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포식자라는 것들은 본래 자신보다 훨씬 약한 놈들을 잡아먹는 족속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허에서 온 생명체들은 역시나 이 세상의 상식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다. 발로란으로 숨어들어온 공허의 존재 카직스는 오로지 강한 상대만 골라서 잡아먹기 때문이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이 포악한 포식자는 자신이 먹어치운 것들의 위력을 죄다 흡수해서 점점 더 강한 생물로 진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최근 탐내고 있는 먹잇감의 이름은 '렝가', 카직스가 이 발로란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동급이라고 인정하는 상대다. 이 세계로 건너올 당시만 해도 카직스는 아사 직전의 쇠약한 상태였다. 그는 언제나 더 빨리, 더 강한 생명체로 진화하고 싶었지만, 주위엔 항상 작고 나약한 동물들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강해질 수 있을까? 더 강한 힘을 위해서는 당연히 더 강한 짐승들을 사냥해야 했다. 카직스는 위험한 상대만을 골라 잡아먹기로 결심했고 하나씩 사냥하기 시작했다. 식사, 식사, 식사시간이 거듭되면서 그는 점점 더 강력하고 민첩한 포식자가 될 수 있었고 사냥감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다. 기세가 등등해진 카직스는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그날... 그날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카직스는 자신이 누군가의 사냥감이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며 그날도 태평하게 갓 잡은 먹이를 음미하고 있었다. 습격은 느닷없이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다. 숨어있던 괴물이 날카로운 송곳니와 강철 같은 발톱을 휘두르며 번개처럼 튀어나왔고 카직스는 굴욕적으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면전에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베어내는 놈의 발톱 밑에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피를 뚝뚝 흘렸다. 분노한 카직스는 괴성을 지르며 가까스로 야수의 눈을 할퀴었고 겨우 한 걸음만큼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싸움은 해질녘부터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고 둘 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날의 상처가 거의 다 아물었을 때, 카직스는 굳게 다짐했다. 기필코 렝가를 정복할 것이다. 감히 공허의 위력에 대항했던 그 괴물을 조각조각 씹어 삼킬 것이다. |
2. 적응
추방당한 자는 곧 잊힌다. 너는 잊혀진 게 아니다.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었지. 족쇄를 찬 노예도 가치가 있고 망자에게도 애도를 표하지만, 너는 너무도 하찮아서 누구도 네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난 킬라쉬족 출신이지만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더는 누구도 족장 폰자프의 아들 렝가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난 몸만 쫓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추방되었다. 그런 운명을 벗어날 길은 없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세월과 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없다.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난 사냥꾼의 길에서 수집한 전리품을 들고 부족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바라보더니 돌아올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얼굴을 기억해 주고, 내 심장 소리를 다시 들어 줄 그곳으로. 대신 아버지는 조건을 걸었다. 그림자. 칠흑 같은 밤의 칼날. 괴물. 정글에서 그놈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겠노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나무들 사이에 녹아들어 청각과 후각,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수천 마리의 크고 작은 동물들의 흔적을 분석했다. 사냥꾼의 본능이었다. 부족에서 추방된 나에게 혹독하게 사냥의 기술을 가르쳐준 한 남자 덕분에 얻은 능력이다. 마콘이 준 칼도 아직 내게 있었다. 나는 이곳에 있는, 하지만 이곳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그 '괴물'을 추적했다. 외투에 달려 있던 걸리적거리는 전리품들은 모두 야영지에 두었다. 내게는 오직 칼, 털가죽에 바른 기름, 그리고 조심스럽게 뛰는 사냥꾼의 심장뿐이었다. 우림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이상한 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때 '뭔가' 느껴졌다. 희미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멈춰서 역겹도록 달콤한 그 생소함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잘못돼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명을 위협했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밀어냈다. 진짜 사냥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것의 자취를 따라갔다. 놈의 흔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추적했다. 악취를 견디며 이동하던 중, 마침내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전방의 나무들 사이로 들려왔다. 뭔가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다. 바로 정글 칼날부리들이었다. 최상위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포식자인 칼날부리가 사냥당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극도로 굶주렸거나, 아니면 훨씬 강한 존재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나는 이빨을 번득이며 웃었다. 힘든 사냥이 될 것 같았다. 놈의 악취는 그야말로 지독했다. 냄새는 숲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깃털 뭉치에서도 피어났다. 원래 밝은색이었을 깃털들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발톱을 세워 두툼하고 거친 나무 위로 조용히 올라갔다. 