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앞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고르돈 안셀인 듯 했다. 역시 용병은 그 정도밖에 안 되지. 안셀도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깼군. 잘 됐어.” 품위 있고 세련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끓이려는 참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의 반은 붓고 멍이 든 듯 욱신거렸다. 입은 붙어 있었다. 부어 오른 턱을 움직이려고 하자 구리의 쓴 맛이 입에 가득 찼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주변의 공기에는 깊이 숨을 들이쉬면 코털을 태울 것만 같은 매캐한 화학품의 냄새가 감돌았다. 운이 좋았다. 난 아직 자운에 있군. “둘 중 하나는 부두에서 있었던 폭발이 누구의 책임인지 알고 있겠지.”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번쩍이는 푸른 빛이 그녀의 가는 허리와 인간으로서는 매우 긴 다리를 비췄다. 그녀가 버너의 불꽃 위에 유리 주전자를 놓자 물이 살짝 튀었다. “지옥에나 가시지, 아가씨.” 안셀이 신음하며 말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안셀에게 맡겨두기로 하자. “그라임 남작의 수하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군.” 여자는 뒤돌아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비추는 빛은 램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 속의 무엇인가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빛을 내고 있었다. “자네는 내 질문에 답을 하게 될 거야. 자네 목숨이 거기에 달린 것처럼 절박하게 말이지.” “내가 뭐라도 불 줄 알고?” 안셀이 으르렁거렸다. 그녀가 움직이자 다시 금속이 바닥을 긁었다. 우리 둘 중 누구를 먼저 채석장에서 돌 캐내듯 고문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녀가 안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미스터리한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신비한 푸른 빛이 그녀의 허리에서 맥박 뛰듯 고동쳤고, 그 아래로 빛을 따라간 내 시선을 마주한 것은 바로… 두 개의 칼날이었다. 그녀는 최신 마법공학 증강 기술의 산물로, 나는 필트오버에서도 자운에서도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나처럼 그대도 예의를 갖추는 편이 좋을 텐데, 안셀 씨. 다른 놈들은 그러지 않더군. 그래서 죽었지.” “내가 당신 다리 때문에 겁 먹을 줄 알아?” 여자는 내 멍청한 동료 앞에 섰다. 주전자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찰나 은빛과 푸른빛의 섬광이 번쩍였다. 안셀의 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바닥에 떨어졌다. 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빗나갔어, 아가씨.” 여자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듯 했다. 안셀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거친 얼굴 위에 거만한 웃음을 떠올리며 앞으로 몸을 약간 기울였다. “어디 한 번 내 목을 핥…” 여자가 다시 한 번 빙글 돌자, 안셀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안셀이 내 앞으로 쓰러진 순간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안셀은 늘 말이 많았다. 이제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려움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등뼈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온통 휘저었다. “자, 투렉 씨. 우리는 차를 한 잔 하고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 여자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앞에 앉아 미소 지었다. 도자기로 된 찻주전자에 끓는 물을 붓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녀는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듯이 안됐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감히 내가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미소였다. 치명적인 미소.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 나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다. “차라고요?” 나는 거의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저런.” 그녀가 말했다. “차 마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4. 가장 약한 심장
"여자를 죽였어야지.” 동생은 구멍 뚫린 티스푼을 찻잔 끝에 걸치고 각설탕 두 개를 그 위에 얹었다.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를 따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두 각설탕이 녹으며 서로 엉겨 붙기 시작하자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입에서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각설탕은 헤어나올 수 없이 어두운 빛의 차 속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소피아는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야.” 나는 말했다. 스테반은 성가신 듯 손을 내저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나중에 어찌 될지 어떻게 알고? 누나, 그런 감정이 곪게 내버려두면 화근이 된다고.” 그는 추궁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작은 불꽃일 때 끄는 편이 낫지 않아? 큰 불로 번져서 집을 다 태우기 전에 말이야.” “알비노 가문 쪽 주요 정보원에게 얘기를 해두었으니…” “정보원들이 한 얘기는 내 알 바 아냐. 소피아는 가문을 배신했으니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그럴 날이 언젠가 오겠지.”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협정을 맺어 놓았어. 소피아가 사고를 치지 않는지 아달베르트가 감시할 거야. 소피아는 이제 그의 책임이라고.” 내가 할 말은 끝났다. 스테반은 마지못해 수긍하는 표정으로 의자에 다시 기대앉아 무릎의 담요를 끌어올렸다. “아달베르트에게는 한 쌍의 눈이 더 있으니 잘 감시할 수 있겠지.” 스테반이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했다. 스테반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보다는 최종 결과만을 중요시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필트오버의 많은 문제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해결사였다. 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쳐야 하는 여러 단계의 선택에 대해 그가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한 손에는 찻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허리에 감겨 있는 갈고리 줄을 어루만졌다. 스테반이 옳은 부분도 있었다. 최종 결과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과정을 훨씬 선호했다. 나는 차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사이로 스테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결심이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입술에 가해진 힘 때문에 턱의 피부가 창백해졌고, 목을 감싼 실크 옷깃 위로 보이는 검버섯이 도드라졌다. “할 말이 또 있나 보군.” 