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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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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TULIP 교리에 대한 비판
2.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1.1. 자유의지의 잔존 관점에서2.1.2. 감리교 : 전적타락의 해석 관점에서
2.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2.3.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2.4. 불가항력적 은혜 (Iresistible Grace)2.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3. 로마서 9장4. 창세 전 예정5. 절대예정
5.1. 절대예정과 자유의지
6. 한국 장로교의 경직화7. 장로교회(개혁교회) 내부에서의 비판적 재검토

1. 개요

이 문서는 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의 예정교리를 비판하는 문서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자들이 믿는 5대 튤립(TULIP) 교리는 다음과 같다.
  •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갖는 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갖는 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갖는 데에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 없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의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 불가항력적 은혜 (I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1]

2. TULIP 교리에 대한 비판

2.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1.1. 자유의지의 잔존 관점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2] (롬3:10-12)

칼빈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전적 타락의 근거로 자주 인용하는데, 인용된 구약성경과 로마서 3장의 전체 문맥을 보면 칼빈주의에서 주장하는 회개할 능력조차도 없는 전적 타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그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은 어느 기독교 교파에서도 인정하는 바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구절을 들어 죄로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는 회개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없다고 성경에 나왔더라면 칼빈주의식 전적타락이 맞겠지만, 성경에 아브라함, 다윗, 엘리야 등 하나님을 찾았던 자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14편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시편 14편이 쓰여졌던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한 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4-45)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9)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3]은 인간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갈3:2)[4]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5-8)

갈라디아서는 성도가 복음을 들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님이 그 안으로 들어가신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보아, 회개하는 것과 믿는 것에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5][6] 회개한 다음에 복음을 믿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우에도 회개가 전제되어 있었음이 로마서 4장 5-8절에 나와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복음을 듣고,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면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성령으로 개입하시게 되고, 그 이후 성령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7] 예수님에 대한 의지적 믿음을 발휘하면 성령님으로부터 상태적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8]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자유의지도 필요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경우 성령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성령의 선물인 것이고,[9]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따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10] 또한 요한복음은 성령 강림절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지 않으셨지만,[11] 사도들이 죄사함 받아 깨끗하게 된 적은 있다고 말하고 있고,[12] 성령 강림절 이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3] 이로써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도 사람들이 죄사함 받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14]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갈 수 없다는 요한복음 6장 44절은,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15]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께로 갈 수 없다고 해석 할 경우 큰 무리 없이 해석된다. 그리고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음을 발휘할 때 성령님이 도와주시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경우,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로마서 12장 3절이 충분히 설명된다.[16] 이로써 믿음(faith)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생길 수 없다고 하여, 전적 타락 교리가 성경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고, 성령의 은사에 해당하는 믿음의 경우 성령님이 인간의 믿음에 반응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9)

이 성경구절을 헬라어 원어로 문맥과 함께 들여다보면, 믿음이 아니라 구원의 전반적 과정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어에서는 'τοῦτο'(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성 단수 지시대명사이다. 한국어로 보면 이것이 가리키는 후보가 은혜, 믿음, 구원인 것 같지만 원어로는 구원이 동사로 쓰여서 구원이라는 명사를 수식할 수 없고, 은혜와 믿음은 여성명사라서 이런 것들을 수식하는 것이었으면 여성 단수 지시대명사인 'αὕτη'를 썼을 것이다. 따라서 앞의 문장 전체를 받아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타당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믿음이 포함되므로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부동산을 증여할 의사표시를 하고 자식이 승낙을 하여 증여가 이루어졌을 경우, 증여가 자식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자식이 승낙의 의사표시를 했다며 증여가 자식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문장의 거의 바로 앞에 있는 에베소서 2장 5절[17]이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에베소서 2장 8-9절의 핵심이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믿음은 구원이 율법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곁다리로 언급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믿음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바울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 (대하12:12)

전적 타락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단 하나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선택 받을만한 조건이 될만한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 조차 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분노를 돌이켰다고 나와 있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하나님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르호보암을 겸비하도록 만든 것이면 르호보함이 겸비하도록 만든 주체는 르호보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르호보암을 겸비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은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대하30:11)
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대하33:23)

또한 여기서도 사람들이 스스로 겸손하였다고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9-1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고침받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사야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면 가만 놔둬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해서 고침받지 못했을텐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침받지 못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사야에게 그런 말을 하도록 시킨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잠재우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실 필요가 없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면 그냥 놔둬도 영적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2:25)

여기서 '주다'라고 번역된 동사 'δίδωμι'는 '주다'라는 뜻과 '허락하다'라는 뜻이 둘 다 있다. '허락하다'라고 해석할 경우 '회개를 허락하셨다',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특정 상황에 회개를 허락하시지 않는 경우, 가만 놔둬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이사야 29장 10절처럼 깊이 잠드는 영을 붓는 방식으로 허락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면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다'라고 해석하더라도, 하나님이 회개할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회개를 완전케 하신다는 의도로 회개함을 주셨다고 표현했을 수 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2:4-5)

로마서에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 즉시 심판하는 것을 참으시며 회개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회개를 인도하는 방식이라고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이 강제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회개할 수 없다면, 성경에 숱하게 나오는 사람을 향해 회개하라고 하는 말들이 다 의미없는 말들로 전락해 버린다. 다만 로마서 8장 26절[18]처럼 인간 스스로 완벽히 기도할 수는 없으므로, 회개할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가서 회개를 도우실 수는 있다. 복음을 듣고 본인도 인식하지 못할 무의식적인 회개의지가 있었는데 성령님이 그 사람의 회개를 도우셔서, 그 사람 입장에서는 강제로 회개시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19]

