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도일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둘러보기 틀 모음 | |||
개인 수상 | ||||
| ||||
베스트팀 | ||||
|
아일랜드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케빈 도일 Kevin Doyle | |
본명 | 케빈 에드워드 도일 Kevin Edward Doyle | |
출생 | 1983년 9월 18일 ([age(1983-09-18)]세) 아일랜드 웩스퍼드 주 애덤스타운 | |
국적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1cm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 |
소속 | 선수 |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 FC (2002~2003) 코크 시티 FC (2003~2005) 레딩 FC (2005~2009)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2009~2015) →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4 / 임대) → 크리스탈 팰리스 FC (2014~2015 / 임대) 콜로라도 래피즈 (2015~2017) |
국가대표 | 62경기 14골 (아일랜드 / 2006~2017) |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레딩 FC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으며,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도 오랜 기간 활약했다.
2. 클럽 경력
2.1. 레딩 FC
아일랜드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 FC의 유스를 거쳐 프로에 입단 한 이후 아일랜드 리그 소속의 코크 시티에서 3년 동안 76경기에서 25골을 득점하면서 가능성을 보였다. 본래 오른쪽 윙이었지만 스트라이커로 전향한 후 인터토토 컵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잉글랜드 구단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결국, 2005년 6월 팀 동료 셰인 롱과 함께 챔피언십 소속의 레딩 FC로 이적한다.
레딩 입단후엔 백업요원으로 시작했지만 곧 주전 스트라이커가 된 도일은 2005-2006 시즌에 51경기에서 19골을 득점하며 팀의 챔피언쉽리그 우승과 챔피언쉽 역대 최다 승점 등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며, 레딩의 창단 첫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끈다.
그리고 케빈 도일은 첫 프리미어리그 시즌임에도 센세이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게다가 2006-07 프리미어리그엔 설기현의 이적으로 한국에서도 전 경기가 중계방송 되는 등 도일은 한국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이 때 도일은 리그에서 32경기에 출전해 13골을 득점하여 리그 득점 6위에 올랐고[1] 올해의 영플레이어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다.
소속팀 레딩도 다른 프리미어리그 팀들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승격팀이 리그 8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2006-07 시즌의 레딩 FC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엄청난 선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어진 2007-2008 시즌 레딩은 주축 선수들의 이적으로 인한 조직력 악화와 지난 시즌만큼의 경기력이 나오지 않아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당한다.[2]
케빈 도일은 여러 EPL 팀들의 오퍼에도 불구하고 도일은 챔피언쉽으로 떨어진 팀에 1년 더 남아 승격을 이끌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1년 잔류를 택했고, 팀도 승격권에 꾸준히 도전하면서 승격에 성공하나 했지만 레딩은 플레이오프에서 번리 FC에게 패하면서 승격에 실패하게 된다.
시즌이 끝난후엔 레딩과 도일은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수순대로 레딩은 EPL 구단들의 오퍼를 들었다. 그 결과 당시 레딩 이적료 수입 레코드였던 650만 파운드로 프리미어리그의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이적한다.[3]
2.2.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울버햄튼에서 도일은 4-5-1 포메이션의 원톱 스트라이커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티븐 플레처의 합류로 잠시 입지가 흔들린적도 있었지만, 3년간 꾸준히 리그에서 주전으로 출전한다. 이때의 도일은 중,하위권팀의 준수한 스트라이커로 괜찮은 활약을 선보였었다.[4] 하지만 소속팀 울버햄튼은 11-12 시즌에 강등당했고, 12-13 시즌엔 챔피언십에서도 23위를 기록하며 다이렉트로 두 시즌만에 3부리그까지 강등을 당하게 된다.
도일은 타팀 이적이 예상되었으나 하필 이때엔 부상으로 이적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후 울버햄튼의 전력에서 점차 제외되면서 점차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엔 임대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크리스탈 팰리스 FC 등으로 갔으나 몇 시즌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울버햄튼과 계약이 만료될 무렵엔 어느새 도일의 나이도 30대를 넘어섰다.
그리고 국가대표팀 동료 로비 킨이 뛰고 있던 MLS로 떠났다. MLS의 콜로라도 래피즈에서 3시즌 동안 활약하다가 2017년 9월, 헤딩으로 인한 두통 증상 때문에 은퇴[5]를 선언한다.
3. 국가대표 경력
2002~2005년 동안 아일랜드 U21 대표팀을 거치면서 11경기 7골로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레딩 입단 후,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2006년 성인 국가대표팀에 데뷔에도 성공한다.
그리고 당시 아일랜드의 간판 스트라이커 로비 킨의 파트너로 낙점받아 꾸준히 주전 스트라이커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메이저 대회와 인연은 거의 없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 주전으로 뛰었으나, 팀은 티에리 앙리의 "신의 손" 사건 때문에 탈락했다. 유로 2012는 도일이 참여한 유일한 메이저 대회였는데, 이 때 아일랜드는 스페인, 이탈리아, 크로아티아라는 죽음의 조에 걸리며 3패 탈락했다.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밀려나있던 도일은 유로 2016때 엔트리 합류가 예상되었으나, 대회 직전에 있었던 스위스와의 평가전에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으며 엔트리에서 탈락했다.[6]
그후, 2017년 선수생활 은퇴와 동시에 대표팀도 은퇴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대표팀에선 조반니 트라파토니 시대 때 중용 받아 대다수 기간 동안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90경기를 출전하면서 아일랜드의 붙박이 공격수로 오랜기간 활약했다.
[1] 시즌 초 득점 1위까지 했으나 부상으로 공백기가 생긴 후 페이스가 떨어졌다. 그래도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인걸 감안하면 엄청난 득점력으로 볼 수 있다.[2] 사실 마지막까지도 잔류 싸움을 할 정도로 쉽게 강등당하지는 않았다. 당시 풀럼과 매우 치열한 강등다툼을 했으나 풀럼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레딩이 극적으로 강등당했다.[3] 이후 길피 시구르드손에 의해 기록이 깨진다.[4] 다만 레딩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득점력 부분에선 아쉬웠다. 울버햄튼의 EPL 시절 3시즌간 9골, 5골, 4골로 레딩 시절 두자릿수 득점을 넣어주던 시절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부분[5] http://www.footballi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33[6] 상대 스터드에 찍혀 다리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살이 심하게 찢겼다.