내가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나는 스테반의 약한 맥박만 아니었다면 그의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대신 힘겹게 미소를 짓더니 우리 사이에 놓인 책상 서랍에서 접혀 있는 종이 한 장과 구슬 달린 묵주를 꺼냈다. 그는 괴롭게 기침을 하면서 휠체어를 뒤로 굴렸다. 작은 레버들을 돌리는 작은 동작만으로 작은 톱니가 더 큰 톱니를 돌리고 시계태엽 장치를 움직여 마침내 휠체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일을 통해 소피아 알비노의 약혼식 말고도 또 밝혀진 게 있어.” 스테반이 말했다. “남작의 수하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걸 발견했지.” 나는 찻잔을 찻잔 받침에 내려놓고 스테반이 내민 종이와 묵주를 받았다. 몸의 균형을 옮기자 내 몸을 받치고 있는 검의 뾰족한 끝이 푹신한 카펫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종이의 가장자리는 검게 타 있었고, 그슬린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으로 초록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묵주는 오랫동안 사용한 것이었다. 유리구슬의 겉면이 매끄럽고 윤이 났다. “카밀.” 동생이 저런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가 심각할 때뿐이었다. 혹은 원하는 게 있거나. 접힌 종이를 펼치자 자운의 불쾌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위에 그려진 선들을 찬찬히 보았다. 도면은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고, 설명은 정확했다. 내 눈이 도면을 제작한 기능장의 인장에 닿는 순간 스테반이 말했다. “만약 나데리가 돌아온 거라면…” “하킴 나데리는 떠났어.”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수정학자 나데리가 우리 가문의 최고 기능장이었던 것은 그저 몇 년 전의 일이 아니었다. 벌써 한 사람의 일생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스테반은 무슨 말을 할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누나, 이게 뭔지 알잖아.” “그래.” 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내 가슴 속에서 수정의 힘으로 뛰고 있는 기계의 도해였다. 나는 내 심장의 설계도를 들고 있었다. “전부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이게 남아 있다면 다른 설계도도 남아있을 거야. 설계도를 모두 찾으면 나는 마침내 이 휠체어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가문의 수장답게 내 집을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는 거야.” “가문 수장의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스테반이 혼자 집안을 다닐 수 없게 된 지 수년이 흘렀다. 그가 자신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보면서 절대 잊지 않는 꿈이었다. 스테반에게 이것은 단순한 종이와 묵주가 아니었다. 불멸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였다. “이건 설계도 한 장에 불과해.” 나는 말을 이었다. “너는 나데리의 나머지 설계도를 찾아내면 우리 기능장들이 그걸 보고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동력을 어떻게 공급하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카밀, 제발.” 나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선천적으로 연약한 스테반의 육체에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내 눈과 같이 페로스 가문의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나이나 질병 때문에 흐려질 수 없는 깊고 짙은 푸른색이었다. 그 눈은 내가 들고 있는 설계도를 비추고 있는 마법공학 수정과 같은 색으로 빛났다. 그런 그의 눈빛이 지금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우린 함께 힘을 합쳐 부모님이 꿈꿨던 것보다 훨씬 큰 가문의 성공을 이끌어왔잖아. 누나의 마법 증강체를 나도 가질 수 있다면 이 성공—‘우리’의 성공이야, 카밀—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어. 우리 가문이 필트오버의 미래를 보장하게 될 거야. 발로란 전체의 진보를 이끌게 될 거라고.” 스테반은 언제나 과도하게 극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의 약한 체질과 더불어 이러한 성향 때문에 부모님은 스테반의 요구를 늘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발로란 전체의 정보 요원이 아니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어.” 스테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찾아볼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설계도를 돌려주었으나, 묵주는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서재를 나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카밀? 혹시 나데리가 살아있다면, 만약에 그를 찾으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대할 거야.” 나는 동생이 과거를 더 이야기하기 전에 그를 멈췄다. “내 임무는 언제나 우리 가문의 미래를 위한 거야.” 늦은 오후, 북부 바람 상업지구 근처는 진보의 날 축제를 기대하는 군중들로 아직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혁신을 축하하기 위한 이 연례행사를 준비하느라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미행하는 자를 드러낸 것은 그들이 아니라 술에 취해 비틀대는 외국인 상인이었다. “내, 신에게 걸고 말하지.” 상인이 사방에서 밀어대는 군중 때문에 짜증이 난 채 말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도움은 필요 없소.” 필트오버의 부지런한 일벌들은 우리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금발의 여왕벌만은 예외였다. 나는 그녀를 주시하면서 내 앞의 상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럼 일어나.” 나는 말했다. 프렐요드인 상인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성이 난 그는 손잡이가 상아로 된 단도를 허리춤에서 뽑으려고 했다. 나는 그의 노려보는 시선을 맞받았다. 시선은 내 가슴의 마법공학 수정을 지나 칼로 된 다리로 옮겨갔다. 그는 칼 손잡이를 놓았다. “그래야지.” 내가 말했다. “이제 내 앞에서 꺼져.”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은 뒤로 물러섰고, 비척거리며 길을 건너 필트오버 상업지구의 벌떼처럼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미행만이 멀리 있는 시장 가판대에서 나를 지켜보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나는 다시 군중 속에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쉽게 내 앞에 길을 터주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긴 뒤 가시가 달린 갈고리 줄을 높은 나무 가로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위쪽의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행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자운의 길거리에서도 이목을 끌지 않을 별 특징 없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허리에 찬 화려한 채찍은 필트오버인이거나, 아니면 매우 후한 후원자가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한 발자국 더 들어와 눈 부신 빛에 시야가 가려지도록 두었다. 