2.1.2. 감리교 : 전적타락의 해석 관점에서

칼빈주의에 대한 극렬한 비판으로 생겨난 감리회도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에 따라 전적타락이란 용어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원죄 이후 인간은 스스로의 행위의지만으로는 결코 무죄할 수도, 선행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는 칼빈주의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모든 인간들에게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칼빈주의와 다르다. "인간의 영혼 자체가 100%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도대체 무슨 수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랜덤 가챠 뽑기라고 설명해버리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하신 소수 이외의 사람들은 양심이 전혀 없어야 하고 따라서 죄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어져버린다는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칼빈주의대로라면 인간들이 행악하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마음먹어서 그리된게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그 인간들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사후 지옥의 영벌로 물어야할 인간 행악의 책임은 아담과 하와 외에는 고스란히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지옥의 필요성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악한자가 행악하고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행악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는 악인의 주장에 대해서 칼빈주의는 어떤 반박이나 추궁도 할 수없어, 결국 인간의 행악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시키는 신성모독적 일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일본군 731부대와 종군위안부라던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일성이 북한사람을 학살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해서 탈북자들을 벙찌게 하는 목사도 실제로 존재한다. 게다가 "단지 하나님이 선택해서 구원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두를 선택하지 않고 영벌로 밀어넣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칼빈주의는 불가지론적 섭리론으로만 대응하여 해당 신학적 논의의 실효성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그래서 감리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유지의 댓가로 육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회개는 육의 행위가 아니라 양심의 감동이므로 육의 행위의지가 전적으로 악해도 하나님이 주신 선행은총인 양심이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회개한 자가 자신의 마음의 바람대로 무죄하고 선행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 의지 일뿐이며, 양심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진정으로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대상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마음으로 행악한 자는 이미 악을 저지른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정리한다.

2.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욥22:29)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34:1)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3:34)

성경에는 하나님이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나와 있고,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이런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를 하나님이 겸손하도록 만드는 것이므로 성경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3:3-4)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데교회에는 이미 구원을 받은자 몇명과, 구원 받기로 예정되어있지만 아직 구원은 못 받은 사람들이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하지만 칼빈주의에 따르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것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데, 예수님이 구원을 위하여 인간을 향해 회개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명령할 거면 성령님을 향해 명령해야 할 것이다. 즉, 불났는데 예수님이 소방서가 아니라 빵집에 전화해서 불 꺼달라고 한 격이다. 예수님은 분명 구원에 있어서 회개라는 조건을 달고 있고, 회개하라고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볼 때, 회개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셔야 회개가 가능하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15:16)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이 구절들은 무조건적 선택의 근거로 자주 쓰이는데, 이것을 꼭 칼빈주의적 관점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특정 상황에서 복음을 듣게 됐을 경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지하시고, 하나님이 그 성도를 미리 택하셨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특히 로마서 8장 29절에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택하셨다고 나오는데, 미리 알았다는 것은 예지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절[20] 역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도들이 택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택하지 않았다는 말을 인간의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요한계시록 3장 20절[21] 등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표현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따라서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오는 '택하다'라는 단어를 '먼저 초청하다'라는 뉘앙스로 해석하면 무리 없이 해석되는 동시에 성경 전체와도 조화를 이룬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1,16)

이 구절들은 무조건적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원해서 육신의 힘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택함받지 못했던 것처럼, 구원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택하심으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될 것으로 예지되는 자들을 미리 택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신30:19)

사람이 하나님에게 택함 받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명령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향한 명령문은 상대방에게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라고 하는 문장인데, 칼빈주의는 성경의 수많은 명령문들을 칼빈주의 교리에 끼워맞춰 억지로 해석하도록 만든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11:5-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이런 구절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는 의도의 육신의 행위는 선택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뜻일 뿐이지, 하나님에게 선택받는 데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선택되어 육신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믿는 데에 사람의 자유의지가 개입되어도 선택받는 시점은 그 사람이 그 자유의지를 발휘하기 이전이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선택받는 데에는 그 사람의 공로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요12:39-40)

이 구절만 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버림 받은 것 같아 보이나, 성경에는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2:9-12)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3)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 (사28:12-13)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사54:7)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3: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18:23)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으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 요한계시록 2장 21-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기회를 끝까지 거절한 자들을 버리시고 심판하신다. 또한 이사야 28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하나님은 기회를 거절한 자들의 기회를 박탈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이사야 54장 7절과 전도서 3장 1절을 볼 때,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지만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현재는 기회가 없는 택함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이미 택함받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주권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시기 조절 목적으로 그 사람을 완악하게 만드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나름의 이유에 의해 택함도 기회도 받지 못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22] 즉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공의에 의해 사람들을 완악하게 만드시는 것이지,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버리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택함 받았고 기회도 받은 사람, 두 번째는 택함 받았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 현재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 세 번째는 아직 택함 받지는 않았으나 혹여나 택할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여 기회가 주어진 사람,[23][24] 네 번째는 현재는 택함도 기회도 받지 못한 사람이다.[25]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데, 왜 항상 기회를 주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으나, 이사야 43장 7절[26]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영혼 구원이라는 목표가 이것보다 우선순위에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반문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1순위로 두지 않는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로마서 3장 5절[27]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인간의 불의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자신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28] 것을 선택하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4-45)

다만 현실적으로 어떠한 방법론을 따라서 전도 등을 한다고 해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29] 별로 기대되지 않았던 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케이스가 많기에, 체감상으로는 무조건적 선택이 맞아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선택에 반대하는 입장도 영혼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택하심, 주권, 계획 등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인간의 전도 활동 등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하나님의 영혼 구원에 대한 계획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려가 있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2.3.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2)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2:9)

성경에는 구원이 미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누구든지', '모든 사람'등의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칼빈주의적 관점에서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한)이라는 사족을 달아서 해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긴 하지만, 사람들의 완고함이 예지되어서 모든 사람을 미리 택할 수는 없었을 뿐이다.