그리고 나뭇잎 그림자 속에 숨어 축축한 공기를 음미하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사냥감을 탐색했다. 괴물은 몸놀림이 빨랐다. 마치 날카롭게 갈린 무기처럼 앞뒤로 움직이며 먹잇감을 사냥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놈의 목적은 전리품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에서는 원초적인 생존 욕구보다 더 큰 갈망이 느껴졌다. 칼날부리가 모두 죽자 괴물은 속도를 늦췄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마치 연기처럼 땅 위를 미끄러지듯 뛰어다니는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 순간, 난 생각이 복잡해졌다. 괴물은 곤충과 닮아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각각의 신체 부위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한 개체에서 볼 수 없는 팔다리와 피부, 갑각이 썩은 과일처럼 어두운 보랏빛으로 번들거리는 외골격 안에 들어 있었다. 심지어 주위의 공기와 빛마저도 그것과 닿기 싫은 듯이 뒤틀렸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 괴물도 추방된 것이 분명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독한 존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야 했다. 나는 마콘의 칼을 손에 쥐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소리 없이 뒤로 착지한 나를 괴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다가간 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내가 최상위 포식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적응과 본능 덕분이었다. 그런데 괴물에게 다가가던 그 순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만약 그때 주저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칼날부리 꼴이 났을 것이다. 나는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발톱을 가까스로 피했다. 놈은 '알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당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상황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너무 쉬웠다.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아버지의 약속이 내 판단력을 흐려지게 했다. 자신감은 자만심이 되었고 결국 나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다. 괴물의 목에서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났고 턱 아래로는 체액이 흘러내렸다. 등에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갑각을 밀어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즐거워서인지 몰라도 놈은 쇳소리를 냈다. 순간 등에서 두 개의 팔이 솟아나더니 곧 점액이 뚝뚝 떨어지는 흉측한 날개로 변했다. 놈은 나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변신'했다. 순순히 당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돌진했다. 움직임이 너무 굼뜬 탓에 괴물은 내 공격을 받아쳤고, 마콘의 칼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소중한 칼이었기에 어리석게도 내 눈은 칼을 좇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괴물이 공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또다시 날아왔다. 뜨겁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고 머릿속에 굉음이 울렸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야가 가려져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오른쪽 눈은 흐릿했지만, 왼쪽 눈은 컴컴했다. 머릿속의 굉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는 뺨을 어루만지며 놈이 내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확인했다. 괴물은 날개를 퍼덕이며 위로 날아올라 이빨을 드러냈다. 날개에 묻어 있던 더러운 점액질이 떨어져나왔다. 도전의 의미인지, 아니면 나를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놈은 내게서 왼쪽 눈을 앗아갔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속이 뒤틀렸다. 나는 주먹을 쥐고 아직 멀쩡한 눈을 비볐다. 이 역겨운 괴물은 내게서 사냥꾼의 역할을 빼앗았고 또 더럽혔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분노뿐이었다. 나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칼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내게는 타고난 발톱과 혼자서 체득한 승리의 포효가 있었다. 내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 우리는 충돌했다. 격렬한 피의 춤은 끝이 나지 않을 듯 보였다. 우리는 쫓고 쫓기며 싸움을 계속했다. 괴물은 차가운 암흑과 같았고, 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태양이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서로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해가 지자 괴물이 도망쳤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내 바람일 수도 있다. 내게서 더는 배울 게 없다고 판단하고 더 강한 존재를 찾아 떠난 걸지도 몰랐다. 나는 탈진한 채 쓰러졌다. 남은 것은 상처와 괴물과의 끔찍한 연결감뿐이었다. 그 유대는 놈이 내 일부를 삼킨 순간 형성되었다. 킬라쉬족은 그 괴물을 '카직스'라고 불렀다. 고대어로 '너 자신을 마주하라'는 뜻이었다. 분명 괴물은 싸우는 도중에 계속 성장했고 또 뒤틀렸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쉼 없이 전진했다. 반면 나는 나 자신을, 과거를 돌아봤다. 내가 태어난 부족을 생각했고, 추방당한 기억으로부터 분노를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 괴물이 적응했듯이, 나도 반드시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놈을 사냥할 수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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