내가 의도한 위치에 그녀가 섰을 때 나는 그 뒤로 뛰어내렸다. 다리의 검날 끝이 자갈길 사이로 깔끔하게 미끄러져 멈췄다. “잃어버린 거라도 있니, 아가?” 나는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채찍의 검은 가죽 손잡이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채찍을 잡을까 했지만 똑똑하게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찾은 것 같군요.” 소녀는 빈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전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동생분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스테반이 조심하지 않으면 그가 극적으로 연출하는 이런 드라마 때문에 언젠가 사람 하나가 죽을 것이다. “내놔.” 소녀는 한 손은 든 채로 다른 손으로 소매에서 작은 편지를 꺼냈다. 봉투를 봉한 밀랍에는 페로스 가의 문장과 스테반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눈 하나라도 깜짝하면 죽을 줄 알아.” 나는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짜증이 열처럼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테반은 자기 마음대로 나를 위해 조수를 고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내가 조사활동 중 어떤 종류의 “남아 있는 감정” 때문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다. 나는 스테반이 좋은 의도에서 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하킴과 관련해서는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불신을 무릎 담요 아래 꽁꽁 숨겨두고서 내가 떠나기 전에 내 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이런 모욕적인 전갈을 전하다니 너를 죽여 마땅하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보기 위해 말했다. “이름을 대라.” “아비에트입니다.” 아비에트의 손과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고 손가락 하나조차도 증강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를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임무를 맡았나?” “그렇습니다, 부인.” 소녀가 대답했다. “만약 부인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페로스 가문에서 좀 더… 영구적인 자리를 얻어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군.”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려 골목을 걸어나갔다. 아비에트의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기 위해 공격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녀의 숨소리와 둘둘 감긴 채 허리에 달린 철제 채찍이 챙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습니까, 부인?” “예배당.” 나는 주머니 속의 묵주를 만지며 말했다. “따라와.” 영광된 진화단의 제1 회합은 공식적으로는 필트오버 내에 있지만, 그뿐이다. 경계 구역 시장을 지난 이곳에서는 자운에서 올라오는 유독한 악취가 고기 굽는 냄새와 달콤한 케이크 냄새를 압도한다. 자운의 잿빛 대기가 낮은 파도처럼 밀려와 다리를 휘감고, 매연으로 더러워진 가게의 차양을 따라 형성된 물웅덩이를 지저분한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아비에트에게로 돌아섰다. “여기서 기다려.” “부인을 따라가야 해요.” 아비에트가 말했다. “스테반 님께서…” “여기서 기다려.” 나는 더 이상 말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스테반의 수작에 대한 내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광된 진화단은 열렬한 신자들이야. 증강되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감히 말대답하려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새 조수를 쳐다보았다. 아비에트는 뒤로 살짝 몸의 중심을 옮겼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지만, 지금이 적절한 때인지 확신이 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충분히 기회가 있을 거야, 아가.” 낡은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자 어둑한 로비가 나오고, 로비는 철로 된 격자문으로 격리된 중앙 홀로 이어졌다. 다이아몬드 패턴의 격자문을 통해 노란빛을 띤 주황색의 램프 불빛 여러 개가 회중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50여 명의 사람은 같은 높이의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어 마치 거대한 하나의 기계가 그들 아래서 숨 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어두운 벨벳 천이 그들 몸에서 아직 살로 남아 있는 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그들의 금속 팔과 증강된 다리는 따뜻한 빛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곳은 최신의 증강체가 가장 실용적인 기능과 결부되는 곳이었다. 영광된 진화단에게 누군가가 필트오버인인지 자운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구분은 그들이 추구하는 높은 이상에 견주어 보면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다. 회중의 중심에 있는 기계 팔의 젊은 여성이 날렵한 금속 턱을 지닌 남성에게 다가갔다. “몸은 힘이 없고 살은 약합니다.” 그녀가 남자에게 말했다. “기계가 우리를 진보하게 합니다.” 회중이 응창했다. 그들의 말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미래는 곧 진보입니다.” 나는 증언식의 증인이 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걸으며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증강체 무리를 지나 탐색을 계속했다. 자비에르 형제를 발견하기 전 먼저 들린 것은 그의 기계 식도에서 나는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였다. 형제의 벗어진 머리는 호흡 장치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슴 쪽으로 축 처져 있었다. 그는 부속 예배당의 구석구석에 촛불을 켜고 있었다. 자비에르 형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차가운 납과 성에 낀 유리에 당당한 자태로 새겨져 있는, 영광된 진화단의 성인인 회색의 숙녀였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진 창문은 밖에 켜진 아크등의 빛을 받아 으스스하게 빛났다. 나는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장기가 보관된 항아리들이 있었다. 눈알들이 마치 절인 달걀처럼 떠다녔다. 제물 꾸러미를 싸고 있는 리넨 천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기름 범벅에 낡게 해진 것도 눈에 띄었다. 주위에는 파리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제물 꾸러미 중 하나가 움직였다. 작은 쥐 한 마리가 곧 그 뒤에서 코를 내밀더니, 자기 전리품을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보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녀석이 발견한 보물을 싼 천의 끝자락이 들어 올려지고, 둘둘 말린 꾸러미가 풀어지자 바싹 마른 손가락이 떨어졌다. 