2.4. 불가항력적 은혜 (Iresistible Grace)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2-3,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23:37)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롬10: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계2:21)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해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그 기회를 거절했다고 여러번 나온다. 칼빈주의 식으로 인간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 때문에 회개할 능력 자체가 없는 거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회개할 기회는 줬지만 은혜는 베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도 없는 회개를 안 했다고 그 사람들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된다. 위에 있는 구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자연스럽게 읽힌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

불가항력적 은혜가 사실이라면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없는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이 구절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근거로 자주 쓰이는데, 애초에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지 않을 자들만을 이끌어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해도 아무 무리가 없다.

2.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출32:33)

칼빈주의에 따르면 구약시대, 신약시대를 불문하고 창세 전부터 선택된 사람은 결코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죄를 짓는 자의 구원을 취소시키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칼빈주의에서는 이것이 실제론 그런 뜻이 아닌데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이를 간신히 설명한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께 범죄한 자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신학적 이론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또 실제로 구약 율법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죄를 지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숱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23-35)

예수님은 구원과 관련된 비유에서 분명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취소된다고 말하셨다. 칼빈주의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려면 처음에 탕감받은 빚이 사실 진짜로 탕감받은 것이 아니었다고 해야 하는데, 이런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11:21)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신자 개인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구원의 취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로마서 14장, 15장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로마서는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상당히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일 것으로 상정하고 쓴 글인데, 바울은 그 사람들이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바울은 안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멸하시는 사람이 애초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어서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살전5:19)

사람은 안에 성령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데, 이 구절은 성령이 성도 안에서 떠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13)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모두 신랑(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을 기다리기 때문에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고, 종말을 맞이할 성도들이 재림의 때에 깨어있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등을 하나님의 성전 된 자신의 몸, 기름을 성령으로 이해하면 완벽한 비유가 된다.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는 평소 회개 등을 통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던 성도들인 것이다. 만약 미련한 다섯 처녀가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불이 켜있던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등불이 꺼져간다고 말하면 안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21:34)

이 성경 구절 역시 재림의 때에 방종한 상태로 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둔하여진다는 표현으로 볼 때 영적으로 깨어있다가도 영적으로 둔해질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둔해진 사람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건 둔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둔한 사람인 것이다. 성도의 견인이 보장된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영적으로 강제로 깨어있게 돼야 하고, 거기에는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도 없어야 하는데, 성경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8:11)

칼빈주의 이론에 입각하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믿음이 약한 형제는 창세 전부터 무조건 구원받기로 선택된 사람인데, 사도 바울은 그 형제가 멸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7)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던 바울이 두려워할만한 것은 구원의 취소 말고는 없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2-3)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이 있는 성도들이 미혹되어 부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부패하게 된 사람들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났다는 표현을 쓰면 안된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2-3)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자, 그 사람들이 육체에 속한 사람으로 끝나 구원을 받지 못하게 생겼다고 갈라디아서에서 말한다. 즉 구원의 취소를 말하고 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3-4)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내세우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30] 은혜에서 떨어진다고[31]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쓰인 동사들을 볼 때 그 사람이 처음부터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딤전5:11-12,15)

바울은 젊은 과부가 자신의 정욕 때문에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건데, 믿음을 저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

이 구절은 사람이 돈의 미혹을 받으면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믿음 자체가 없었다는 건데, 믿음에서 떠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6:4-6)

히브리서는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지만, 심각하게 타락해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는 건 새롭게 된 적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10:27-29)

또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적이 있는 사람이 타락했을 경우 그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애초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이 거룩하게 된 적이 있다고 표현하면 안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3:14-15)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만약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면 구원받은 이후로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단 한번이라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예수를 믿은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온대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요일5:16-17)

요한1서는 성도를 사망에 이르는 하는 죄가 있다고 말한다. 사망(θανάτου)이라는 단어는 같은 서신 앞부분에 있는 3장 14절에서 구원을 못 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죄는 죄인데 성령이 소멸되지는 않은 상태[32]가 되게 하는 죄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고, 성령이 소멸되게 하는 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바로 앞의 3장 14-15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의 예시로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들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 9-10절[33], 갈라디아서 5장 19-21절[34], 에베소서 5장 5절[35] 등에서 성도들을 향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짓는 죄의 목록들의 예시를 괜히 든 것이 아니다. 다만 바울은 이런 죄들을 짓지 말라는 가르침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율법이 되어버리면 그런 죄들을 짓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36], 스스로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서 자연스럽게 육신의 욕망을 죽여[37], 율법의 요구를 이루라고 말한다[38][39]. 물론 그런 죄들을 짓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새로 시작하면 된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9)

이 구절은 문맥 상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하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존재도 끊을 수 없다며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이다. 애초에 믿음을 지키느라 환난을 당하는 것이 전제로 깔린 말이므로, 이 구절로는 성도가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7-29)

이 구절은 어떤 존재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를 강제로 구원에서 탈락시킬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믿음을 떠날 수는 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고[40], 성도가 죽어서 영생에 들어간 이후 그 사람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영생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신 거라고도 해석 가능하다.[4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16)

이 구절에서 영원토록이라고 번역된 'εἰς τὸν αἰῶνα'는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영원히'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뜻은 맞으나, 성도의 견인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이 구절은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끝내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창고 열쇠를 주며 이 열쇠로 창고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했어도 그 사람이 창고로 가던 도중에 열쇠를 잃어버리면 그 창고 문을 못 여는 것과 같은 이치로, 성령께서 성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성도가 중간에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이 구절은 하나님이 성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5:5)

이 구절은 한번 구원 받으면 막 죄짓고 살고 사탄에게 넘어가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바로 앞의 고린도전서 5장 2절을 보면 교회에서 쫓아낸다는 뜻인데, 그렇게라도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10:14)

한국어 번역을 보면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구절 같지만, 같은 장의 히브리서 10장 1절을 헬라어 원문과 함께 보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1절과 14절에는 'εἰς τὸ διηνεκὲς'라는 구절이 쓰였는데, 10장 1절에서 이 구절은 구약시대에 제사를 '계속' 드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쓰였다. 10장 14절에서는 이와 대비하여 십자가에서의 한 번의 제사의 효과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한번 거룩하게 된 사람들의 구원이 무조건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히브리서는 구원의 취소에 대해 여러번 말하고 있는 서간이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9)

이 구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구원은 천국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지, 문맥상 이 구절이 이 땅에서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이 구절은 성령 안에 있으면 구원의 날까지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성령이 성도에게서 결코 떠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정작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42]은 성령이 소멸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5)

이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는 것 뿐이지, 성도가 믿음에서 결코 떠날 수 없음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했다는 수식어는 단순히 구원의 때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일 뿐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43]하노라. (빌1:3-6)

이 구절은 문맥 상 빌립보의 성도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복음을 위한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빌립보의 성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준다면 결국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바울이 격려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공부 잘하는 고등학교 3학년에게 대학 잘 갈 거라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그 고등학교 3학년이 이런 말을 들었다고 대학에 잘 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구절도 구원의 보장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2-14)

정작 이후의 빌립보서 내용에서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당부를 하며, 사도 바울 자신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처지라는 말이 나온다. 만약 한번 받은 칭의가 영원히 간다면, 두려워하며 떨 이유도 없고, 구원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전1:4-8)

이 구절 역시 빌립보서 1장 3-6절 처럼, 신실한 성도들을 대상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주면 결국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격려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44] (롬11:29)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볼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끝까지 유대 민족을 버리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회를 계속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을 굳이 개인 구원과 연관 시키자면,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그 사람을 버리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성도의 견인과는 전혀 상관 없는 문맥의 구절이고, 이 구절이 성도의 견인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보는 관점을 로마서 11장 문맥에 대입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구원 받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94:14)

이 구절은 로마서 11장 2절에서 인용되었는데, 로마서 11장의 문맥 상 이 구절은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고, 유대인들 중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즉 로마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구절은 성도의 견인이랑은 상관 없고, 그저 하나님은 혈통과 상관없이 믿음의 사람들을 택하시고 돌보신다는 뜻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요한계시록 3장 5절의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는 말은 언뜻 보면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것 같이 보인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12)

그러나 바로 뒤의 12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천국에 이미 들어간 사람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은, 3장 12절의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와 병행 구절로, 이미 천국에 간 사람은 천국에서 쫓겨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이 구절은 예수님이 예수님께로 오는 성도를 내쫓지 않는다는 말일 뿐이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예수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

하나님이 아무도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기를 원하셔서 모든 성도의 구원이 보장된다면, 같은 논리로 에스겔 18장 23절에서는 하나님이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고, 바울 서간에 있는 글들이 하나님의 뜻이 맞다면 디모데전서 2장 4절[45]에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떡하니 나와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만유구원론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어도 그것보다 상위에 있는 원칙이 있으면 그것을 우선시 하는 것이, 이사야 46장 10절[46]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것이다. 성도들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긴 하지만, 공의를 굽히지 않는 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뜻이다.[47] 어떤 사람이 한번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회개시켜서 처벌을 면하게 하는 복을 내리신다면, 행한대로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된다.[48] 당장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았고,[49]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억지로 이루시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어지간해선 회개할 기회를 계속 주시기는 할 것이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18:12-14)

성도의 구원이 취소 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원래는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었는데 그대로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상태로 바뀌었다는 뜻이고,[50] 실제로 성도가 그렇게 되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든 것이다. 또한 길 잃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끝까지 고집 부리면 찾지 못할 가능성이 만일 찾으면이라는 표현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100퍼센트 확률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본문에서처럼 다급한 심정으로 찾을 이유가 없다. 누가복음 15장에도 양 백마리 비유가 있는데, 누가복음 15장 10절에서 양을 찾는 것이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다. 성도의 견인이 보장된다면 하나님이 성도를 강제로 회개시킨다는 것인데, 회개가 하나님이 인간을 조종해서 강제로 시키는 것이라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회개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각종 벌을 내린다고 하시며 회개를 조건으로 내거신 말씀들을 매우 억지스럽게 해석해야 된다. 즉, 각 성도가 회개하는 것 여부는 성도의 자유의지와는 상관 없고 예수님 주권인데, 예수님이 성도들한테 회개 안한다고 뭐라 하시는 상황인 것이다.