녀석은 날쌔게 달려들었지만 자비에르 형제는 녀석을 어둠 속으로 쫓았다. “카밀.” 자비에르 형제가 불렀다. 나는 물이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그의 목소리 속에 숨겨진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명상하러 오셨습니까?” “정보를 얻으러 왔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머니에서 철제 사슬에 유리구슬이 얽혀 있는 묵주를 꺼냈다. 자비에르 형제는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 또한 유리 아래에 있어서 항아리 안에 있는 눈알들처럼 확대되어 보였지만, 항아리의 눈과 달리 그의 눈은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묵주를 건네주었다. “이걸 어디서 찾으셨죠?” 그는 묵주를 찬찬히 보면서 고개를 젓더니 혀를 찼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깜빡했군요.” 그는 다시 봉헌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몇 주 전에 본 남자가 이 묵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헌 초에 불을 붙이고 다가오는 진보의 날을 위해 성인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왔었지요.” 자비에르 형제는 창문에 그려진 형상을 향해 고갯짓했다. 회색의 숙녀의 망토는 잿빛이 감도는 보라색 유리, 산화된 톱니, 검게 변한 피스톤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발명가들은 능력의 한계를 느끼거나 실패를 경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회색의 숙녀의 축복을 받으려면 제물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그분의 피부는 사막에 사는 사람처럼 검었어요. 진보의 날 기술자 선발 대회에 참가하는 일반적인 외국인 견습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죠.” 자비에르 형제가 말을 이었다. “그가 어느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비노 가문 근처의 여관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공장에서 나는 것 같던 회중의 노랫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저녁 증언식이 끝났군요. 저는 제 의무를 수행하러 가봐야 합니다.” 자비에르 형제는 내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형제는 어두운색의 예복 자락을 모아 잡고 중앙 홀로 돌아갔고, 나는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겼다. 하킴이 돌아왔지만 내게 소식을 전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눌 때 서로에게 연락할 가장 좋은 방법을 구체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을 주워 다른 제물 옆에 놓았다. 하킴이 다른 평범한 견습생들처럼 신에게 기원하러 왔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하킴은 알비노 가문의 그 어떤 기능장보다도 우월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삼각형과 다이아몬드형 유리가 수 놓인 부속 예배당의 창문을 통해 아비에트가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직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침묵은 발을 끌며 걷는 소리에 깨졌다. 작지만 쥐가 내는 것보다는 훨씬 큰 소리였다. 나는 가슴의 마법공학 수정이 위협을 예상하고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뒤로 돌아보았다. “그분이신가요?” 작은 목소리가 물었다. 금속제 긴 의자 근처의 어두운 구석에서 작은 소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닐곱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회색의 숙녀이신가요?” 아이가 다시 물었다. 아이와 가까워지자 마법공학 수정의 맥박은 안정을 되찾고 아이의 얼굴을 부드러운 푸른 빛으로 비췄다. 아이는 한쪽 팔에 내 뒤에 쌓여있는 제물들과 같이 천으로 싸인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어두운 옷의 반대쪽 소매는 텅 빈 채 달려 있었다. 나는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소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얼굴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뒤 금속제 긴 의자를 부드럽게 만져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수정의 에너지가 호를 그리며 흘러나왔다. 소녀는 불꽃이 광택이 나는 나의 다리 검날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보의 날을 위해서 다리를 포기하신 거예요?” 소녀가 물었다. 영광된 진보단은 다음번의 발명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각자의 소중한 것을 희생해 진보의 날을 기념하는 오래된 자운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자운의 대대적인 파괴를 불러온 “그 사건” 이후 자운 사람들이 삶을 재건해야만 했던 시절에 시작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 전통이 가치 있다는 증거로 상처투성이 폐허 위에 세워진 필트오버의 부와 발전된 모습을 들곤 했다. 나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래전 진보의 날을 위해 포기한 것은 내 다리가 아닌, 훨씬 소중한 것이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내가 대답했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검날로 된 다리가 더 쓸모 있거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의 푸른 빛은 어두워졌지만, 나는 꾸러미를 움켜잡고 있는 작은 손가락들에 거미줄처럼 퍼진 가늘고 검은 혈관을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이렇게 어린아이가 마름병에 걸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영광된 진보단은 때때로 병자들을 받아들이곤 했다. 죽어가는 살을 제거하는 것이 기술을 통해 그들의 삶과 신앙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점점 견디기 쉬워진다고 자비에르 형제님이 그랬어요.” “정말 그렇단다.” 아이를 담당하는 의사가 직무에 태만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의 양쪽 팔을 한 번에 수술했어야 했다. 나는 의사가 메스를 잡으면서 자신의 용기 부족을 친절함으로 가장했으리라 확신한다. 다음번을 기다리는 것은 아이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곧 다른 팔도 수술하지 않는다면 저 거미줄 같은 혈관의 독은 가슴 쪽으로 퍼져 결국 심장을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아이가 다음 진보의 날까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어린 소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생각을 하며 약간 망설였다. 그 순간 나는 가장 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움직임을 포착했다. 나는 일어나 어두운 그림자 여럿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비에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어두운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이 그리워요?” 