구원의 취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성경에 굉장히 많고, 전세계 기독교를 봐도 구원의 취소 가능성을 말하는 교회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한국은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장로교의 교세가 강해서 그런지,[51] 구원의 취소를 말하면 이단이라며 과민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3. 로마서 9장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10-24)

로마서 9장은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로마서 9장은 칼빈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해석되며, 문맥상 이어지는 로마서 11장 32절[52]은 현재 믿지 않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말하면서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을 오히려 반박한다. 하나님이 각 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여러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지하신 결과,[53] 야곱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따르려는 성품을 지녔고, 에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보단 세상 것을 따르는 성품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즉, 구원받기를 원해서 육신의 힘으로 자기 의를 세우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게 택함받지 못했듯이, 하나님은 개인의 희망사항이나 육신적 노력과는 상관 없이,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될지에 대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성도들을 미리 택하신 것이다. 로마서 9-11장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육신의 힘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는 말은 그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이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혀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또한 로마서 9장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리 개개인의 잠재력을 보셔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고 예지되는 사람들은 미리 긍휼히 여기시고, 어차피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걷어 찰 게 뻔한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더욱 완악하게 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사용하는 케이스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주체가 둘이 나오는데, 바로 자신과 하나님이다. 바로는 애초에 하나님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으셔도 어차피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멸망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차피 멸망받을 바로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바로를 좀 더 완악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로마서 9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구원받기를 원해서 자기 힘으로 율법의 행위를 온전히 지키려고 한다고 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아야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 없이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을 택하시어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미리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을 미리 택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과 택하지 않은 자들을 각각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주권적으로 사용하신다.

이와 같이 인간의 희망사항이나 육신적인 노력과는 관계 없이, 하나님은 예지능력을 바탕으로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될 사람들을 미리 택하시고, 또 사람들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주권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관점에서 로마서 9장을 읽는다면 로마서 9장은 아무 무리 없이 읽힌다. 만약 로마서 9장을 TULIP 교리가 말하는 이중예정론적인 시각에서 읽는다면, 다른 성경 구절들과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구절들에 대해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23:37)

이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보자. 신명기 30장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시기 위한 전제조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려고 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기를 원하셨다는 뜻이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이 성경구절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만 내버려두면 100퍼센트 확률로 불순종할 것을 뻔히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종시킬 능력도 있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부러 완악하게 내버려두시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기를 원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장 37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긴 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실망하셨다고 해석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해석이 된다.

하나님이 개개인이 회개할지 여부를 미리 알 수 있는 예지능력이 있다면, 예지에 기초해 애초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은 없던 거고, 하나님은 어차피 안 될거라고 미리 예지하셨을텐데 뭐하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려고 하셨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반응에 대한 예지능력이 분명 있으시고,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조종해서라도 계획한 바를 반드시 이룰 능력도 있으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은 계획을 짜시는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한 시점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예지한 결과, 장기적으로 볼 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완악함이 예지되어 택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고, 회개할 것은 확실하고 끝까지 순종할 가능성도 어느정도 보여서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초심을 잃고 타락해 버려서[5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더 이상 봐줄 수 없던 것이다.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볼 때,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열어둔 느슨한 계획들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을 컨트롤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정도는 존중하셔서 일부러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미래의 큰 방향성이 갈리는 분기점까지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정도 조종[55]해서라도 그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지만, 인간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분기점에서 갈라지는 여러 루트들 중 어디로 갈 것인가는 하나님도 그냥 여러 가능성을 지켜만 보시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입장에서 미래가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면, 출애굽기 32장 9-10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의 후손을 선민으로 삼겠다고 하신 말은, 하나님이 100퍼센트 확률로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신 게 되어버린다. 미래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 관점을 취할 경우, 선악과 사건도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보다는 타락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게 찬양을 받는 것이 하나님 스스로에게 더욱 영광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는 루트로 갔다는 식의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로마서 9장 외에도 칼빈주의 측에서 이중예정론의 근거로 드는 구절들이 몇 개 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16:4)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악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줘도 어차피 하나님께 반항하며 악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주권적으로 악인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이 구절 역시 육체의 행위 때문에 택함과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복음을 듣고 회개할 것이 예지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예지되는 바에 맞춰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그 사람들에게 소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56]에서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각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셨다고 하고 있는데, 이로써 하나님이 개인의 잠재력을 예지하고 소명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디모데전서 1장 12절[57]에 하나님이 바울의 충성심을 미리 아시고 바울에게 사도직을 맡기셨다고 나와있는 것도, 하나님의 개개인의 잠재력을 보시고 그 사람을 주권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디모데후서 1장 9절의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창세 전부터 개인 한명한명을 택했다고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계획이 있었는데 그 은혜가 현재 본인들에게 미쳤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1:4-5)

이 구절 또한 예레미야가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예레미야가 어떤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클지 예지하셨고, 그에 걸맞는 소명을 하나님의 주권대로 주셨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5)

이 구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바울이라는 개인의 특성에 대해 미리 예지하셨고, 예지하신 바에 맞춰 바울을 택하시고, 바울을 주권적으로 쓰셨다고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또한 출애굽기 32장 9-10절에서 모세가 선민의 유일한 조상으로 선택될뻔한 것을 볼 때, 꼭 택함받는 시점이 모태에 있을 때인 것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의 순종과 기도에 따라, 태어나기 전에는 택함받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택함을 받고, 그 이후에 부름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4. 창세 전 예정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이 구절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 창세전의 계획에 따라 한명 한명의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창세후라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다. 어떤 사람들인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할 것을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셨고, 그 창세 전부터 택함받은 공동체가 '우리'가 되었으므로,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성도 한명한명을 예정했다고 해석하면 성경적으로 엄청난 모순이 발생한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32:9-10)

만약 하나님이 창세 전에 베냐민 지파에 속한 바울이라는 개인을 무조건 탄생시키고 바울을 무조건 구원하기로 계획하셨다면, 하나님은 출애굽기 32장 9-10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 시키겠다고 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시는 게 창세 전부터 있던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계획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그런 말을 하실 수 없다. 즉, 창세전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출애굽기 32:9-10에서 거짓말 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므로, 이 구절은 출애굽기 32장 14절에 나온 그대로, 하나님이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할 마음을 품으셨으나 모세의 간청으로 뜻을 돌이키셨다고 해석해야 자연스럽지,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억지스럽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는 것은 이 밖에도 많이 나오고, 하나님이 뜻을 얼마나 많이 돌이키셨는지 예레미야 15장 6절에는 하나님이 뜻 돌이키는 게 지칠 지경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이 뜻을 확고하게 한 이후에는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1:20)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롬16:25-26)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1)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1: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20-21)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2:13)

이런 구절들 역시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 정해져있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을 택할 계획이 있었고, 창세 후에 그 계획이 현실이 되어 창세전의 큰 틀에서의 계획에 의해 성도들이 선택되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5. 절대예정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1:11)

하나님은 어떤 일에 친히 개입하시는 경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결정대로 행하시고, 그 결정대로 세상이 흘러갈 것이 예정되어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렘7:31)

그러나 이 구절을 볼 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친히 작정하고 계획하신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이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고 자녀들을 불에 태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작정하셨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분명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생각하지 않은 일을 작정하고 계획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사5:2-4)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바라셨고, 또 그것을 기다리셨다고 성경에 나와있다. 만약 미래가 100퍼센트 정해져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면, 하나님은 100퍼센트 확률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셨고, 또 그것을 기다리셨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해야 이 구절이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139:16)

이 구절은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지, 그 계획이 숨쉬는 것 하나하나까지 작정할 정도로 타이트한 것인지, 또 한 가지 계획만 있는 것인지 여부는 이 구절로 알 수 없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46:10)

이 구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의 범위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에스겔 18장 23절 말씀과 대놓고 모순이 생겨버린다. 이 구절은 하나님은 옛적부터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셔서, 그걸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고자 하시면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일일이 계획하시지 않았거나 느슨하게 계획하신 일들은, 그 과정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 발생할지라도, 사람들의 자유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 큰 틀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의 후손만을 선민으로 세우려다가 뜻을 돌이키셨다거나, 그 외에도 성경에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는 뜻을 돌이켰다는 표현이 여러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마음을 확고하게 하기 이전에는 기존 계획안을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29)

칼빈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절대 예정의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이 구절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난다는 뜻이지 사소한 모든 일들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되게 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지켜보시고 있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막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6-7절의 병행구절을 같이 보면[58]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미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5.1. 절대예정과 자유의지

인간의 미래가 이미 전부 정해져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한다.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먼저 정의 해보자면, 가능한 여러가지 선택지들 중 하나를 택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한 시간 전에 분식집에 가서 라면, 김밥, 떡볶이 중 라면을 먹었다고 가정해보자.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 자신의 자유의지로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시간 전에 분식집에 가서 라면을 먹었던 것이 분식집에 가기도 전에 이미 정해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면, 김밥 또는 떡볶이를 먹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59] 즉, 라면이라는 하나의 가능성 밖에 없어서 그 가능성대로 간 것 뿐인데, 라면을 선택을 했을 때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 뿐이다. 이것을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적용하면, 인간은 매순간 선택지가 단 하나 밖에 없어서 그 선택지대로만 움직이는 기계이며, 그저 행동할 때에 그 행동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다고 착각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좀 더 보편적인 논리로 접근해보기로 하자. 시간이 흐르며 이어지는 각각의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논리적∙물리적 연속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할 때의 마음의 동기는 특정 시점에서 발생하며 이전까지의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앞으로 미래에 있을 마음의 동기가 이미 불변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이전까지의 사건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거나 그 자체로 이미 주어진 외생변수까지 합쳐진 것이며, 그 외의 다른 것일 가능성은 없다. 미래의 마음의 동기가 그 이전까지의 사건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라면 행위자에게는 자율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미래의 마음의 동기가 이미 주어진 외생변수까지 합쳐진 것일 경우에는 현재 행위자와 그 외생변수가 현재 시점에 공존하게 되는데, 현재 시점 기준으로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으므로 미래의 마음의 동기가 행위자의 자율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미래의 사건이 이미 전부 정해져 있는 경우 행위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위에서의 논증에 따르면 미래가 전부 정해져 있는 경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경우 미래가 전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데,[60] 성경에는 수많은 명령문들과 가정법 및 하나님의 인간들에 대한 실망이 나오며, 이러한 문장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특정 상황들 하에서의 인간의 뻔한 반응들[61]을 조합하거나 필요한 경우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여 계획을 이루신다고 볼 수 있다.

6. 한국 장로교의 경직화

한국은 개신교 교세가 1위를 찍는 국가 중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을 중요시하는 장로교회(개혁교회)의 교세가 강한 편에 속한다.[62] 한국 개신교계에서 칼빈주의를 대놓고 비판했다가는 장로교단들의 칼빈주의자들에게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의 경우 아르미니우스주의(알미니안주의)나 감리회웨슬리안주의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간 율법주의적 행위구원 교리이기 때문에 칼빈주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타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생각으로, 타 교리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다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밥을 먹는 정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와 대등한 위치에 놓는 교리가 결코 아니다.[63] 또한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고 그 행위 때문에 자신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은 돼야 율법주의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죄를 지으려는 욕망이 들거나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죄를 짓게 할만한 유혹을 멀리 하자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다시 말해, 행위로 구원 받자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자는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를 이단으로 여기는 가톨릭정교회[64]에서는 물론이고 전체 세계 개신교를 봐도 칼빈주의를 주장하는 교회들보다 칼빈주의를 주장하지 않는 교회들이 훨씬 많다.