소녀가 외쳤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녀의 희망에 찬 얼굴이 제단을 일렬로 밝히고 있는 불꽃들처럼 흔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역시 떨리는 마음으로 의심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하킴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내 심장? 아니면 하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그리워할 것인가? 나는 내 마법공학 수정 증강체를 어루만지며 여전히 일정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증강체에 새겨진 각진 페로스 가의 문장 옆에 흐르는 듯한 서체의 작은 글자가 만져졌다. 그것은 하킴 나데리의 인장이었다. “아니.”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비에트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금발이 가로등 아래서 후광처럼 빛났다. 남자 다섯 명이 그녀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증강체는 실용적인 디자인으로서 실루엣이 삐죽삐죽했다. “고 예쁜 걸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가장 덩치가 작은 불분명한 발음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비에트의 손에 들린 채찍을 보고 있었다. 나는 스테반의 참견으로부터 시작해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데 따라붙은 조수, 그리고 하킴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날 쌓인 모든 짜증스러움과 성가신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억눌린 나의 에너지가 분출될 해방구를 찾아 치직 소리를 내며 등뼈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거만한 악한과 그 수하들이면 충분할 것이다. “좀 더 공손하게 말해보지그래.” 나는 소리쳤다. 떠들던 놈이 코를 씰룩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아, 얘들아.” 그가 말했다. “이제 걱정할 게 없어. 우리 모두 한 몫씩 챙기고도 남을 것 같은데?” “오시니 좋군요, 부인.” 아비에트가 말했다. “그래, 우린 진보의 날을 맞아 작은 파티를 즐겨보려는 참이거든.” 구리 증강체의 거구 두 명 중 한 놈이 말했다. 몸집이 두 배는 큰 그의 파트너는 더러운 털모자 챙을 액체로 차 있는 접안경 위로 눌러쓰며 비웃었다. “마님.” 나의 등장에 잠시 놈들의 주의가 흩어졌고, 그들이 형성한 원이 일그러져 작은 틈이 생겼다. 그걸로 충분하다. 빠른 속도와 결단력이야말로 언제나 나의 가장 든든한 협조자였다. 나는 열린 틈을 향해 돌진해 흐느적거리는 놈을 어깨로 길게 밀어냈다. 놈의 더러운 트위드 옷을 피로 물들인 것은 내 다리의 검날이었지만, 그를 기절시킨 것은 푸른 마법공학 수정의 에너지였다. 통통한 놈과 사투리를 쓰는 놈은 아비에트에게 달려들고, 덩치 큰 두 녀석은 내게로 다가왔다. 내 얼굴에는 어두운 미소가 퍼졌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나와 달리 나의 두 파트너는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둘 다 사철 상업지구 위로 울려 퍼지는 쌍둥이 종만큼이나 두텁고 건장한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누가 먼저 공격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내게는 기회였다. 두 놈 다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접안경을 낀 녀석에게 다가가면서 뒷발 차기로 다른 놈의 구리 증강체에 감긴 관들을 갈랐다. 놈은 내 움직임을 잘못 판단했고, 잘려나간 관들을 탁탁 튀는 소리를 내고 있는 화학공학 펌프에 다시 연결하려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낮게 한 번 휘두른 공격에 접안경을 낀 녀석의 다리는 무릎 아래로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나는 구리 증강체 녀석의 팔이 다시 작동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바보 같은 놈들은 언제나 두 번째 공격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은 항상 틀리다. “빠진 부품이나 주워서 내 앞에서 꺼져.” 나는 구리 증강체 녀석에게 말했다. 다른 녀석은 이미 쓸모없어진 그의 다리를 진흙탕 속에 절뚝거리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아비에트의 금속 채찍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한 번 더 채찍을 휘두르자 불꽃이 통통한 녀석 위로 쏟아졌다. 자갈 위에 엎어져 웅크린 놈의 때 묻은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걸로 네 명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투리를 쓰던 쥐 같은 얼굴의 거만한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제1 회합의 홀로 슬그머니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갈고리 줄의 가시가 홀 입구의 각진 바위에 깊이 박혔다. 나는 뛰어올라 놈 위에 착지해 그와 함께 굴렀다. 구르다 마침내 멈췄을 때 위에 있는 것은 나였다. 악취가 진동하는 놈의 호흡은 빠르고 얕았다. “네놈이 정말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나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겁에 질려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때 묻은 더러운 손으로는 벨트에 찬 칼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그는 내 마법공학 수정의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어떻게든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칼로 내 다리를 찌르려고 했다. “해 보시지.” 내가 속삭였다. 그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지만 더 기다리지는 않았다. 칼끝이 옷 가죽을 꿰뚫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리의 칼에 부딪혀 멈췄다. 공격이 무위에 그치자 그는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막지 못한 놈의 비명이 건물의 축축한 바위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홀에 울려 퍼지는 그의 비명에 나는 위를 보았다. 회색의 숙녀가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우리 위에 솟아 있었다. 작은 얼굴 하나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아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기울여 내 발밑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맥이 펄떡거리는 목에 무릎 아래의 칼날을 갖다 댔다. “여기서 또 깡패 짓을 하기만 해 봐. 네놈을 죽여버릴 테니.” 목숨만은 부지했음을 알고 녀석은 어색한 걸음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녀석은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비에트가 금속 채찍을 감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부인이 기계화되면서 자비심이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거짓이었나 봅니다.” 그녀가 말했다. “예의를 지켜, 아가.” 나는 골목에서 걸어나가며 차갑게 말했다. “아니면 예의를 지키게 만들어줄 테니.” 경계 구역 시장과 제1 회합 홀은 주위의 높은 건물들 때문에 언제나 그늘 속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비노 가문 근처의 여관에 다다랐을 때는 진짜 밤이 되었다. 알아듣게 몇 번 얘기하자 여관 주인은 숙박부를 순순히 내놓았지만, 워낙 악필이어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데리는 지하 혹은 3층 어딘가에 있었다. 나는 아비에트를 지하 저장고에 남겨두고 갈고리 줄을 이용해 3층의 열린 창문으로 올라갔다. 