7. 장로교회(개혁교회) 내부에서의 비판적 재검토

장신대 총장 김명용 박사는 최근 온신학회 아카데미의 2회차 강연을 천호동 광성교회에서 진행했다. 이번 주제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바르트 이후 신학의 예정론의 새 관점’이었다.

...김명용 박사는 “칼빈은 하나님의 전적 선택 교리를 위해, 인간의 전적 무능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전적 무능이란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절대적으로 선택하기 위한 전제로서,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결국, 구원 받기로 선택 받은 사람에게는 한없는 위로겠지만, 지옥에 떨어지기로 예정된 사람에게는 한없는 절망인 것이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이러한 예정론의 잘못된 인식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뿌리내렸다”며 “도리어 칼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라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예정론이 잘못된 교리 체계로서 비판받은 지점은 어디일까?

김 박사는 칼 바르트를 빌려 “하나님의 예정을 고정된 체계로 바꿨기 때문”이라며 “만일 병상에서 누워 죽어가는 사람에게,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다’라는 말만 한다면, 이는 복음전도의 절박성을 훼손시키는 예정론의 오용”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칼 바르트가 1936년 했던 강연에서 한 말이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한 전통적 예정론은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 하등 상관없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그는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선택하기 위한 결의”라고 덧붙였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재차 밝혔다.

특히 그는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과 위배되는 일은 결코 하실 수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하는 하나님은 폭군의 모습이지, 십자가에 계시된 자비로운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칼 바르트가 바라본 '이중 예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히 '선택'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유기'하신 사건”이라고 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으신 단 한 분”(Der einzige Verworfene)“이라고 덧붙였다.
-〈칼 바르트의 예정론, 하나님 은총과 인간의 자유는 같이 간다〉. 기독일보

스위스 개혁교회(장로교회) 신학자 칼 바르트 이후로, 장로교 내에서도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가 늘어났으며, 이는 한국 장로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장신대 총장 출신인 김명용 박사의 설명에서 보듯,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는 결코 '몇몇 괴짜 장로교 신학자의 일탈'이라 할 단계가 아니다. 물론 이런 신학계의 연구 성과가 일선 목회 현장에서 신자들에게 교육되고 있다고 할 순 없으며,[65] 모든 장로교 신학자들이 바르트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예장합동부터가 바르트에 부정적이지만, 최소한 전세계적인 추세에서 장로교 내 칼빈의 위상이 예전 같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1] 출처는 위키백과 칼뱅주의이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14편 2-4절 인용)[3] 지식적인 믿음(belief)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올려드리는 믿음을 말한다. 로마서 등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할 때의 믿음은 지식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매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만드는 믿음(faith)을 말한다. 지식적으로 믿는 것으로 구원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신천지 등의 사이비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회개를 한 이후 마음이 깨끗해진 결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완악한 마음이 변화되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거나, 이미 믿고 있는 성도의 마음에 의심이 들 때 믿음을 발휘하면 성령께서 그 의심을 제거해 주실 수는 있다.[4] 개역개정보다 새번역이 더 정확히 번역되어 있다.[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장 17절)

이 성경구절을 볼 때, 만약 믿음의 크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 된다.
[6]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장 19절)

이 성경구절에서는 인간이 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대비시키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로써 믿음을 발휘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 26절)[8]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9)[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 9절)[10] 마태복음 15장 27절에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에게 주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셨다. 이 사건의 시점은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인 것으로 보아, 성령 강림절 이전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가 쓰여진 시점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이후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11]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장 39절)[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13장 10절)[13]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10장 42절)[14] 다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요한복음 3장 5절을 볼 때, 단순히 죄사함의 차원을 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거듭나는 것에는 성령의 내주가 필수적이다. 요한복음 3장 13절이 예수님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구원받은 구약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긴 했지만 거듭나게 하는 역할로 임하신 것은 아니다.[15]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장 23절)

요한복음 6장 45절의 하나님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예수님께로 온다는 말로 볼 때, 요한복음 6장 44절은 말씀을 듣고 온전하게 깨달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도 관련된다고 할 수 있는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마음에 해당하는 좋은 땅이 회개하여 깨끗해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16] 또한 로마서 12장 3절은 문맥 상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 말하는 뉘앙스가 강하다.[17]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19] 칼빈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별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회개가 터져나오는 현상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영적인 의지에 대해 하나님이 반응하시기 때문에 발생한다.[20]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2] 기회를 줘봐야 거절할 것이 뻔하거나, 복음을 듣지도 못한 채 주위 사람들 사는대로 살아갈 것이 예지되는 경우 등등[23]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로마서 11장 7,23,31-32절)

로마서 11장을 쭉 읽어보면 문맥 상 그들은 현재 믿지 않는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키는데, 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들 역시 현재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추후에 택함을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 등의 사람들이 모태에서 이미 택함을 받았다고 하여, 그것이 택함받은 사람들은 전부 모태에서 이미 택함을 받았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24] 다만 하나님은 택할 자들을 그들이 회개하기 이전에 미리 택하신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택함받을 경우 택함받는 시점은 기회가 주어진 첫 시점과 회개 시점 사이라고 할 수 있다.[25] 아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면,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1, 2, 3 번째 부류로 바로 바뀔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26]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27]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28]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의 관점에서[29] 열정적이고 과격하게 전도 등을 한다고 해서 그 종교적 열정에 비례하여 전도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그래도 좀 있는 사람한테는 세상 풍조 따라 살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만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온유하고 절제된 언행을 보임으로써 신뢰와 호감을 쌓아야 하며, 그것이 전도의 밑거름이 된다고 할 수 있다.[30] καταργέω: '폐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스도로부터 폐하여 졌다고 번역 가능하다.[31] ἐκπίπτω: '떠나다'라는 뜻으로 원문을 직역하면 은혜로부터 떠났다고 직역 가능하다.[32] 죄에 넘어지더라도 곧바로 스스로의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며 믿음을 의지하여 죄와 싸워보려는 의지를 지닌 상태[3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34]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3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36]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2장 23절)[3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38]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4절)[39] 성경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7-18)'라는 말씀처럼, 죄를 짓는 것의 원인이 영혼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즉, 각종 세상적인 유혹이 성령충만한 성도의 영적 수준을 낮춰놓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영적 수준이 낮아질 때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들을 짓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에베소서 6장 11-18절에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라고 하고 있고, 요한1서 5장 21절에서는 각종 유혹들을 부추길 수 있는 우상들을 애초에 멀리 하라고 말하고 있다.[40] 당장 마태복음 18장 12-14절의 비유가 양이 제멋대로 가버려서 예수님이 양을 잃은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41] 요한복음이랑 똑같이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의 3장 5,12절도 천국에 이미 들어간 사람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42]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4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롬15:14-15)

빌립보서 1장 6절에 나온 '확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πείθω'는 로마서 15장 14절에서도 나오는데, 문맥 상 100퍼센트의 확신의 의미보다는,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표현하면서 혹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을 내비치고 있다.
[44] 개역개정보다 새번역이 더 잘 번역되어 있다.[4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46]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7]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34장 12절)[48]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의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여러 여건을 마련하시는 것은, 공의를 잠시 유보하는 것일 뿐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가지 않는다.[49]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장 2절)[50] 칼빈주의적 관점에서는 이 비유를 미리 택했지만 아직 구원을 받은 적은 없는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열 드마크라 비유를 보면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마태복음 18장과 똑같이 양 백마리 비유가 나오고, 그 뒤에 곧바로 열 드마크라 비유가 나오며 두 비유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말이 나온다. 열 드마크라 비유는, 한 여자가 열 드마크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드마크라를 잃어버려서 그것을 찾다가 결국 찾아내서 기뻐하는 내용이다. 즉 드마크라가 10개->9개->10개가 된 것이고 한 드마크라는 구원에서 잠시 탈락했던 것이다. 드마크라를 찾는 것이 미리 택했지만 아직 구원을 받은 적은 없는 사람이 회개하는 것에 해당한다면, 열 드마크라를 전부 잃어버리고 하나 하나 찾다가 마지막 하나를 찾는 상황을 묘사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51] 구원파,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교회 등도 성도의 견인을 매우 강력히 주장한다.[5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53]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겔3:6)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1)

하나님이 '어땠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다른 경우의 수를 예지하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미래는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시뮬레이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장 4절)'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55] 이사야 29장 10절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깊이 잠드는 영을 붓는 사건이라던가, 출애굽기에 하나님이 바로왕을 완악하게 만드는 사건 등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자유의지를 조종하기도 하신다는 것이 증명된다.[56]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25:15)[5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58]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59] 주문 시점에 라면 외의 메뉴를 시킬 확률은 이미 0%였지만, 주문 시점에 라면 외의 메뉴를 시켰을 수도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 미래가 전부 정해져 있다면, 라면 외에 다른 메뉴를 시키는 것은 겉보기에만 인간이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일 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내린 선택을 바꾸는 것과 똑같이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60] 대우 관계[61] 당장 인간도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한테 시비를 걸면 그 사람과 싸우게 될 것을 아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에 대해 훨씬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믿게 될 자를 특정 시점에 미리 택하는 것 같이 100퍼센트 예측 가능한 부분도 있겠지만, 모든 면에서 100퍼센트의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힘든데, 모든 면에서 100퍼센트의 예측이 가능하게 되는 순간 그건 자유의지가 아니라 기계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100퍼센트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성질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부 예정해 놓으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 스스로가 때로는 미래의 여러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원하신 것이다.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동을 지켜만 보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야말로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선택의 폭을 제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한다.[62] 역사적으로 보자면 개신교 다수 국가 중 스코틀랜드, 스위스, 네덜란드가 장로교회(개혁교회)의 교세가 강한 곳으로 꼽혔다. 그러나 현대에 네덜란드와 스위스 개신교가 가톨릭에게 교세가 역전 당하면서 본의 아니게 한국 장로교의 중요성이 울라갔다.[63] 특히 계보상 가톨릭·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이 강하기에, 은총의 무상성(사람이 잘나서 은총을 얻는 게 아니다)을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복합적이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들이 많기 때문에 해석상 이견들이 있기는 하지만, '은총의 무상성'을 말하는 건 분명하다.[64] 24억 기독교 인구 중 가톨릭정교회 인구가 대략 16억명이다.[65] 일선 목회는 최종학력이 국민학교인 할머니부터 대학 나온 인텔리까지 넓은 범위의 신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학술적인 맛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