방 뒤쪽 작은 벽난로의 불은 다 타서 한 줌의 재 아래 잉걸불만 남아 있었다. 나는 몸을 굽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 안을 비추는 것은 작은 책상 위의 램프 하나뿐이었다. 내 숨이 턱 막히게 한 것은 책상에서 자고 있는 한 남자였다. 어두운 곱슬머리와 사막에서 탄 피부. 내 마법공학 수정이 불규칙하게 진동했다. 그 역시 일부러 시간을 끌었음이 틀림없다. “하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책상의 형체가 움직이더니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몸을 돌렸다. 젊은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눈을 비볐다. 그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하킴과 닮았다. 그러나 그는 하킴이 아니었다. “페로스 마님?” 그는 잠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 어떻게 오신 겁니까?”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아닙니다, 부인.” 그는 거의 부끄러워하다시피 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마님 얼굴을 자주 봤습니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뒤지더니 다른 종이보다 오래되고 바랜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그는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선은 강하고 잉크의 처리는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음영법도 정확했다. 그것은 하킴의 작품이었으나, 설계도는 아니었다. 내 얼굴의 초상화였다. 나는 이 그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기억이 없었다. 하킴이 연구실에서 일을 마친 어느 날 밤 기억에 의지해 그린 것이 분명했다. 그림 속의 내 머리는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나는 숨을 몰아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젊은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어제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부인.”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는 칭찬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내 마음속에 지나간 기나긴 시간을 더 부각시킬 뿐이었다. “삼촌은 이 그림을 돌아가실 때까지 지니고 계셨습니다.” “삼촌은 돌아가셨나?” “그렇습니다. 하킴 나데리입니다. 삼촌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한다.” 이 대답은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이기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진정 답을 듣기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그 질문. 만약 추억의 고통이 수천 개의 작은 상처를 낸다면, 한 번에 그 아픔을 감당하고 극복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나는 하킴과 너무나도 닮은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말해주게. 삼촌은 결혼을 하셨나?” “아닙니다, 부인.” 그는 나를 실망시킬지 어떨지 몰라 주저하며 말했다. “하킴 삼촌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이미 오래전에 눈물을 다 쏟았기에, 내겐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었다. 나는 설계도 뭉치를 들고 가장 위에는 내 초상화를 놓았다. 잉크로 그려진 선들이 내 심장을 대체한 기계의 푸른 빛 속에 흔들렸다. 한때 나였던 것. 내가 포기한 것.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찌르는 듯한 고통의 희생들. 그 모든 고통이 너무나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나는 과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있지만 절대 다시 가질 수는 없었다. “이게 전부인가? 설계도의 전부?” 나의 말은 어둡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부인. 하지만…” 내가 서류뭉치를 쌓여 있는 숯에 던지고 입김을 불자 그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을 받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기름 먹인 양피지는 곧 불이 붙어 붉은 주황빛 불길로 타올랐다. 나는 과거가 타올라 재와 먼지만 남길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를 현재로 돌아오게 한 것은 젊은이였다. 하킴의 조카는 머리를 천천히 저었다. 그의 충격이 뚜렷이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빠른 시간에 잃는 충격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와 아래의 거리로 나왔다. 그는 어깨의 가죽 가방을 고쳐 메고는 자갈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다시 보았다. 그의 패배감이 끓어오르는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나의 과거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거리의 그림자들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금속성의 챙그랑거리는 소리도 겨우 들렸다. 채찍은 매우 빠르게 날아와 내 팔을 옆구리에 묶어놓았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부인.” 아비에트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의기양양했다. 나는 그녀가 하킴의 조카를 훑어보는 것을 보았다. “이러려고 스테반이 널 고용한 거냐?” 나는 이미 그렇게 의심했었다. 아비에트는 저녁 내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킴의 조카를 찾아내 집중력이 흩어진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를요.” 두 거구가 자갈길 위로 걸어왔다. 그들의 증강체는 수리되어 가로등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통통한 남자와 그의 쥐같이 생긴 파트너가 뒤따랐다. 제1 회합 홀의 뒷골목에서 맞닥뜨렸던 그놈들이었다. 통통한 남자가 하킴의 조카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동안 쥐 같은 남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결박하고 재갈을 물렸다. 화학공학 관을 새로 연결하고 온 덩치 큰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주었던 모욕을 갚아줄 기대감에 손가락을 꼬고 있었다. “수정을 잘 챙겨, 에메프.” 아비에트가 말했다. 채찍이 더 단단하게 조여오고, 손목 주위로 철제 수갑을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아비에트는 하킴의 조카 옆으로 걸어갔다. “수정과 나데리 모두를 데려가야 해. 아니면 아무도 보수를 못 받는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가 동생의 질투 때문이었나? 스테반이 걷잡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면서 그 가운데 나만이 불멸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반은 가문에 대한 내 의무의 대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일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진정 모른다는 말인가? “나머지는요?” 구리 증강체 남자가 물었다. 마치 진보의 날 축제를 즐기기 직전처럼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아비에트가 대답했다. “미리 장기를 다 보여주셔서 참 감사하군요, 마님.” 그는 증강된 팔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다. 묶여서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공격할 때는 굳이 의중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히죽거리는 웃음이 커졌다. “덕분에 빨리 해치울 수 있겠어.” 금속 손가락 관절들이 내 턱에 닿았다. 그는 반격을 예상했겠지만, 나는 공격 때문에 내 몸이 무릎까지 꺾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날린 주먹의 관성 때문에 그의 무거운 증강된 팔이 나와 함께 땅바닥을 쳤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났지만, 균형을 순간 잃은 것은 놈이었다. 녀석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순간 조용해졌다. “네놈이 본 게 다가 아니지.” 일어서며 나는 말했다. 가슴의 마법공학 수정의 에너지가 몸 전체를 돌며 에너지 장벽을 만들어냈다. 다른 구리 증강체 녀석이 증강된 주먹을 날려 밝게 빛나는 에너지 벽을 뚫으려고 했다. 장벽은 팍 터지는 소리를 내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아비에트는 나를 에너지 장벽에서 끌어내려고 채찍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내가 몸의 중심을 잃게 하려고 채찍을 잡아당겼다. 내가 칼날 위에서 얼마나 오래 인생의 시간을 보냈는지 그녀가 알 턱이 없었다. 손이 아직 묶인 채로 나는 앞으로 도약해 돌려차기로 두 번째 거구의 목을 치고 착지하면서 첫 번째 녀석을 처리했다. 아비에트는 채찍을 놓쳤다. 그녀는 하킴의 조카를 붙잡고 있는 둘에게 외쳤다. “나데리를 놓치기만 해봐. 둘 다 죽일 거야.” “아직도 내가 자비심이 많다고 생각하나?” 나는 아비에트에게 물었다. 그녀의 덩치 큰 두 수하는 내 발밑에 죽어 있었다. 아비에트는 확신이 없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페로스 가문의 검이자 방패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단어 한 단어 명확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 동생은 고작 자기 이기심이나 좀 더 채우려고 덧없는 삶을 연장하기 위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군. 스테반은 욕심 때문에 자신의 의무와 가문을 배신했어.” 나는 수정의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너는 살아서 내일 아침을 보지 못할 거다.” 나는 수정의 에너지를 강화해 나를 둘러싼 에너지 장벽을 전기가 흐르는 감옥 형태로 만들었다.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이 뛰어올랐다가 강하게 착지해 내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수갑과 자갈길을 산산조각냈다. 충격의 여파는 아비에트와 그녀의 남은 부하 두 명, 그리고 나데리의 조카에게까지 미쳤다. 거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먼지가 공중에 떠다녔다. 아비에트가 자신을 스테반에게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만난 순간부터 싸우고 싶어 했지만, 이 싸움은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신은 가죽 부츠의 뒤축이 도로에 깔린 돌에 길게 흠을 냈다. 머리가 패배를 아직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몸은 이미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일어선 그녀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었다. 스테반이 아비에트에게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나를 너무나 과소평가했다. 이제 그녀는 스테반의 배신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내가 보였던 자비심이 증발해버린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다른 발을 원을 그리듯 뒤로 휘둘렀다. 그리고 칼날이 닿는 순간 내 무게를 실었다. 아비에트는 임박한 죽음을 피해 보려는 듯 버둥거렸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의 두 부하도 곧 처리하고 나니 여관의 뒷골목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아비에트의 피 묻은 채찍을 바닥에서 주워들었다. 하킴 나데리의 조카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벽에 붙어 있었다. 재갈을 물려놓은 더러운 천 사이로 헐떡이며 내쉬는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겁먹은 동물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가듯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목의 결박을 풀어주고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 닿은 그의 손가락은 떨고 있었다. 두 발로 서자마자 그는 내 손을 놓았다. 그는 내가 수행하는 임무의 폭력적인 면을 본 것이었다. 내가 하킴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었던 모습.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모습. 한때 마음 약한 여자였던 나는 진정 불타서 없어지고, 차가운 어둠과 회색 재만이 남았다. “선발 대회.” 그가 말했다. 턱이 새로운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내일 기능장들에게 뭘 보여줘야 하죠?” “삼촌 밑에서 배웠나?” “네. 삼촌이 모든 걸 다 가르쳐주시기는 했지만, 설계도는…” 하킴의 조카는 자신의 선택권이 두 가지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해 일하거나 아니면 일생의 직업을 포기하거나. 정보 요원으로서 나는 그의 지식이 다른 가문에서 쓰이도록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공포에 질린 눈에서, 나는 세상에 무지했던 그의 순수함이 희생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잔인한 구원자이자 어두운 보호자였다. 잔혹한 이해의 이 순간에 나는 ‘그의’ 회색의 숙녀, 두려워하고 숭배되어야 할 강철의 그림자가 되었다. “내일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네.” 복잡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상태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나는 그가 새벽이 오기 전까지 다시 결의를 굳게 다지기를 기도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피해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서 동생의 서재 발코니 바깥을 내다 보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저택의 지붕 끝에 달린 삼각 깃발들이 나부꼈다. 도시 전체가 내 앞에 펼쳐져 보였다. 서재의 문이 열리고, 다음날 견습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저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바쁜 발걸음 소리 속에 과거 수년 동안 반복되어 온 일들이 다시금 펼쳐지고 있었다. 매해가 너무나도 비슷했다. 두 해만 빼고. 사막 출신의 잘생긴 남자가 내 심장과 함께 춤추며 사라진 해. 그리고 내가 그에게 심장을 없애달라고 했던 해. 저 두 해 사이에 하킴은 얼마나 자주 나와 함께 이곳에 왔었던가. 삼각 깃발을 나부끼는 저 산들바람이 발코니에 서 있는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흩날리곤 했다. “이런 미래라니.” 필트오버의 반짝이는 탑들과 아래쪽에서 여러 건물을 비추는 자운의 빛을 보며 그는 말하곤 했다. “모든 부품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너무나 섬세한 기계야.” 나는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진보의 미래, 곧 필트오버의 미래라고. 진보는 필트오버를 발전하게 했지만, 망가진 기어가 하나라도 있으면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톱니 하나가 책임을 다하기를 거부하면 기계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스테반의 휠체어가 카펫 위로 삐걱대며 들어왔다. 내 손가락은 하킴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심지어는 주머니 속 묵주의 매끈한 유리구슬에서라도 위안을 찾기를 갈망했다. 대신 나는 둘둘 말린 아비에트의 채찍을 손으로 더 힘껏 감아쥐었다. 하킴은 나를 이 어둠 속에서 건져내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내 임무, 가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내 그림자에서 더 이상 끊어내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늦게 확인했을 뿐이었다. “카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약한 그의 모습과 더 약해빠진 내 과거로의 회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계태엽 장치가 째깍거리더니 스테반의 휠체어가 내 뒤에 섰다. “돌아왔군. 아비에트는?” 그가 말했다. 나는 아비에트의 채찍을 그의 무릎 담요 위에 던졌다. “그렇군.” “아비에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어.” 나는 말했다. “그 임무란?” 그렇게 오래 휠체어 생활을 한 사람치고 스테반은 뛰어난 춤꾼이었다. 그는 채찍의 철삿줄을 잡아당겼다. “내 임무를 상기시키는 것이지.” “’누나의’ 임무?” 스테반의 초조함은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오늘 그가 죽게 될 것을 알았다. 그의 계략은 탄로 났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특히 나로부터는. 스테반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생명이 끝나기 전 최대한 지독하게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약한 육체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말이었다. “누나의 임무는 나를 위하는 거야. 아버지를 위했듯이.” 임무. 아버지. 제대로 선택된 단어들은 칼보다 더 깊이 찌르는 힘이 있다. “누나는 나를 섬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스테반이 으르렁거렸다. “아니, 난 이 가문을 섬기기로 맹세했어.” 내가 했던 맹세, 모든 정보 요원의 맹세가 마음을 새롭게 찔렀다. 이제는 애쓰지 않고도, 후회 없이도 다시 그 서약을 입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가문을 위해 정직하고 충실한 정보 요원이 될 것이며, 나보다 가문의 필요를 우선순위로 둔다. 이를 위해 나는 몸과 마음과 심장을 바친다.” 똑같은 말을 하킴과 헤어지는 날 밤에도 했었다. 나는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미 나를 다른 대상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 정보 요원의 임무는 원래 내 것이었어.” 스테반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그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휠체어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누나는 그 맹세를 아버지께 했지만, 그다음엔 어떻게 했지? 누나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그 후에는 이 집을 거의 방치했지. 무엇 때문에? 사랑? 관심? 그때 누나의 임무는 뭐였어?” 스테반은 우리 사이의 허공에 대고 마구 말을 쏟아냈다. 저 거미줄처럼 솟아난 핏줄, 저 마름병. 나는 저 병이 곪도록 너무 오래 방치해두었다. 스테반의 광기를 무시하면서까지 내가 가문에 어떤 친절함을 베풀었던가? “난 가족을 위해 내 심장을 잘라냈어. 널 위해서, 스테반.” 나는 말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포기했어. 그 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도 계속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어?” 스테반은 물기 있는 불꽃처럼 식식거리며 말했다. 다시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불붙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아는 채로. “아버지가 누나에게 이 자리를 줬지만, 나는 나야말로 자격이 있다는 걸 평생을 통해 아버지에게 증명해 보였어.” 스테반이 말했다. 혐오감이 그의 말에 묻어났다. 그의 분노는 화학공학 약품이 유출되어 공기를 독으로 오염시키듯 빠르게 치밀어 올랐다. “누나는 내가 누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다 누나 때문이야. 누나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내가 개입할 일은 없었을 거야.” 스테반을 이런 괴물로 만든 건 나였다. 나는 그의 어두운 계략과 불순한 동기들을 다 용인해왔다. 스테반이 없는 미래, 한때 여자였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미래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결심만 더 확고했다면 이 모든 걸 수년 전에 이미 끝낼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일부를 깎아내기까지 했으면서도 가문을 검게 물들일 그 한 조각을 잘라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네가 내 임무를 상기시키려고 계략을 짜지 않았다면 나는 하킴과 함께 떠났겠지.” 스테반은 그날, 내가 임무를 등한히 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하려고 상처투성이로 피를 흘리며 내 앞에 나타났었다. 스테반이 공격당한 것이 사실은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몇 년 후에도 나는 오히려 안심했었다. 감정에 잠시 눈이 흐려져 판단력을 잃게 된 찰나 동생이 감정과 명예를 구분할 수 있도록 나를 강하게 자극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본분을 포기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지고 있는 책임을 오롯이 떠맡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스테반의 어둠의 격려였다. 나는 스테반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실크 옷과 주름진 피부 아래 뼈가 그대로 느껴졌다. 내 가슴의 진동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스테반의 푸른 눈은 내 증강체 주위의 에너지가 상승함에 따라 깨진 유리 조각처럼 굳어졌다. “너는 언제나 나의 책임이었어.” 공기의 서늘한 기운이 내 말을 관통했다. “스테반, 이젠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어.” 나는 전기 에너지 때문에 목 뒤의 털이 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손을 스테반의 어깨에서 얼굴 가장자리로 가져갔다. 한때 소년 스테반의 관자놀이를 덮었던 구레나룻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호를 그리며 흘러나와 스테반을 감쌌다. 스테반의 심장을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압박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동생을 그토록 어두운 자리에까지 몰고 갔던 허약한 심장은 마침내 그의 가슴 속에서 멈추었다. 그의 눈이 감기고, 턱은 내 손으로 힘없이 늘어졌다. 마법공학 수정의 진동이 서서히 느려져 일정한 리듬을 되찾았다. 나는 뒤돌아 필트오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추위가 필트오버의 금속 뼈 속에 자리 잡았지만, 내일이 되면 다시 생명으로 진동하며 전진하기 위한 발걸음을 계속할 것이다. 진보를 위해. 너무나 섬세한 기계야. |
[1] grand niece는 조카의 딸과 종손녀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